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뜨락

완강한, 몸

바보처럼1 2008. 7. 7. 19:04
  • 완강한, 몸

    박 설 희

    십일년 된 묘를 개장하기로 한다
    헐벗은 봉분을 연다

    흙을 물고 쓰러지는, 그물 같은 뿌리들
    검고 축축한 집……
    그 속에서 한 점 한 점
    벗어버리려 애쓰는 아버지

    물로 풀어져 눈알이 흘러간다
    풀로 솟아난 손가락이 허공의 급소를 더듬는다
    벌레로 기어다니는 내장, 꿈틀꿈틀
    곰팡이 슨 채로
    거의 육탈이 안 된 다리 한 짝
    걸어가야 할 많은 길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까

    짓는 데 십수년
    그때 이룬 몸을 아직 허물지 못한 아버지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이처럼
    풀 죽은 모습이다
    어떤 간섭도 싫다는 듯
    저 혼자 생성되고 소멸하는
    완강한, 몸

    아버지가 남긴 몸을 이끌고
    나는 덜그럭거리며 하산한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
    진달래가 발진처럼 돋아나 있다

    ―신작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사)
    ▲1964년 강원 속초 출생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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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8.07.04 (금) 18:23, 최종수정 2008.07.04 (금)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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