[전원속의 작가들]광주 태화산자락서 작업 화가 장순업 | ||
"돈은 부질없어… 화폭만 바라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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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제자 조석진과 정인홍이 멀리서 그를 찾아 왔다. 작가는 모처럼 흥이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은 돌고 돌았다. 예술과 인생은 안주가 됐다. 작가로 산다는 녹록지 않은 현실이 더욱 취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무엇으로 사느냐고 물었다. 그냥 산다고 한다.
시쳇말로 그는 잘 나가는 작가다. 80년대 초 경기가 좋을 땐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림이 팔렸다.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을 피해 도망을 했을 정도. 너무 단맛에 취해 있으면 작가정신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랬다. 다이아몬드가 모래알처럼 굴러 다니는 것에 비유했다.
예술가가 그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란다. 아름다움을 말해 주는 역할로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것. 돈이 되고 안되고는 예술가의 권한 밖이라는 얘기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작가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돈을 쫓다 보면 돈도 작품도 잃는다고. 그냥 묵묵히 화폭만 바라보며 걸어가라고.
1988년 작가는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그에게 전원작업은 화풍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꽃과 새와 나비 등 자연 질감이 화폭에 녹아 들었다. 작가는 자연을 닮은 아동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형상도 중요치 않다. 선과 색, 면이면 족하다. 칠하고 붙이고 긁어내고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와 꽃의 형상은 찌그러져 선과 먹색으로 해체됐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형상이 드러난다. 토기와 흙의 따뜻한 질감과 맛도 화폭에 초대했다. 어렴풋이 색동옷을 입은 소녀들이 화폭에서 춤을 추며 나오는 듯하다. 여자가 예쁘면 사귀고 싶듯 그런 그림이다.
민화는 물론 장승, 망부석, 고분벽화, 탱화, 단청, 와당무늬도 해체되기는 마찬가지. 작가는 이를 고깃덩어리를 썰고 양념해 입맛을 내는 요리과정이라고 했다. 전통 진경산수와 목공예품도 요리재료가 된다. 화폭재료와 물감도 동서양을 넘나든다. 수묵과 아크릴, 광목천 한지 삼베천 등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작가의 소화력이다. 다름아닌 사물을 읽어 내는 감각력이다. 맛을 내는 손맛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양념을 손으로 버무리는 듯하지만 오묘함이 거기에 있다. 같은 이치로 작가가 겉으로 보기엔 건성으로 칠하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어느 지점에서 멈춰설 줄 아는 것에서 그림의 맛이 나온다.
작가는 앞 냇가의 돌이나 나무토막도 작품 재료로 삼고 있다. 자연색이 요즘처럼 좋은 적이 없다. 작가의 작업이란 게 결국 자연이라는 큰 우물에 침 한 번 뱉고 내 물이야 하는 식이 아니냐는 것이다. 자연에 덧칠하는 ‘미안한 낙서’라고 했다.
그가 작업실 밖 정원으로 나선다. 각종 야생화와 적송이 그의 꼼꼼한 손길로 가꿔져 있다. 호미를 들고 풀을 메는 폼이 영락없는 촌부다. 그는 정원이라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했다. 거기서 얻은 감흥들은 고스란히 그의 화폭으로 옮겨진다.
그는 순간포착의 미학을 즐긴다. 빛과 시간이 조화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최근 타계한 20세기 사진 미학의 거장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연상시킨다. 자연의 빛 아래서 찰나적으로 사물과 하나되는 생의 순간을 화폭에 옮기려 한다. 화가에게서 그림은 밥 먹는 일과 같은 것이어서 삶의 어느 순간이 바로 그림의 일부가 된다. 작가는 그래서 찰나의 순간을 위해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존재다.
어둠이 다시 작가의 작업실 지붕에 내려 앉는다. 땅거미질 무렵 고향 초가마을을 산마루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일부러 초가지붕처럼 개울쪽을 향해 미끄러져 흐르도록 설계했다.
창틀과 난간 철책 등 색깔도 그가 즐겨 쓰는 우리의 전통색인 오방색(적 청 흑 백 황)이다. 건물 자체도 한 폭의 채색한국화를 그리듯 지었다. 새어나오는 불빛마저 정겹다. 서양식 건물에 한국적 정서를 불어 넣은 셈이다.
작가가 다시 붓을 들었다. 밤은 깊어만 간다. 천지만물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의 뒷모습이 고독하다.
편완식기자/wansik@segye.com
2004.08.23 (월) 1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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