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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깊은 가을 들길에서 피어나는 들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통칭하여 들국화라고 부르는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감국이 이 무렵 피어난다. 다른 꽃들이 다 사라질 무렵 피어나는 이들은 그러나 봄, 여름꽃처럼 화려하거나 아름다워서 사람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늦가을의 우수를 한층 거드는 빛깔을 지녔다. 서글픔을 머금은 정결한 향기를 지녔다. 맑되 고혹적이지 않다. 쑥부쟁이의 그 연보라빛이 그러하고 분홍을 살짝 머금은 하얀 구절초의 그 서늘한 향기가 그렇다.
이번엔 들국화 가운데 이 가을의 우수를 자극하는 쑥부쟁이를 만난다. 가을 깊은 들녘에 나가 맑은 보랏빛 국화를 만나거든 그게 쑥부쟁이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줄기의 아랫부분은 잎이 밋밋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국화과 특유의 부드러운 톱니가 나 있다. 무릎에서 배꼽 높이까지 자라 가을에 꽃을 피우는데 둘레엔 기다란 꽃잎이 둘러 있고 그 한가운데엔 봉긋하고 노란 꽃차례가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하지 않다. 단정하고 가지런한 꽃차례며 맑은 보랏빛이 어딘지 서글픔을 머금고 있다. 가늘고 긴 꽃가지 끝에 한 송이씩 매달려 있는 모습이 무엇을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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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쑥부쟁이에겐 서러운 전설이 있다. 그 전설 때문에 쑥부쟁이에게서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쑥부쟁이가 지닌 그 빛깔과 모양과 그 느낌 때문에 서글픈 전설이 생겨난 것일까? 어쨌든 어느 쪽이든 이 야생초와 우리 조상들의 삶과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전설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산골에 대장장이가 살았다. 대장장이는 불을 다루는 일을 하기에 ‘불쟁이’라 부르기도 했다. 불쟁이는 우리 발음 특성상 ‘부쟁이’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 부쟁이는 가난한 데다 자식도 많았다. 열이 넘는 자식이 있었는데 아내는 그 많은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그랬는지 몸져눕기 일쑤였다. 그중 맏이가 부지런히 쑥을 캐어 쑥국도 끓이고 쑥개떡도 하고 나물을 캐어 날라 가족들은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 그래서 쑥을 캐어 나르는 부쟁이네 딸이라 하여 그 맏딸이 ‘쑥부쟁이’로 불리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물을 캐러 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사슴을 치료해 주게 된다. 사슴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은혜를 꼭 갚겠노라고 하면서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산을 내려오다가 쑥부쟁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젊은 사냥꾼을 구해주게 된다. 젊고 준수한 사냥꾼은 이 다음에 꼭 돌아와 쑥부쟁이를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단다.
쑥부쟁이의 어머니가 그 뒤로도 아이를 더 낳다가 몹시 앓게 되었는데 쑥부쟁이는 천지신명께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꿈엔 듯 사슴이 나타나더니 노란 구슬 세 개를 주면서, 이 구슬을 입에 물고 빌면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했다. 쑥부쟁이는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어머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번엔 그 사냥꾼이 그리워 구슬을 입에 물고 사냥꾼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내가 나타났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그래도 은혜를 갚기 위해 쑥부쟁이를 또 다른 아내로 맞겠다고 한다. 쑥부쟁이는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나머지 구슬 하나를 입에 물고 사내를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소원을 빈다.
그리고 쑥부쟁이는 상실의 슬픔을 간직한 채 여전히 쑥을 캐고 나물을 캐 날라 가족을 부양한다. 그러던 쑥부쟁이가 비탈길을 굴러 죽고 만다. 쑥부쟁이가 묻힌 언덕에는 해마다 쑥과 비슷한 나물이 무더기로 돋아났는데 사람들은 쑥부쟁이가 그 많은 가족들 먹을거리를 걱정하여 나물로 돋아난 것이라 하여 그 나물을 쑥부쟁이로 불렀다 한다. 사내를 기다리던 그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꽃이 피면 노란 구슬을 입에 문 듯 보랏빛 꽃잎에 둘러싸인 노란 꽃차례가 도드라져 보인다. 무엇을 간절히 기다리는 듯 길고 가녀린 꽃가지도 그렇다. 그 꽃말 또한 ‘기다림’이다.
봄나물 가운데 가장 담백하고 맛이 있는 나물을 꼽으라 하면 주저하지 않고 쑥부쟁이를 꼽겠다. 어린 순을 데쳐서 다진 마늘을 조금 넣고 들기름 쳐서 조물조물 무쳐놓으면 맛이 그만이다. 울릉도에선 이 쑥부쟁이(울릉쑥부쟁이)를 ‘부지깽이나물’이라 하여 주요한 소득원으로 대량 재배하고 있기도 하다. 민간에서는 이 쑥부쟁이 말린 것을 이뇨제나 해열제로 쓴다고 한다.
이 보통의 쑥부쟁이보다 꽃은 작고 그 식물 줄기에 달린 잎은 넓은, 그리고 잎을 뒤집어 만져보면 까실까실한 촉감이 있는 ‘까실쑥부쟁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언제부턴가 이 비슷한 ‘미국쑥부쟁이’가 우리 토종의 식물들을 밀어내고 점차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꽃이야 예쁘고 앙증맞지만 우리 것이 외래의 것들에게 자꾸만 밀려나는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로 식물세계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 어딘지 개운하지가 않다.
쑥부쟁이가 핀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드문드문 혹은 무더기로 모여서 핀다. 어느 쪽이라 해도 쑥부쟁이는 왠지 서글프다.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을 예감케 해주는 꽃이어서 그럴까? 한 무더기 쑥부쟁이 꽃을 꺾어 들고 먼 옛 연인을 기다려 보고도 싶다. 반짝 하고 스치듯 지나간 봄날의 영화를 뒤돌아보고, 다시는 오지 않을 옛 사랑을 떠올리며 가끔은 쑥부쟁이처럼 서글퍼도 쓸쓸해도 좋으리라.
글·사진_ 복효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