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돈의 기술과 돈의 예술

바보처럼1 2010. 3.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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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창의 추억 , 2 보리밭나들이, 3 천사들의 나들이

 

 

 

  

 밀밭 

 

 

 

 

 


 
 
보리밭

 <출처: 이미지 검색 조합 편집>
 
 


  

융통성이 필요할 때
      
한 점의 고기를 먹는 것은 가벼운 일이고,

누이의 죽음을 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一臠之嘗輕, 救妹之死重也.
일연지상경, 구매지사중야 
     
-고상안(高尙顔),《태촌집(泰村集)》<유훈(遺訓)> 
          
조선 중기의 학자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선생이

한 선비 남매의 일을 기록하면서 남긴 말이다.
남매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였다.
누이는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위중하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비가 권했다.


“기력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기를 먹는 것이 좋겠다.”
그러자 누이가 대답했다.
“만약 오라버니께서 드신다면 저도 먹겠습니다.”
그러나 선비는 감히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상주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전통적인 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누이는 죽고 말았다.
훗날 선비는 후회하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바람에 누이를 죽게 했다.”

 

예는 인간이 오랜 세월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적으로 도출해 낸 최적의 행동 규약이자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도덕적인 면과 결부가 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원칙보다도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요구되어 왔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때로는 그 원칙들이 지켜지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일의 경중(輕重)을 살펴서 과감하게 원칙을 탈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맹목적으로 원칙에만 얽매이다보면, 오히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권도(權道)를 쓴다.'는 말도 있다. 원칙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임시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옮긴이: 권경열(한국고전번역원) / 출처: 동문카페 / 재편집 
 

 

※  정도(正道), 상도(常道)와 권도(權道)

 

제(齊)나라 순우(淳于)가 맹자에게 예(禮)에 대해서 물으면서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뻗쳐 건져야 합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구원하지 않으면 곧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이다"라고 단언한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장'의 이야기다.

 

이처럼 현실에 따라 응용하는 것을 권(權), 또는 권도(權道)라고 하는데, 항상 지켜야 하는 경(經), 즉 정도(正道) 또는 상도(常道)에 대한 상대어였다. '맹자 진심(盡心)장'에 노(魯)나라 자막(子莫)은 '오직 중(中)만 고집하고 권도를 모른다(執中無權)'는 말이 있는데, 융통성이 없는 고집불통을 뜻하는 말이다. / 웹 보조 검색 

 

 

 

 

 

 

윌리엄 부궤로(William Bouguereau)의 슬픈 역사
 

한 미술가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미술에 소질을 보이고, 나이를 속여서까지 미술학교에 일찍 입학하여 앵그르에게 배우고, 그 안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연이은 수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뜨리에에서, 밥먹는곳도 아뜨리에, 친구들을 만나는곳도 역시 그 먼지나는 작업실. 하루 16시간, 일주일에 7일을 꼬박 그림만을 그리며 한평생을 보내고, 그리고, 다시 자신이 배운 방식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한, 당시 최고의 미술가라 불리며, 그렇게 평생을 바쳐 80년동안 822점(현재 알려진)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낸.. William Bouguereau(윌리엄 부궤로), 그런 작가가 존재했었고,어둠속에 잊혀졌던 수십년의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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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ity (자비)

 

 

The Virgin and Angels (동정녀와 천사)

 

 

운명의 장난인것인가? 프랑스혁명 직후에 태어나 전통과 현대의 사이에서, 다시금 겪게 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 바로 인상파화가들의 등장이다. 그 시작은 스케치를 하라던 스승의 명을 거역하고 아뜨리에를 뛰쳐나온 마네, 작업실에 짱박혀 과거의 명작들을 반복해서 그리는 틀에박힌 시스템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하던 이들, 그리고, 주류에 편입하지 못했던 작가들의 모임. 캔버스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고, 자연의 모습을 담는다.

양자에 대립과 반목이 시작되고, 불안정한구도, (당시에는 주제의식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연의 모습 등등. 심지어 인상파 그림들은 사회적인 조롱거리가 되어 살롱에서조차 전시를 거부하는 사건이 생기고, 그들은 그들만의 전시를 시작한다.

결국, 당시의 주류였던 아카데미즘과의 대립에서의 승리. 하지만, 그 와중에 인상파사조의 직격탄을 맞게된.. William Bouguereau 와 19세기의 화가들 특히 마지막까지 자신의 교육방식을 고집하던 부궤로의 경우 Academism 화가의 대표자로 인식되어 집중적인 비난의 주인공이된다. (아직까지 프랑스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고, 작품들도 주로 미국쪽에 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르누아르의 경우 안경을 맞추러 간자리에서 조차, 쓰던걸 내던지며.. "이런, 부궤로 같으니라구.." 했던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쌓인게 많았다는 뜻이겠지? 더구나 인상파를 이은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완성도 높은 기교,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구성, 감성적인데다 고전적인 방식, 소재. 모더니즘과 대치되는 모든것을 갖고 있는 대표자로서 인식되어.. 깨끗이 지워진다.



Young Girl Defending Herself Against Cupid 1880
(큐피트의 화살에 저항하는 처녀)
 
 
아름다운가?  큐피드의 화살을 피하려고하는, 그러니까 이제 다가온 사랑을 피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는 소녀. 하지만, 그림의 하단에는 대개 이런 유형의 간단한 매도 문구가 따라붙곤 한다. "들판에 나가 그린게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모델을 그린 것이며, 뒤의 배경은 작가가 살던 인근 프랑스지역의 산이라고.."

한때 대중과 소수의 평론가들에게 사랑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형편없는 그림이라 평가되어, 미술관에서조차 퇴출되어 창고에 쌓여있던 그림들. 이제는 몇점이나 그렸으며, 지금은 어디에 보관되어있는지 출처조차 찾기힘든 그림들. 아직도 그가 몇년에 죽었는지(1905년)조차 잘못 기록되어 돌아다니는 현실.
 

 Nymphs and Satyr (요정과 호색가)
* 님프 《산·강·연못·숲 등에 사는 예쁜 소녀 모습의 정령(精靈)》;요정;
《시어》 아름다운 소녀;소녀 /그리스·로마신화
* 사티로스 《주신(酒神) Bacchus를 섬기는 반인 반수(半人半獸)의 숲의 신,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함;로마신화의 faun에 해당 / 그리스 신화】 》
 
 
Birth of Venus (비너스의 탄생)
 

Fred Ross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1977년에 Clark Museum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러갔다, 그 구석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보았다고 하는데. 무척 당혹스러운 기억이었다고 말을 한다. 알고있는 모든 작가를 생각해보았으나, 도무지 누구일까.. 떠오르지가 않았던, 콜럼비아대학에서 미술교육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자신조차 한번도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는 그림. 의문을 품는다. 생전에 엄청난 경력을 가진 화가가 어떻게 철저하게 묻혀질 수 있는지,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해 말이지. 아는 사람도, 자료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연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동시대를 연구하고, 내버려진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이 일이 "부궤로"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The Nymphaeum (요정들이 사는 곳)

 

  


The Youth of Bacchus (박카스의 혈기, 젊음)
 
  
Jules Joseph Tissot, Alexander Cabanel, Jules Lefebvre, Ernst Louis Meissonnier, Jean George Vibert , Leon Bonnat and Leon L"hermitte from France, John William Waterhouse, Dante Gabriel Rossetti , Sir John Everett Millais, Edward Coley Burne Jones , Sir Lawrence Alma-Tadema, Frederic Lord Leighton, and Frank Dicksee 등등 인상파와 그 뒤를 이은 현대미술, 그리고 대량생산을 선호하는 딜러들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희생된 사람들이다.


First Kiss (첫키스)


 
 
Fred Ross. "부궤로"에 대한 말도 안되는 편견과 인신공격, 악의적 왜곡이 수십년간 지배했음을 말한다. 한시대의 그림에 대해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집단적으로 매도한 것이라고.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쁘장" 한게 아니라, 미술사에서도 정점에 남을만한 명작인 거라고.


Dawn (새벽)
 

The Flagell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예수의 태형)
 
 

Dante and Virgil in Hell 1850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 단테 dante Alighieri (1265-1321) 《이탈리아의 시인;「신곡(神曲)」의 작가》
* 베르길리우스 Publius Vergilius Maro (70-19 B.C.) 《로마 시인;The Aeneid의 저자》
 
 

The first mourning (아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담과 이브)


A Soul Brought to Heaven (천국에 간 영혼)
 

Love is Fleeting 1901 (사랑은 도망)
 
 
예술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원래 그렇게 늘 바뀌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게한다. 렘브란트.. 그의 작품들은 사후 100년 동안 사장되었다고 한다. Night Watch라는 작품의 경우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아 그림의 하단을 벽면에 맞는 크기로 잘라내는 조건으로 내걸렸던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림을 잘라내어 벽에 맞추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Little Shepherdess 1891 (어린 소녀 양치기)
 

미의 기준이 변하는 건 자연스럽게 하지만, 가장 순수해야할 미술이라 것도 알고보면 무척 허약한게 아닌가,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어떠한 거품같은 게 잔뜩 있는 건 아닌가, 그 안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나약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어느정도의 기준이 변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게 아닐까? 그 정도를 넘어서까지 그 가치라는 게 변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인가?



Two Girls (Childhood Idyll) 1900 (두 소녀)


The Abduction of Psyche (프시케의 납치)
 * 프시케《Cupid가 사랑한 미소녀: 영혼의 화신 / 그리스·로마신화》

   
 
 
     
  
  
 
 
 
 
 
 
 
  
 
 
    
 
 
 
 
 
 
 
 
 
 
 
 
 
 
 
 
 
 
  
 <출처: 카페 서핑 '나비님' / 발췌 / 우리말 주석: 호호야>
 
 

 

보리밭 (윤용하 작곡, 박화목 작사)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Media Change ▽

  

경이롭고 아름다운 무반주, 무음향의 목소리 화음
 

 

  △ Media Change ▽

 

사랑아 / 장윤정
 

   

취중에 한 말도 아내를 감동 시킨다


맹구는 전날 회사에서 3차까지 회식을 하고 돌아와
무서운 숙취에 시달리며 잠에서 깼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침실탁자 위의 아스피린과 메모였다.

 

"여보, 아침식사 따뜻하게 준비해 놓았어요.
나 장보러 가요. 당신 사랑해요."

방 안은 완벽하게 정돈돼 있었다.


맹구는 불안해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가보니 과연 따뜻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
12살 된 아들을 보고 물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은 거야?'"


"있잖아요, 아빠!, 술에 취해 새벽 세 시에 집에 왔어요.
가구를 더러 망가뜨리고 거실 융단에 토하기도 하고요."

 

맹구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어째서 죄다 정돈돼 있고 이렇게 깨끗한 거야?"

 

"아! 그거요?
엄마가 침대로 끌어다가 눕히고 바지를 벗기려 하자
아빠가 '이러지 말아요, 난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요!'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천국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네!"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 라네"

 -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죽기전에 꼭 하고싶은 것들")’의  대사 중에서
  (차동엽, ‘뿌리 깊은 희망’에서 재인용)  / 고도원의 아침편지 / 발췌 인용

 

 

Scrapped in places, Edited or Written Partially
by Hohoya, Sincerely,
Private, 6.13, 2009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ohoya Plus>
 
 
돈의 주인과 인생의 주인
'잘 버는 것은 기술이고, 잘 쓰는 것은 예술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엔 무엇보다도 재력, 권력, 명예(인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갖고 있어도 대단하고, 두 가지 세 가지 모두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중 하나인 재력을 얻기 위해 이런 재테크 웹사이트도 드나들겠지요.

 

재력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재력을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를 먼저 정확히 알자는 것이었지요. 내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한가지 방편으로서 돈을 모으는 것이라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문제는 대개가 그렇게 가질 않습니다.

 

용케도 원하던 집을 장만하고, 목표한 10억 쯤 모이면 이젠 이만하면 됐다 하면서 그 돈을  종으로 부려야 할 텐데, 새로운 욕구가 움찔거립니다. 가만히 보니, 10억 가지고는 나 혼자는 어떻게 먹고 살겠지만, 나보다는 더 오래 살 처자식을 보니 10억쯤 더 필요하고, 내 주변에 돈 좀 만지는 사람들을 보니 10억 정도로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주인은 돈이 되어버립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내가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좀 없어 보이는 사람은 불쌍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셋집이나 작은 집에 살고, 소형차를 타는 사람은 은근히 깔보게 됩니다. 돈 좀 있어 뵈는 사람에게는 뭐가 달라도 달라 보입니다. 그가 걸친 옷은 왠지 명품일 것 같고, 언행 하나하나가 품위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들과 직접 상대할 때는 어쩐지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불편해 할만한 말씀을 드리자면, 돈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사람은 누군가가 돈과 지위에 있어 자기보다 낫다 싶으면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모자라다 싶으면 거만해 집니다. 자기 자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사람은 돈과 지위가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도 당당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겸손합니다. 

 

여러분들 좀 찔리지는 않으신가요? 자신은 결코 돈의 노예가 아니라면서 펄펄 뛰는 사람들과 좀더 깊이 얘기해보면 금방 뽀록 납니다. 그런 사람에게 1억원 짜리 명품 손목시계가 생겨도 행여나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손목에 차고 다니지도 못하고 장롱 속 깊숙이 넣어둡니다. 이런 사람은 1,000만원 짜리 고급바지를 입으면, 잘못 구겨질까 우아하게 걷고, 다리가 아파도 아무 곳이나 앉지를 못합니다, 왜냐면 그는 시계와 바지의 주인이 아니라, 시계와 바지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도덕성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의 최우선 가치가 돈과 권력이 되어버린 사람은 법규나 윤리는 자기가 섬기고 있는 돈과 권력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여깁니다. 일단 법과 도덕 따위는 나중에 자기 주인님의 힘으로 얼마든지 덮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돈도 있다! 힘(권력)도 있다! 그런데 도덕성은 없다? 이런 사람은 바로 깡패 아닙니까? 우리가 깡패를 존경합니까? 그들을 지지하고 박수를 보냅니까? 깡패를 본받기 위해 그들의 강연회나 저서를 돈 주고 찾아봅니까? 돈과 권력은 있으되, 도덕성이 없는 사람이 비단 깡패뿐입니까? 온갖 수단으로 돈과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스포츠맨이나 정치인, 연예인, 투자전문가, 사업가들…이들이 도덕성까지 갖춘 경우가 흔합디까?

 

그렇지만 그들이 TV에라도 나오면 하던 일 멈추며 부러운 듯 쳐다보고, 심지어는 자식들까지 그들처럼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들이 설령 어떤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부적절한 사고를 내더라도 머지않아 잊어버리고 다시 그들을 반갑다면서 환대합니다. 심지어는 인기투표나 선거 등에서는 그런 깡패들에게도 기꺼이 한 표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도덕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자기동네 집값(재력) 올려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원조깡패는 멸시하면서 이런 파생깡패들에게는 너무도 너그럽습니다. 자신은 이런 깡패들을 미워하면서도 막상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지지하고, 한편으로는 자식들한테는 바르게 살라고 합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이것을 두고 ‘가치의 전도(顚倒)’ 라고 합니다.

 

돈이나 권력, 인기 등으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콧구멍 만한 가게의 사장이거나, 쥐꼬리 만한 월급 생활자라도, 귀가 없고 눈이 하나 없어도, 다리가 하나 없어도, 남이 입다 버린 구멍 난 옷을 입고 살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이렇게 자기에 대한 긍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인격의 향기가 풍깁니다.

 

혹자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합니다. “당신은 지금 먹고 살만 하니깐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 도덕성이 밥 먹여 주냐? 난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하나 제대로 못하고 산다. 그리고 돈이 좀 있어야 우리 아이들 학교는 보내줄 수 있는 것 아니냐?” 고 반박을 합니다.

 

돈의 주인이 된다고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당연히 먹고 자는 일은 중요하지요. 계속 그렇게 더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려 사셔도 됩니다. 그렇게 산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 지금 굶는 사람 있나요? 입을 옷이 없어서 홀딱 벗고 있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오늘 밤 잠잘 데 없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다만 더 좋은 것을 입고 싶고, 더 맛있는 것만 입고 싶고, 더 좋은 집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배부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는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티벳, 아프리카, 인도 등의 도심바깥쪽 마을에서 하루만 버텨보세요. 아마 꽁지가 빠져라 도망칠 겁니다. 그들은 단 1달러로 일가족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들 대다수가 세습된 문맹에다가 척박한 조건이나마 고정적인 일자리를 가져볼 수도 없고, 그날그날 한끼라도 자식새끼들에게 제대로 먹여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이 대부분 입니다.

 

어디가 다쳐도 흔한 연고 한번 바르질 못해서 썩어 곪아가는 살을 지켜보다가 죽어가야 하는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들은 엄청난 부자들이지만, 그들을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고, 다만 우리들이 동경하는 부자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빈곤층으로 전락시키면서 돈을 쫓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빈곤의 문제로 우리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행복을 깨닫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천금을 갖는다 해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청빈한 삶을 살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가난은 ‘빈곤’ 이지만, 가진 것이 있어도 더욱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이 ‘청빈’ 입니다.

돈이 있어야 당당해지고 자유로운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과는 무관하게 어떠한 조건에 맞닥뜨리더라도 내 마음이 겸손하고 당당해야 참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들은 양심 없는 짓으로 돈과 권력을 얻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인생일 뿐,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지킬 건 지키겠다” 라는 신념만으로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고, 이 세상의 주인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모네타 / 글쓴이: (주)팍스넷 CRM 사업팀 차장 구재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