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明]: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이르며,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네이버검색>
‘핀업걸 아트(Pin-up Girl Art)'
핀업걸아트(Pin-Up Girl Art)의 배경
핀업은 회화나 삽화 등에 다양한 분야에 1941년 처음으로 영어로 명시되었다. 핀업의 이미지는 신문이나 잡지 엽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졌다. 이중 일부는 달력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이때부터 벽에 걸어 놓는 사진이라는 의미가 붙여지기 시작했다.
핀업걸은 제2차 세계대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이 여성의 화보를 핀으로 벽에 고정(Pin-Up)시켜놓고 수시로 봤다는 이유로 이러한 모델들을 일컫는 말이 됐다. 눈부신 금발, 터질 듯 풍만한 가슴, 도발적인 면모 뒤에 감춰진 백치미와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연약함 당시에는 티비나 위문공연이 없어서 주로 풍만하고 섹시한 핀업걸 브로마이드를 보며 전쟁속의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또 다른 핀업의 형태는 예술작품 즉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에 관한 이상향 혹은 그에 관한 생각을 표현해 낸 결과물 이기도하다.핀업의 전성기는 1930년대~50,60년대 당시 가장 대표적인 작가가 질 엘그렌(Gil Elvgren) 이다. Gil Elvgren 1914년에 출생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40년이 넘도록 계속된 그의 커리어는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를 최고의 핀업 아티스트로 만들어주었다.
그림은 질 엘그렌(Gil Elvgren)의 그림이 링크가 안돼 알베르토 바르가스(Alberto Vargas)의 핀업 걸(Pinup girl)로 대체하였습니다.^^
알베르토 바르가스(Alberto Vargas)의 핀업 걸은 1940년 10월 남성잡지 에스콰이어에 의해 바르가 걸(Varga Girl)이란 이름으로 첫 번째 책이 출판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바르가스의 핀업 걸은 단순한 여성의 초상이 아니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핀업 걸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단순히 보여 지는 여성의 아름다움 이상의 것을 담아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앙드레 김의 고독과 아쉬움
"고독과 아쉬움이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 앙드레 김, 김복남... 나는 앙드레 김으로 부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복 많은 남자 김복남'이 더 정겹다. 김봉남이라고 하나, 나는 그냥 김복남으로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타계했다는 것을 어젯밤 퇴근길 차 안에서 들었다.
세상에 나고 죽는 양이 가장 슬프다고 말한 춘원 이광수의 산거일기가 가끔 생각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 보름쯤 전에 백세를 넘기신 지인의 어머님의 별세도 나는 슬펐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온갖 몸부림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참 슬펐다.
앙드레 김을 직접 스치면서 본 적이 있다. 소공동 조선호텔 레스토랑에서 나는 그분을 뜻밖의 스침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날도 예의 흰옷 차림이었지만 늘 화면 속에서의 만남에 익숙한 탓인지 그 시간이 어색했다. 눈부신 흰옷차림이 아닌, 약간은 세탁소에 보내야 할 상태의 옷이구나 싶던 그 순간, 나는 그분이 차라리 편안해졌다.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약간은 작아보였다. 화려한 앙드레 김이 아니라 고단한 앙드레 김처럼 보여서 연민의 정도 느껴졌다. 독특한 이마 화장이 나를 민망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의 그와의 조우가 행복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작별은 아쉬워하리라.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고 한다. "고독과 아쉬움이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고...... 고독과 아쉬움이 남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후회하지 않고 홀연히 떠날 수 있다면 축복이 아닐까 싶다. 그의 고독과 아쉬움이라는 인간적인 정서가 애처러운 생각이 든다. 피붙이 없이 세상속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할까.... 물론, 그에겐 소중한 가족이 있었으며 또한 그 속에서 가득히 행복했을 것이지만 내 마음 속의 그는 정말 외로웠을 것 같다.
사람 속에 부대끼며 감정의 회오리가 일어날 때 마다 나는 남의 말, 남의 지적, 남의 판단, 남에 의해서 결정 지어지는 그 어떤 것들로 부터도 자유로워지자고 다짐을 한다. 모든 것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며, 타인이 내 삶을 살아주는 것이 아님을 냉정히 안다. 날마다 먼지처럼 일어나는 오해 속에서 우리는 남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을 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살아가지만 되돌아보면 그건 너무 허무한 낭비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정작 내가 떠나는 순간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고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뜨거운 감사함으로 우리가 살아있음에 감격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홀로 떠나야 하는 극적인 그 순간을 생각하며 우리는 날마다 정말 기꺼이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가 후회없이 떠나갈 수 있음은 삶에 대한 기꺼운 행복과 사랑을 원 없이 나누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지은 가장 아름다운 하얀 옷을 날개옷처럼 입고, 그는 훨 훨 떠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본다.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우리들에게 손 흔들며 실과 바늘과 헝겊들은 내려 놓고 떠나가기를...
그분의 명복을 빌고 또 빌어본다. 평생 그분의 작품 가까이도 못 가본 나같은 사람도 왠지 가까운 소중한 이웃과의 작별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쓸쓸하다는 생각도 한다. <이나경 님의블로그 / 축약 / 재편집>
Indian Reservation
They took the whole Cherokee nation Put us on this reservation Took away our ways of life The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 Took away our native tongue
And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 Though I wear a shirt and tie I'm still part redman deep inside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But maybe someday when they learn Cherokee nation will return
우리의 나라를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어 그리고 우리를 이 인디언 보호구역에 쳐박았지 그들은 우리 인디언의 전통을 빼앗아갔어 도끼와 활과 단검을 말이야 우리 말을 없애 버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의 영어를 가르쳤지 우리가 만들었던 공예품들은 지금은 일본제가 되어 버렸어 체로키 민중! 체로키 부족!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랑스러워!
우리의 나라를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어 그리고 우리를 이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두었지 비록 내가 셔츠와 넥타이를 맬 지라도 내 맘 깊숙이 난 홍인=인디언이야 체로키 민중! 체로키 부족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랑스러워!
하지만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게 된다면 체로키 인디언 나라는 다시 돌아올거야
갑상샘암 이야기
제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 종종 병원과 관련된 부탁을 받곤 합니다. 이 부탁이라는게 하는 사람 입장에서나 들어주는 입장에서 명쾌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서운함과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갑상샘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 모 일간지에서 객관적인 기사를 쓴 것은 비록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기사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갑상샘암은 모르는 게 약이다.
저도 수술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 불안에 떠는 환자 가족의 부탁을 받고는 아는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갑상샘암은 가족 중에 갑상샘암으로 돌아가신 경우가 없다면 조기 검진할 필요가 없으며, 설령 일찍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암세포의 증식이나 전이가 다른 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얌전하기 때문에 수술을 당장 안해도 됩니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자료를 보면 확실합니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좀 다릅니다. 암이 생겼는데 당장 수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보입니다. 의사들도 입장이 다릅니다. 외과의사들은 수술을, 내분비 내과 의사들은 관찰하면서 지켜봐도 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환자들은 헷갈립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자궁에 문제가 있어 수술을 고민하는 이의 부탁을 받고 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들 내에서도 암 전공의사는 수술(자궁적출술)을, 내분비 전공 의사들은 최대한 보존적인 치료 방법을 주장합니다. 저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논란이 있을 때에는 한 발짝 쉬어가도 된다고요. 수술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떼낸 장기는 다시는 되살릴 수 없습니다. 성형수술을 주업으로 삼는 제게도 이 법칙은 철칙입니다. 제거하기는 쉽지만 다시 넣어주기는 어렵다는 원칙.
갑상샘을 제거하면 평생 갑상샘 호르몬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비용 또한 만만치 않고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개별 의사들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릴 때 의학협회나 아니면 정부가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수술하는 병원은 돈을 법니다. 굳이 자본주의 운운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 김동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