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오사카부 '야추지'와 '후지이데라' 사찰
바보처럼1
2008. 4. 14. 18:55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오사카부 '야추지'와 '후지이데라' 사찰
백제 후손 터전… 日학계 왕인 박사와 혈연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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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부의 두 명찰인 야추지 본당(사진 위)과 후지이데라 본당. 이곳은 각각 백제 16대 진사왕의 아들 진손 왕자의 후손으로 왜 왕실로 건너와 정착한 후네씨(船氏)와 후지이씨(葛井氏)의 가문 사찰이다. 일본 학계 일부에서는 후네씨 가문과 왕인 박사가 혈연관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大阪)부 미나미카와치(南河內)군 후지이데라초(藤井寺町)에는 유명한 절터 2곳이 있다. ‘야추지(野中寺)’와 ‘후지이데라’(葛井寺, 藤井寺 또는 剛琳寺로도 불린다)이다. 미나미카와치군은 백제 제16대 진사왕(辰斯王, 385∼392 재위)의 아들 진손(辰孫) 왕자의 후손들이 건너와 번창하며 살았던 곳이다. 야추지와 후지이데라 두 절터는 ‘노노카미(野野上)’라는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불과 1㎞ 이내에 이웃하고 있다.
후지이데라는 4개의 기둥이라는 뜻의 중요문화재 사각문(四脚門, 1601년 재건)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고대 절터의 웅장한 규모를 알려주는 초석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된 야추지 쪽에 백제의 발자취가 더 짙게 남아 있다.
오사카 시내의 ‘긴테쓰’ 전철역 시발점의 하나인 ‘아베노바시’(あべの橋)역에서 ‘미나미오사카선’ 전철을 타고 가면 12번째 역이 후지이데라역이다. 이 고장은 고대 구다라스(百濟洲, 지금의 오사카부)의 남부 지방 일대를 차지했던 고대 백제 왕족들의 터전 미나미카와치군이며 옛날 지명은 ‘지카쓰아스카(近つ飛鳥)’였다.
왕인(王仁) 박사 연구로 유명한 역사학자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는 지난해 12월 말 현지에서 만난 필자에게 야추지와 후지이데라의 연혁과 고대 일본 문화에 있어 백제인들의 중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후지이데라는 나라 땅의 아스카(飛鳥) 지역과 더불어 고대 백제인의 전통적인 지카쓰아스카 터전으로서 매우 유명한 고장입니다. 지리적인 위치는 다르지만 이 두 고장의 지명은 똑같은 백제인들의 ‘아스카’입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이곳 야추지와 후지이데라가 함께 있는 사찰 지역은 본래 백제 제16대 진사왕의 아들 진손 왕자가 건너와서 살면서 그 후손들이 똑같은 백제 왕가 조상을 모신 ‘가문의 사찰’(氏寺·우지데라)의 옛 유적지입니다. 백제 진손 왕자 후손들의 우지데라인 야추지의 경우 후손들 성씨가 후네(船)이며, 후지이데라 쪽은 후지이(葛井)입니다. 본래 조상은 똑같은 백제 진사왕이지만 뒷날 가문이 여러 형제로 퍼지면서 조정에서 벼슬아치로서의 각기 새로운 성씨를 받게 됩니다(벼슬과 함께 성이 주어짐, 필자주). 따라서 이 새로운 사성이 그 사람의 본 성씨가 돼 후손에게 이어졌습니다. 그 당시 지카쓰아스카에 살던 주민 중 80∼90%는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인 박사 초상
더구나 백제로부터 오사카 난바(難波)로 건너왔던 왕인 박사의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가장 많이 산 곳 중의 하나로서도 이 지카쓰아스카 일대는 유명합니다. 저는 우리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늘 가르치기를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온갖 훌륭한 문화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일본 문화는 적어도 100년 이상 더 뒤졌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눈부셨던 백제 문화를 결코 잊지 못합니다.”
이노우에 교수의 지적대로 야추지 사찰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게시판(1991년 일본 정부의 문화청 및 오사카부교육위원회에서 함께 세움)에 다음처럼 연혁이 적혀 있다. “이 가람의 창립은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626, 조정의 최고대신, 필자주)라고 하며, 또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 스이코여왕의 태자, 필자주)가 건립한 46원(院) 중의 하나이기도 해서 ‘나카노타이시(中の太子)’라고도 불려 왔다. 이곳을 야추도(野中堂)로 호칭해온 것은 쇼조인(正倉院, 나라땅 東大寺·도다이지 사찰 우측 지역의 일본왕실 고대 문화재의 보고, 필자주)의 고문서에서 이 고장은 백제계의 도래 씨족인 후네씨(船氏) 가문인 후네무라지(船連, 무라지는 조정의 높은 벼슬, 필자주)의 본 터전이었기 때문에 이 집안의 우지데라였음을 살피게 된다(하략)”는 게 야추지 연혁에 대한 일본 정부 측의 설명이다.
‘국보 지장보살’을 모신 야추지는 지장당과 본당 모두를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지장당 경내에 이웃한 곳에는 발자취를 알 길 없는 조선시대 문관 석인상이 서 있어 주목받기도 한다. 이 사찰 경내에는 고대 나라 땅 호류지(法隆寺)식 건축양식으로 세웠다는 본당 터전의 주춧돌들과 불탑의 큰 초석이며 백제인의 집모양 석관(家形石棺) 2기가 나란히 보존돼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젠쇼지산(善正寺山) 고분군’ 지대에서 발굴하여 1963년 야추지로 옮겨왔다는 두 기의 훌륭한 백제식 석관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고장 일대에는 고대로부터의 백제인들의 ‘젠쇼지산 고분군’이며 ‘마쓰오카산(松岳山) 고분군’과 ‘데라산(寺山) 고분군’ 등의 백제인 왕족 등 백제계 주민들의 옛날 무덤들이 많이 산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어서 이곳 두 백제 사찰을 중심으로 살아온 수많은 고대 백제인들의 진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고장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마쓰오카산 고분군에서 발굴된 기다란 구리쇠판으로, 네모지게 만든 ‘후네노오고묘지(船氏王後墓誌)’이다. 이 고대 백제인 후네노오고에 대한 생존시 기록인 묘지는 지금까지 발굴된 일본 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쇠판 묘지여서 일본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고고학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것에 관하여 ‘기시와라시사(柏原市史)’는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이 묘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메이지 초기(1870년대 당시)까지는 후루이치(古市)의 ‘사이린지’(西琳寺, 백제 왕인 박사 신주를 제사 모시는 사찰, 필자주)에 소장되어 왔던 것이다. 발굴된 장소는 마쓰오카산 고분군의 언덕이었으며, 묘지 표면의 한문 글씨는 끌로 판 86문자이고 뒷면에는 76문자가 새겨졌다. 그 묘지명의 내용은 매우 소상하게 후네노오고 장관(船氏王後首)과 그 가족 등을 함께 알려주고 있다. 후네노오고 장관은 왕지인 장관(王智仁首)의 손자로서 조정에 근무했다. 천황은 오고 장관이 뛰어난 재능으로 공훈을 세우자 제3위의 대인(大仁) 관위를 베풀었다. 조메이 13년(641)에 서거했다. 그 후 27년이 지나 덴지천황(天智天皇) 7년(668)에 부인(安理故刀自)이 서거하자 부인과 함께 마쓰오카산에 있던 형 도라고 장관(刀羅古首)의 묘지가 있는 곳에 나란히 매장했다. 이 장소는 뒷날까지 신성한 영역이다.”
◇백제계 후네씨 가문의 ‘젠쇼지산 고분’에서 발굴된 횡혈식 백제 석관.
백제인 왕족 후네씨 가문의 신성한 영역이라는 묘지에서 오고 장관의 묘지명이 발굴된 뒤 그것이 이 고장 후루이치의 왕인 사당 사이린지에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후네씨 가문과 왕인 박사가 혈연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점에 대해 일찍이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후네씨인 오진니(王辰爾, 6세기 중엽)의 조상은 백제 국왕인 귀수왕(貴須王)이며 그 후손 진손 왕자가 조정(고대 왜왕실)에 건너와서 문명(文名)을 떨쳤다고 한다. 이 당시 진손 왕자의 활동 설화는 왕인의 설화와 매우 유사하므로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인이든 왕진이이든 그들이 백제로부터 건너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며, 둘 다 왕자(王子)로 불렸으며 그들 후손의 이름을 말해주는 씨족의 본거지 역시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해 있다. 더구나 가환(歌桓, 왕이 임석하는 조정의 詩歌 모임, 필자주)에도 양인의 동족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밀접한 관계에서 볼 때 오래된 가와치노후미씨(西文氏, 왕인 박사의 장관 벼슬 명칭인 서문씨) 가문과 뒷날 백제로부터 새로 건너 온 후네씨계 사이에는 공통적인 가문의 바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귀화인’ 1965)고 했다. 즉 왕인과 후네씨는 동 계열의 백제 왕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왕인 박사가 제자로 삼아 가르쳐 왕위에 등극시킨 닌토쿠왕(5세기, 오사사기 왕자, ‘고금집’ 905년 저술)에 관한 다음 기사이다. “닌토쿠천황은 진손 왕자의 장남 태아랑(太阿郞) 왕자를 근시(近侍)로 삼았다. 태아랑 왕자의 큰손자는 왕미사(王味沙), 둘째 손자는 오진니(王辰爾), 그 다음은 왕마려(王麻呂)이다. 이들 셋으로부터 각기 자손이 퍼져서 처음으로 각자의 직책에 따라 새로운 성이 붙여진 것이 후지이(葛井) 무라지와 후네 무라지, 그리고 쓰(津) 무라지이다.”(‘속일본기’ 797년 성립) ‘무라지’는 일본 왕실의 관직명으로서 지방 고관의 호칭이다. 이는 야추지 일대의 후네씨 가문과 후지이데라 일대의 후지이씨 가문 및 오쓰신사(大津神社)의 쓰씨 가문의 백제왕족 후손의 집단 형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대 왜 왕실 관찬 사서 내용이다.◇후지이데라에 있는 중요문화재 사각문. 1601년 재건된 이 사각문은 4개의 기둥이라는 뜻이다.
특히 태아랑왕자의 둘째 손자인 오진니는 “고구려왕(평원왕)이 왜왕에게 보낸 ‘까마귀 날개’(비밀 국서)에다 쓴 눈에 보이지 않는 글귀를 밥솥의 김을 쐬어 나타나게 해 문서의 내용을 해독해낸 슬기로운 신하여서 크게 출세했다”(‘일본서기’)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기 부기해두고 싶은 것은 일본 역사에서 사실상 최초의 ‘천황’(天皇)이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이 다름 아닌 백제계의 ‘덴지왕’이라고 하는 고증 자료는 앞에서 살펴본 지카쓰아스카의 마쓰오카산(松岳山) 고분에서 발굴된 백제 진손 왕자 후손인 후네씨 가문 ‘후네노오고묘지’이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일본 천황호는 중국의 당 고종(高宗)이 황제들 중에 유일한 천황호를 썼던 데서 일본에서도 공칭으로 채용되었다고 본다”(‘天皇家の秘密’ 1977)고 했고, 후쿠시대학 사학과 아오키 미치오(靑木美智男) 교수 등이 공편한 일본의 중요한 역사 사전의 ‘천황’ 항목을 보면, “천황가의 조상은 야마토(大和) 지방 토착 호족 또는 기타큐슈(北九州)나 조선(朝鮮) 이주민 족장설이 있다”(角川版 ‘일본사사전’)고 백제 왕족설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 기사입력 2008.01.16 (수) 09:33, 최종수정 2008.01.16 (수)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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