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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나라시에 있는 홋케지(法華寺)

바보처럼1 2008. 4. 14. 18:54
[홍윤기의 역사기행](58) 나라시에 있는 홋케지(法華寺)
  • [홍윤기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58) 나라시에 있는 홋케지(法華寺)

     오른쪽 무릎까지 길게 뻗은 팔 모양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목조불상이 있는 사찰이 있다. 일본 나라시 홋케지초(法華寺町)에 있는 고대 여승들의 명찰 ‘홋케지’(法華寺)의 ‘11면관음상’이 그것이다. 이곳 니사(尼寺)의 11면관음상은 키 1m의 편백나무(檜) 한 둥치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9세기 중엽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홋케지의 지젠(知善) 스님은 “관음상의 오른팔이 유난히 긴 것은 그 팔로 이승의 모든 불우한 사람을 구휼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관음상은 본당의 중앙 벽면 쪽 나무방에 안치된 비불(秘佛)로, 지정된 특별 공개일(5월1일∼20일, 10월25일∼11월10일)에만 배관할 수 있다.

    도쿄대학 문화사학자 와쓰지 데쓰로(和?哲郞·1889∼1960) 교수는 “가슴이 불룩한 여성다운 유방과 몸매의 풍만한 육감, 그 부드러움과 나긋함, 기묘하게 기다란 오른쪽 팔도 통통하고 팔찌를 끼고 있는 손가락 끝으로 동그라니 천의(天衣)를 살짝 추켜올리는 독특한 행간, 이 불상에서 밀교예술의 우수성을 헤아려도 좋을 것 같다. 밀교예술에는 육감성이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온갖 것에서 유일한 진리의 표현을 캐내려고 하는 밀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여체(女體)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서도 불성(佛性)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古寺巡禮’ 1947)고 지적했다. 

    또 도쿄대학 불교건축 사학자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오른쪽 팔을 유난히 길게 만들었으며 오른쪽 엄지발끝은 바닥의 연꽃바탕 대좌 바깥쪽으로 벗어나게 만든 데다 엄지발끝이 번쩍 추켜올려지도록 조각한 것이 다른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표현이며, 전체적인 느낌은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 미모의 고묘황후(光明皇后·701∼760)의 모습을 방불케 하고 있다”(‘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고 설명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 역시 필자에게 11면관음상에 대해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백제계 불교 조각가이며, 화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사찰의 일반적인 본존불 입상은 꼿꼿하게 직립하는 부동자세이므로 이 관음상처럼 허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보기 드물게 동적인 것으로 백제 불교예술의 발자취인지도 모른다”고 지적한 바 있다.

    홋케지를 창건한 것은 고묘황후이다. 그녀는 쇼무천황(聖武天皇, 재위 724∼749)의 총명하고도 자비심 큰 황후로서 741년 이 여승 사찰을 몸소 세워 사회복지에 공헌했다. 최초의 사찰 명칭도 ‘법화 멸죄지사(法華 滅罪之寺)’로 불렀다고 한다. 고묘황후는 사찰 이름에 걸맞게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 ‘시약원’ ‘비전원’ 등을 설립하는 등 획기적인 병약자 구원에 앞장섰다. 그러기에 모두들 고묘황후를 가리켜 ‘광명자’(光明子)라고 존칭했다.
    ◇11면관음상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 홋케지 본당은 1596년 큰 지진으로 붕괴된 것을 1601년 헌 목재들로 재건한 것이다. 경내 하얀 등롱은 정갈하면서 조용한 비구니 사찰 홋케지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다.

    고묘황후는 백제인 왕족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658∼720)의 딸이다. 불교 신앙에 돈독했던 고묘황후는 부처님의 자비를 몸소 떠받들며 속세의 죄악을 없애도록 염원한다는 참뜻에서 백제계 여승들을 위해 홋케지를 세웠으며, 당시 왕실에서는 “10명의 여승을 입주시키고 논 10정보를 베풀었다”(‘속일본기’ 797). 홋케지라는 명칭은 여성의 성불을 설파하고 있던 불경의 ‘법화경’에서 그 가르침을 수용한 것 같다.
    ◇일본 나라시에 있는 홋케지의 목조불상이자 국보인 11면관음상은 육감적인 가슴과 몸매 등 부드럽고 나긋한 자태로 9세기 불상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법화경’은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백제에서의 재위기간 523∼554)이 왜왕실로 538년에 불교를 전파(‘上宮聖德法王帝說’ 등)했던 대승불교의 기본 경전이다. 또 쇼토쿠태자(聖德太子·574∼622)가 나라의 왕도 아스카(飛鳥)땅의 백제계 왕실에서 숭경했던 경전이며 그 영향은 왕실불교의 기본정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1917∼1983) 교수는 “스이코천황(재위 592∼628) 14년(606) 쇼토쿠태자는 오카모토궁(岡本宮)에서 ‘법화경’을 강설했다”(‘日本古代の國家と佛敎’, 1979)고 밝혔다.

    고묘황후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조정의 정1위 태정대신에까지 이른 당대 조정의 최고대신이었다. 그러기에 왕실과 조정의 정점 권력 아래서 고묘황후는 일본 최대의 여승 가람 홋케지를 나라땅 왕도에 창건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홋케지의 11면관음상의 모델은 다름아닌 고묘황후였다고 하며, 그런 주장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더구나 일본 최대인 나라땅의 가람 도다이지(東大寺)를 앞장서서 창건한 성인인 백제 사람 행기대승정(行基大僧正·668∼749)을 가장 존경하여 행기대승정 앞에서 머리를 깎고 불문으로 출가한 것이 고묘황후의 남편인 쇼무천황이기도 하다(‘續日本紀’). 그러기에 왕도 나라땅의 도다이지를 국가 불교 현창을 위한 ‘총국분사’라고 호칭한 데 반해 홋케지는 ‘총국분니사’로 불렀다. 홋케지의 창건은 도다이지를 세울 때처럼 왕실에다 ‘조법화사사’(造法華寺司)라는 관청까지 만들어 조직적으로 조영한 총국분니사가 된 대규모의 가람이었다. 
    ◇홋케지 후원에 위치한 가라후로는 ‘백제 목욕탕’이라는 의미로, 욕실 앞 설명판에는 고묘황후가 난치병자들에게 목욕하도록 특별히 만든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홋케지에서 또한 주목할 점은 백제 목욕탕을 뜻하는 ‘가라후로’(韓風呂)라는 명칭이다. 홋케지 후원인 정원 어귀에 들어서면 가라후로인 ‘욕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단층건물이 서 있다. 이 욕실 안에는 고대 백제에서 보내준 일본 최초의 백제 욕조가 있다. 욕실 앞에 세워진 설명판에는 “이 욕실은 예전부터 가라후로(から風呂)라고 불려왔으며 홋케지를 창건한 고묘황후가 난치병자들에게 목욕하도록 베푸신 곳입니다. 건물 곁에는 우물이 있으며 항상 맑은 물이 쉼없이 솟아나서 이 욕실의 전통은 우물과 더불어 함께 오랜 유서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욕실 내부는 두 개의 방으로 되어 있고 양쪽 모두 한증막으로 만들어졌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지금의 일본은 온천욕 등 목욕문화의 선진국이다. 고대 백제 불교계에 한증막 목욕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오늘날 우리나라 백제 터전에서는 살펴볼 수 없으나 이곳에서는 고대 백제 목욕문화의 살아 있는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 불교와 목욕은 곧 불가에서의 ‘목욕재계’의 바탕이며, 이것을 단적으로 밝히자면 백제 불교에 의해 일본에 목욕문화가 전파된 것을 추찰케 한다.

    고대 일본에서의 여승들의 사찰인 ‘니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지금의 오사카시의 ‘백제니사’(百濟尼寺)였던 사이쿠다니 유적(연재 46회 참조)이며,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땅 아스카의 고대 ‘사쿠라이노데라’(櫻井寺) 터전을 들 수 있다. 사쿠라이노데라 사찰은 본래 고대 백제와 고구려 고승들을 가장 많이 아스카 왕실로 모셔왔던 스이코여왕(재위 592∼628)이 황후 시절에 머물던 사저(私邸)였다. 스이코여왕은 이곳에 살면서 모국 백제에 건너가서 3년 만에 학문승으로 수계받고 590년 아스카로 돌아온 일본 최초의 여승 젠신노아마(善信尼) 등 3명의 여승을 맞아 입주시켰다(‘扶桑略記’). 젠신노아마는 아스카의 백제인 불사(佛師) 시바노다치토(司馬達等)의 딸이다. 백제에 가서 학문승이 된 나머지 두 여성도 백제인 후손이며 이름은 젠조니(禪藏尼)와 에젠니(惠善尼)다. 
    ◇홋케지 후원의 아름다운 모습.

    이들에 관해 오늘의 일본 고대사학의 태두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시바노다치토의 전승에는 조선과의 관계가 농후하다. 시바노다치토의 딸인 시마(嶋)가 고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여승인 젠신노아마이며 그녀의 이름은 ‘시마메’(斯末賣)라고도 써 있고(‘元興寺伽藍緣起’) 백제의 석불(石佛)을 제사모셨다. 젠신노아마의 제자가 된 젠조니와 어젠니도 본디 백제계 사람이며, 젠신노아마는 588년 백제로 건너갔다”(‘古代日本の輝き’ 2003)고 설명했다.

    고묘황후의 홋케지는 백제계 여승들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계승한 왕립사찰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백제로부터 고대 일본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승들이 건너갔거니와 그 최초의 여승은 백제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때인 577년 “백제국으로부터 특사인 대별왕(大別王, 왕족)이 경륜(經綸)을 가지고 불교 승려인 율사, 선사, 비구니, 주사, 금사, 불공 등 6명을 거느리고 조정으로 건너왔으며 난바(難波, 오사카인 난파진)에다 ‘대별왕사’(大別王寺)를 세웠다”(‘扶桑略記’ 등)고 한 것이 최초의 백제 여승 고대 일본 도래 기사이다.
    ◇홋케지의 정문인 동문 좌측에는 ‘술과 고기, 향신료 등 오신을 문안에 들일 수 없다’는 글귀가 새겨진 돌 팻말이 세워져 있다.

    현재는 11면관음상이 본당의 본존불로 모셔져 있으나 이 사찰 창건 당시 금당(과거에 소실됨)에는 도다이지처럼 ‘비로자나불상’을 모신 것으로 전한다. 본래 장대했던 홋케지의 금당이었던 본당은 몇 번의 병화(兵禍)를 거듭하며 또한 1596년 큰 지진으로 붕괴됐으며 1601년에 지금의 자리(본래는 강당 터전)로 헌 목재들을 모아 재건했다고 한다. 자갈돌을 깔고 있는 널찍한 뜨락은 여승 사찰다운 청결감 넘치는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 한가운데로 우뚝선 하얀 등롱이 자못 인상적이다. 당초 진언율종이던 것이 뒷날 광명종(光明宗) 사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름난 홋케지의 지금의 정문은 동쪽문으로서 대문 색깔이 붉게 칠해져 있어 ‘적문’(赤門)으로 불리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는 동문 좌측에 눈길을 끄는 돌 팻말에는 “술과 고기, 오신(五辛, 고춧가루 등 향신료)은 문 안에 들이지 못한다”고 새겨져 있다. 입구로부터 여승 선원으로서의 숙연해지는 정숙하고도 엄격한 계율을 실감하게 하는 단정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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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8.01.02 (수) 09:37, 최종수정 2008.01.02 (수)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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