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끊을 수 없는 유혹 ‘행위중독’

바보처럼1 2008. 7. 28.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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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유혹 ‘행위중독’
#사례1 중학생인 김태형(가명)군은 매일 하루 10시간씩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 어떤 때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게임에 몰두했다. 보다 못한 부모가 컴퓨터를 부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자 김군은 집에서 1시간 이상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3개월을 채 못버티고 친구와 PC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사례2 제과업체에 다니는 김진영(가명)씨는 매일 퇴근길에 백화점을 들른다. 이미 카드 빚이 2000만원을 넘어섰지만 쇼핑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매일 ‘이번 한번만’이라고 다짐하지만 발길은 어느새 백화점을 향한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집에 쌓아 놓고 있자니 한숨만 나온다.

주식, 도박, 쇼핑, 운동 등 특정 행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행위중독자’다. 그러나 특정 행위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중독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중독은 뇌의 충동조절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 쾌감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환자에게만 해당된다.

보이지 않는 중독

행위중독의 기준은 비교적 단순하다. 단 알코올 등과 관련된 물질중독과 마찬가지로 ▲내성 ▲금단증상 ▲일상생활·업무에 지장을 주는 정도의 피해 등 3가지 기준에 모두 들어 맞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단순히 주식을 즐기는 사람에게 ‘주식중독’(스톡홀릭)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주식중독자는 일반적인 매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수익과 위험이 큰 선물시장에 뛰어든다. 쾌감은 내성이 있어서 점점 더 큰 쾌감을 느끼지 않으면 뇌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쾌감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해 재빨리 사고 파는 ‘단타매매’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주식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모든 자금을 쏟아붓는다. 본격적인 중독증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중독자는 자신의 의지로 행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박을 매주 10번씩 하다가 1번만 하면 증상이 사라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 1번만 도박을 해도 중독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행위중독의 재발 간격은 90일이 기준”이라며 “이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빠져 들면 중독증상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쾌락 사이클은 ‘90일’

행위중독은 뇌 속에 있는 ‘쾌락중추’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즐거운 일을 하면 뇌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증가하고, 곧바로 쾌감을 담당하는 ‘측핵’을 자극하게 된다. 도파민의 양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농도가 떨어지면 뇌가 직접 양을 늘리라고 신호를 보낸다. 충동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신호가 끊기지 않고 계속된다. 충동조절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도박은 이미 정신질환의 일종인 충동조절장애의 범주로 묶여 학계에서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쇼핑, 주식, 인터넷 게임 등의 분야는 아직 뚜렷하게 질병으로 분류돼 있지 않아 연구가 미흡하다. 치료의 기준이 되는 임상정보도 부족해 전문가들이 외국의 자료를 토대로 치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희의료원 정신과 반건호 교수는 “물질과 달리 행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병원을 거의 찾지 않는다.”면서 “질병의 분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건강보험의 적용조차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스스로 치료할 수 없는 병

자신을 행위중독자라고 여긴다면 가장 먼저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자신이 중독 앞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있게 ‘○○을 끊겠다.’고 선언해도 대부분 증상이 재발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성은 행위중독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려는 경향이 많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남성은 직접적인 자극을 추구한다. 쾌감과 스릴을 느끼기 위해 도박과 인터넷 게임 등을 즐긴다. 치료법은 이런 성별 특성뿐만 아니라 성격, 생활환경 등 환자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부터 받는 것이 중요하다.

쾌감을 즐기는 사람은 ‘도파민 차단제’를 처방해 충동을 강제로 조절하는 치료를 한다. 다만 이 치료법은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활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주로 취미생활이나 집단생활을 권한다. 소속감을 가지면 과거의 본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자는 보통 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지만 경험자의 조언은 따른다. 따라서 가족이 재활단체를 추천해 자주 유익한 경험담을 듣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2008-07-19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