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백제주’(百濟洲·구다라스)였던 지금의 오사카에서 한 시간 남짓 ‘긴테쓰선’ 전철을 타고 달리면 나라(奈良) 땅 아스카(飛鳥)에 다다른다. 나라 지방은 고대 한인들이 이룩한 또 하나의 눈부신 문화 터전이다. “나라라는 말은 한국어의 국가에서 따온 말이다”라고 일본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松岡靜雄) 교수가 69년 전 ‘일본고어대사전’(1937년)에서 밝혔다. 앞서 1900년 역사지리학자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도 “나라는 조선어다. 이 지역을 점거하고 살던 이즈모족(신라인)이 지은 국가라는 뜻이다”(대일본지명사서)라고 못박았다.
이제 아스카의 아스카공원 역내에 있는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벽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터전은 다카마쓰즈카 고분뿐 아니라 고대 백제의 옛 터전이어서 백제인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생년미상∼626년) 대신의 거대한 바윗돌 무덤 ‘석무대’와 ‘아스카노데라’(飛鳥寺·법흥사) 터 등 둘러볼 곳이 매우 많다. 다카마쓰즈카는 지름이 약 18m, 높이는 약 5m다. 생김새는 우리나라 왕릉과 똑같은 둥근 원분이다. 현재 이 다카마쓰즈카에는 들어갈 수 없고, 똑같이 모사한 고분벽화를 고분 옆 ‘다카마쓰즈카 벽화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벽화를 바라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고구려 귀족 여인들의 화려한 7색 의상들이 옛날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넘실댄다.
다카마쓰즈카 벽화를 그린 화가는 고구려인 황문본실(黃文本實)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규명됐다. 그러나 일부 일본인 학자는 고구려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카마쓰즈카의 안내 전단은 ‘아스카 시대 일본 국보’라고만 자랑할 뿐, 고구려 화가에 대한 얘기는 내비치지 않는다.
아스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가 발견돼 세계를 경탄시킨 것은 1972년 3월21일의 일이다. 호류지(法隆寺)의 담징 금당벽화에 버금간다는 이 고분벽화는 140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아스카 지방 서쪽의 자그마한 민둥산 밑에 고즈넉이 잠들고 있다가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돼 문화재 당국에 신고됐다. 조심스럽게 고분을 파고 안으로 들어간 간사이대 고고학자 스에나가 마사오(末永雅雄) 교수 등은 입을 딱 벌리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묘 속의 사방 벽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주제인 사신도(四神圖)와 함께 아름답기 그지없는 채색 인물화들이 생생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칠색 비단옷을 입은 고구려 귀족 여인들의 자태는 흡사 금방 사뿐사뿐 걸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
◇무성한 대나무 숲 밑에 다카마쓰즈카가 있다(왼쪽), 평남 용강군 지운면 진지동(발굴 당시 지명)에서 발견된 기원전 5∼6세기경 고구려 고분 ‘쌍영총’의 고구려 귀족 여인들. 주름치마 등 복식과 두발 모습이 다카마쓰즈카 벽화와 흡사하다. |
일본 각지의 무덤을 파면 무덤 속에서 고대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문화재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듯이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고분을 팔 때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얘기다. 무덤을 파다 말고 심지어 파던 구덩이를 다시 덮어버린 ‘후지노키(藤ノ木) 고분’ 등 한때 발굴을 중단한 곳들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오랜 설왕설래 끝에 마침내 1988년 10월 중순 ‘후지노키 고분’의 관 뚜껑을 열자 백제 무령왕릉의 쇠신발이며 백제 것과 꼭 닮은 각종 부장품들이 줄줄이 나왔다. 물론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발굴 이전에 이미 도굴됐다는 것도 밝혀졌다. 어떤 귀중 유물들이 도난당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1972년 3월27일자 아사히신문 1면 머리에 대대적인 다카마쓰즈카 발굴보도가 나왔다. 고구려 귀족 여성들의 그림을 찍은 사진과 함께 실린 다음과 같은 큰 제목의 기사는 독자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호류지급의 벽화 발견―아스카 장식 고분”
“남녀상이며 백호, 청룡 칠색으로 그린 대륙계 풍속”
신문은 일본 저명 사학자 12명을 초청해 이틀간에 걸쳐 ‘다카마쓰즈카 벽화고분 심포지엄’을 열고 ‘다카마쓰즈카 벽화, 작자는 고구려계 화가, 참석자 의견 일치’라는 타이틀을 단 다음과 같은 톱기사(1972년 4월2일)를 냈다.
“일본사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와 기시 토시오(岸俊男) 교수 등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본서기’에는 7세기 초 스이코여왕 시대에 일본 최초의 궁정화가로서 황문화사(黃文畵師)와 산배화사(山背畵師)를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고구려인이라는 고대 사료가 있다.”

|
◇평화로운 지금의 아스카 땅 농촌 풍경(왼쪽), 다카마쓰즈카 발굴 당시의 아사히신문 기사(1972년 3월27일자) |
신문은 상세한 고증 기사를 덧붙였다. 교토부립대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도 다카마쓰즈카 고분은 고구려인 화가가 그렸다고 자신의 저서인 ‘일본사’(1980)에서 지적했다. 그는 “다카마쓰즈카 고분은 검토가 진행된 결과 7세기말경에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벽화는 고구려인의 것”이라고 했다. 장식고분 연구가인 구사카 야미쓰(日下八光) 교수는 “회칠한 벽에다 벽화를 그린 것은 한반도와 통구(중국 지안)의 고구려 고분벽화와 매우 닮아 있다. 다카마쓰즈카 벽화는 조선으로부터의 영향이 직접 나타난 형태의 표현”이라고 했고, 교토대 사학과의 고바야시 유키오(小林行雄) 교수는 “한반도에서는 벽화를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으나, 일본에서 이만한 규모의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일본 고고학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 같다”고 밝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극치를 보인 이 벽화는 발견 당시부터 곰팡이로 변질된 곳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으나 근년에 와서 더욱 부식이 심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부식 방지책으로 벽화를 뜯어내는 조심스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작업 중 근자에 다카마쓰즈카 벽화의 고구려 미인들 의상의 청색 채색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2004년 5월1일 일본 교토신문은 1면 머리로 “다카마쓰즈카 벽화의 고구려 미인들의 치마 등 의상의 청색 부분 채색 재료로는 아프가니스탄산 보석 가루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며, 출토품과 벽화의 남녀군상 의상 디자인은 중국과 조선의 영향을 살필 수 있다”고 일본문화재연구소의 와타나베 아키요시(渡邊明義) 전 이사장의 견해를 보도했다.

|
◇다카마쓰즈카 표지판(왼쪽), 다카마쓰즈카 벽화전시관. |
무덤 속 석벽 벽면은 석회를 풀가사리며 찰흙 등으로 반죽해서 곱게 잘 발랐다. 고대의 훌륭한 흰색 도료(칠) 제조법이다. 약 1400년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고분 내부의 북쪽 벽을 보면 사신 중 하나인 현무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거북이 모양을 본떴으면서도 뱀의 긴 머리와 꼬리가 배 밑 동쪽으로 드높이 올라가 머리와 꼬리를 얽고 있는 생김새다. 동쪽 벽 중앙에는 청룡과 봉래산, 구름과 태양이 그려져 있다. 또한 서쪽 벽에는 백호와 봉래산과 구름, 그리고 달이 서로 마주 향하고 있다. 또한 청룡과 백호 양옆으로는 각기 4명의 여인상과 남자상이 그려져 있다. 태양은 금칠한 그림이고, 달은 은칠을 했다.
고분의 천정에는 금박으로 된 별을 붉은 선으로 연결한 북두칠성 등 수많은 성좌까지 그려 놓았다. 그 천정의 성숙도(星宿圖)는 별의 운행을 황도(黃道)에 따라서 28숙(宿)으로 나누고 있다. 곧 28숙은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동은 청룡, 서는 백호, 남은 주작, 북은 현무로 삼는 것이다. 별의 운행이란 곧 하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28숙의 성좌는 자연을 지배하고 만물의 근본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같은 다카마쓰즈카 고분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꼭 닮은 양식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 중 하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대표적인 주제인 사신도를 무덤의 동서남북 사방 벽면에 그려 넣은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만주 땅 통구분지를 중심으로 해서 압록강 북쪽 기슭과 남쪽 기슭, 그리고 북한 대동강 유역 등으로 나누어 각지에서 살필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영혼을 위안하고 호위 장송하는 미인 그림과 인물화는 역시 고구려 고분벽화가 대표적이다. 이를테면 쌍영총(평남 용강군), 각저총(통구)을 비롯해서 무용총(통구), 안악(평남 안악군) 3호 고분 등에서 널리 살펴볼 수 있다. 더구나 다카마쓰즈카 미인도의 여인들은 쌍영총, 무용총, 각저총의 미인들과 생김새며 의상 등이 모두 꼭 닮은 게 주목된다.
또한 흥미로운 사실은 다카마쓰즈카 관의 쇠장식이다. 이 쇠장식은 중앙에 여덟 잎의 보상화문이 있고, 둘레에는 당초(唐草)문양이 둘려 있다. 그런데 신라 경주 안압지의 ‘임해전’ 터전에서 출토된 기와 문양과 다카마쓰즈카 목관에 붙었던 쇠장식의 문양은 서로 꼭 닮았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고대 한국과의 연관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 계략으로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며 고구려 고분 등 우리 문화유산들을 유네스코에 중국 것인 양 등재하는 처사는 결코 묵과돼서는 안 된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