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거문고 악성 옥보고 맥 이르려는 김무길 명인

바보처럼1 2007. 4. 23. 14:45

[국악인] 거문고 악성 옥보고 맥 이으려는 김무길 명인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민속악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어야 잘 할 수 있다. 세습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야 피에 음악이 흐르고 몸에 음악이 녹아 있어 조금만 배우면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전설적인 명인 명창들 대부분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다. 송흥록 명창이나 박종기 명인이 모두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간혹 음악가 집안 출신 아닌 사람이 음악가가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비가비’ 또는 ‘비개비’라 하여 좀 낮추어 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비가비’란 비갑(非甲)에서 온 말인데 ‘갑이 아니다’ 즉 ‘동류가 아니다’는 뜻이고 그 반대말인 동류를 가리킬 때에는 ‘관동’이라 한다. ‘관동’이란 양반들이 쓰는 ‘동관(同官)’이란 말을 뒤집어 그렇게 쓰는 것이다.

김무길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고 부인인 박양덕 역시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부부가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남편은 거문고의 명인이고 부인은 판소리 명창인데 자녀들도 모두 국악을 전공하여 식구가 모두 음악을 하며 살고 있다.

김무길은 지금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지도위원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고 박양덕은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판소리의 예능보유자로 남원시립국악단 지도위원을 하고 있다. 부부가 지리산 자락의 폐교를 인수하여 ‘운상원 소리터’를 만들었는데 ‘운상원(雲上院)’은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공부했다는 그 운상원이다. 우리네 공부하는 방법이 산에 들어가 혼자 연습하며 공력을 쌓는 것인데 그런 독공(獨工)을 통해 깨닫고 또 깨닫고 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기 때문에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있는 옥보고의 기록을 보면 남원은 거문고의 성지(聖地)이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공부한 지 50년에 새로 30곡을 지었고 그것을 속명득(續命得)에 전했는데 속명득은 그것을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했다. 귀금 선생은 다시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에게 전했는데 이때 신라왕은 혹시 금도(琴道)가 끊어질까봐 그 음악을 잘 전승하도록 하라고 남원공사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극장(克上)과 극종(克宗) 이후에 신라에서는 거문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니까 고구려에서 발달한 거문고 음악이 남원 땅인 지리산 운상원에서 재창조되어 신라의 음악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김무길과 박양덕이 가꾸고 있는 ‘운상원 소리터’는 역사적 사건과 맥이 닿는 대단한 곳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 한국 최고의 거문고 명인이 서울을 마다하고 이곳을 택하여 소리 터로 가꾸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 옛날 옥보고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김무길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무길은 1962년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의 국악예술학교는 고등학생 또래가 다니는 학교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국악을 모두 배우는 예술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배운 국악 실력으로 국악단체나 연주자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었다. 김무길도 국악예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거문고 산조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한갑득 명인에게 배웠다. 당시의 수업방식은 완전히 옛날식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방법이어서 악보도 없이 매일매일 배운 것을 구음으로 외우고 충분히 익힌 다음 그 다음을 배우는 식으로 배웠다. 김무길은 정말 열심히 배우고 매일 구음을 외웠다. 지금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구음을 척척 해가면서 지도하는 것은 다 그때 그렇게 무한히 외고 열심히 거문고로 탔기 때문이다. 한창 열심히 배우던 시절 한갑득 선생에게 “저는 선생님과 똑같이 탄다고 타는데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선생님과 같이 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선생께서는 “이 놈아 수만 독(數 萬讀; 수만 번) 하면 돼”라고 했다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한다. 김무길은 한갑득을 철저히 사사했다. 거문고도 배우고 음악에 대한 태도나 생각도 배우고 술도 배웠다. 특히 거문고산조를 타면서 그 음악이 그려내고 있는 자연의 경치나 타는 사람의 심성에 따라서 음악이 변하는 것에 대한 한갑득의 설명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거문고 소리가 온 우주의 것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한갑득과 쌍벽을 이루던 신쾌동 선생까지 사사했다. 최고의 거문고 명인 두 분 밑에서 철저히 배우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김무길은 한국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이자 최고의 사범이 될 수 있었다. 김무길은 지리산 운상원 소리 터에 있지만 전국에서 많은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배운다. 국공립단체에서 활동하는 전문 연주가들 다수가 그의 문하에서 거문고 산조를 배우고 있다. 한갑득류나 신쾌동류의 긴 산조는 김무길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어 그런 큰 제자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김무길과 박양덕이 서울에 있으면 훨씬 많이 활동하고 돈도 잘 벌 텐데… 왜 그런 산골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내외의 생각은 다르다. 꿈이 있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를 좇는 꿈이 아니다. 정말 순수한 인간 순수한 음악가로서의 꿈이다. 무엇보다 어려서 가졌던 꿈을 실현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건물과 시설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몰려오는 제자들과 두 부부가 살기에는 너무 클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시설에 공연장 하나를 더 지어 정말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본인들의 음악도 더욱 공력을 쌓고 싶고 다음 세대를 위한 더 좋은 작품도 만들어 볼 작정이다. 옥보고가 운상원에서 득음하고 새 음악을 많이 만들었던 것처럼 김무길도 운상원 소리 터에서 거문고 음악의 새 장을 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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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일자 : 200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