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가?

바보처럼1 2014. 6. 28. 18:55


고요함은 좋다


고요함을 머금은 사물이나 풍경등
행동등을 바라보면 평온과 안정을 준다

우리도. 나도 마찬가지.
평온하고 온화함을 품은
너그러움으로 비쳐지는 행동을 하면
지금 우리가 그림을 대하며 가져지는
똑같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함은 좋다
인내를 품은 고요함은
더더욱 아름답기 조차하다.






 
Chasing the Wind

 
The Kite

 
Alone at Last


Best Friends

 
ST Mr Smith

 
Rain, rain go away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삶의 로직(Logic)이 흐트러지는 때이지만 그래도... 한번 옮겨 봅니다.


이 세상 만물은 서로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크나큰 장애를 주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서 개체의 운명이나 팔자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운명이나 팔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운명이나 팔자는 극복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슬기에 의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슬기란, 만물에 고루 주어진 신의 은총이다.

바다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물고기는 대개 물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헤엄치며 논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운명이란, 물고기 한 마리가 어느 방향으로 헤엄쳐 가다가 암초에 부딪치는 식으로 그렇게 가는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물고기가 물결을 따라 흐르다 보면 만나게 될 위험들은 어느 정도는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다는 얘기다.

물고기가 어쩌다 바위에 부딪치게 되었다면 물고기는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전에 내가 풀들이 무성히 있는 그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곧장 앞으로 밀고 나가니까 그 장애물을 넘어갈 수가 있었지.' 하는 지나간 경험에서 얻은 일시적 자기 생각만 믿고 바위를 향해 총알같이 돌진해 들어가면 그 물고기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죽어 버리는 비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실 암초에 부닥칠 수 있는 그런 운명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 그 크기가 얼마만한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큰 바위를 뚫고 지나가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바위를 따라서 꾸준히 좌우로 헤엄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위가 물고기에게 주고 있는 장애를 살피면서 꾸준히 인내하며 나가다 보면 어느덧 물고기는 앞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바위의 장애를 더 이상 받지 않고도 바위를 넘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장애물을 바로 보고 넘어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슬기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임을 자부하는 인간이면서도, 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이 슬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미망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고 해왔던 방법을 스스로 고집하기가 쉽다. 때로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관습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타당치도 않은 구태의연한 도덕률에 집착하여 불화를 일으키는 일도 많다. 스스로 고집하는 마음, 이것이 슬기의 눈을 가려 버리는 범인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 슬기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 슬기를 터득하기 위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세계 - 바로 그 세계를 내세우는 것을 항상 경계하는 일이다.

물고기가 전에 한번 경험했던 그 경험을 믿는 그 마음을 계속해서 고집하게 되면 결국 물고기는 그 운명 속에서 운명에 잡혀 먹히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뭔가를 알았을 때 그 ‘안다’라는 자신을 고집하는 순간이 바로 무지의 수제자가 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아무 쓸모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현실을 현실로 바라볼 수 있는 눈, 그것이 바로 슬기인데, 이 말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반드시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은 오히려 융통성이 없고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슬기에 의해 쓰이는 것이 지식이고, 그 지식을 통해서 슬기는 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때문에 지식 또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슬기를 터득한 사람에게는 어떤 정해진 운명의 장애가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장애물 경주를 하는 선수처럼 장애물 하나하나가 오히려 재미다. 그러나 슬기를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운명이라는 것에 매여 살게 된다. 그는 설사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 운명의 흐름 앞에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의 운수를 잘 봐주는 점쟁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앞에 놓인 장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작 그 장애를 넘어가는 메커니즘은 모른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의 삶 또한 구제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점 잘 보는 사람치고 남보다 잘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에게나 시련과 장애가 닥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겐 그 장애를 넘어갈 수 있는 슬기 또한 갖추어져 있다. 슬기롭게 장애물을 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고, 나아가서 운명을 넘나들며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불사조가 될 것이다. 슬기로운 삶,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서핑/재편집>


Holland 국제 사진 전시 작품

 



Malaika / Harry Belafonte & Miriam Make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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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무상...
전지전능한 신은 존재하시는 것인가...
운명은 주어지는 것인가 이겨내는 것인가...
그 답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 답을 알고 싶다.
지금 이 즈음에...

-호호야 단상(斷想)- 

  To afford a cup of coffee!
Scrapped in places, Edited or Written Partially
by 0000, Sincerely, Private, 4.26, 2014 

   


날마다 행복하세요!
날마다 건강하세요!
날마다 성취하세요!

호호야 유성수 드림 *^^

-호호야 단상(斷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