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오사카의 사당 '사스카베신사'

바보처럼1 2007. 5. 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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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0>오사카의 사당 '아스카베신사'
倭왕실 초석 다진 백제인 오진왕 숨결이…
 ◇아스카베신사 인근에 자리한 왕실 사당 ‘곤다하치만궁’(譽田八幡宮·일본 정부 관할).
이 사당 창설 당시 본래 명칭은 ‘아스카베신사’가 아닌 백제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다. 그 ‘곤지왕신사’가 ‘일본 왕실 사당’이라는 것은 일본 고대 왕실법도인 ‘연희식’(延喜式, 927년 일본 왕실 제정)에 상세하게 전해 온다. ‘곤지왕신사’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둘째아들 곤지 왕자의 사당이다. 일제 치하로 들어서자 그들은 전래의 일본 왕실 사당인 ‘곤지왕신사’ 명칭을 허둥지둥 없애고 ‘아스카베신사’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아스카베’라는 것은 백제로부터 왜 왕실로 건너가 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백제 곤지 왕자의 왕실 가문 성씨(王姓)였다. ‘연희식’의 일본 왕실 사당에 관한 기록 ‘신기지료(神祇志料)’에 “곤지왕신사의 제신(祭神)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인 백제숙이의 조상인 곤지 왕자이다”라 적힌 게 720년 전이다.

어째서 ‘곤지왕신사’의 이름을 지워버린 것인가.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거한 일제 위정자들은 오사카 한복판에 고대로부터 일본 왕실이 섬겨오는 ‘백제 곤지 왕자의 사당’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으리라고 본다. 백제인 왕족 곤지 왕자가 5세기 왜나라의 강력한 지배자 ‘오진왕(應神王)’으로 군림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사실도 꺼림칙했을 것이다. 일제는 그런 내막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을 공산이 크다.

‘오진왕’은 왜 왕실을 5세기 후반에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백제인 대왕이었다. 그 오진대왕은 일본 최대의 왕릉 ‘다이센(大仙)고분’(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주인공인 닌토쿠왕(仁德王·연재 29회 참조)의 생부다. 일제 수뇌부는 그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아보자고 ‘곤지왕신사’의 명칭을 강제로 없앴다. 오진왕이 백제인이란 것은 일본의 저명 사학자들 사이의 공론이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오진왕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일본 정복자로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日本國家の起源’1967)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1918∼2000) 교수도 닌토쿠왕 부자가 ‘백제인’인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진왕과 닌토쿠왕조(仁德王朝)는 외래 민족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정복 왕조다. 또한 대륙적 성격을 띤 새로운 왕조라는 점에서 대륙 사정에도 정통하고 그 정세에 민감했으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 왕가와 동일한 민족 계통에 속하며 예부터 밀접한 관계를 지켜왔다고 본다”(‘日本古代の國家形成’ 1978)고 단정했다.

저명한 고대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81)도 “오진왕은 백제의 곤지(昆支) 왕자였다”(‘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고 단정했다.

“5세기 경에 백제인들이 대거 도래하기 시작했다. 곤지 왕자가 왜국 왕이었던 5세기 말에 백제국의 왕은 곤지의 아들 동성왕(東城王 479∼501 재위)이었다. 그래서 왜와 백제 두 나라 관계는 매우 긴밀해 양국이 협동해 백제인들을 왜국으로 이주시키는 대규모 식민 정책을 시작할 수 있었다. 6세기 이후에도 백제왕가와 대왕가(천황가)는 친척 관계여서 식민 정책을 계속할 수 있었다. 663년 왜국은 패전한 백제를 구출하기 위해 왜의 국가 멸망의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라 연합군’과 싸웠다. (중략) 왜 왕실은 왜국에 와 있던 백제 왕자 풍(豊)을 백제왕으로 삼고 수많은 구원군(7000명, ‘일본서기’)과 함께 풍 왕자를 백제로 보냈다. 663년 왜나라 수군(1만명)은 백제 땅에 건너가 당나라 수군과 백촌강에서 싸워 대패했으며, 풍은 고구려로 피신하고 백제 구원은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시와타리의 종합적인 연구도 현재 사학계에서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왜나라의 덴치왕(661∼671 재위)이 멸망 국면의 백제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본 내 백제인과 왜인들에게 백제 땅으로 쳐들어가도록 명했다. 그 당시 모국 백제 구원차 파견된 백제인과 왜인의 숫자를 모두 2만5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본 사학자들의 통설이기도 하다.

‘아스카베신사’의 유지·보수는 현재 일본 정부 대신 하비키노시 주민(吉村喜代治, 上田寬治, 松浦敏雄 문중의 역대 대표자)들이 자발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백제인 후손이란 말을 꺼내는 대신 묵묵히 성금을 거둬 ‘헌금인 명부’를 사당 벽면에 게시하고 있어, 이곳을 참배할 때마다 필자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일본 정부(궁내청)가 관할하는 ‘오진왕’(허구의 270∼310 재위설·‘일본서기’,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이에 대해 “간지 4바퀴인 240년을 상향 조작했다”고 주장한다)의 왕실 사당인 ‘곤다하치만궁’(譽田八幡宮)도 아스카베신사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인 긴메이왕(欽明王 6세기 후반)이 오진왕릉 앞에다 사당을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사당 건물은 근세에 몇 차례 재건·보수돼 오고 있다. 필자는 2005년 나온 ‘일본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제24집에서 “긴메이왕은 백제로부터 왜나라로 건너가 왜국 왕을 겸임했던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대목은 훗날 본 칼럼에서 상세하게 밝힐 예정이다.

이 사당 후면에는 일본에서 두번째로 웅대한 길이 415m의 오진왕릉이 있다. 그의 아들 닌토쿠왕릉(486m)에 버금가는 크기다. 두 백제인 부자 왕이 구다라노(百濟野) 들판에 남긴 막강한 통치력의 발자취가 바로 5세기 오진왕릉과 6세기 닌토쿠왕릉이다. 구다라노의 이름도 일제 강점기에 오늘날의 ‘히라노(平野)’로 변경되고 말았다.

일본 제2의 오진왕릉 축조 하나만 보더라도 그 당시 고대 백제인들의 위세를 추찰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토교육대 사학과 와다 아쓰무(和田萃) 교수는 “이 왕릉 축조에 필요한 흙을 도랑에서 파내 하루 한 명의 인부가 1㎥의 흙을 250m 거리까지 운반하려면 연인원 30만명이 소요된다. 또 다른 먼 장소(운반 거리는 2배)로부터 42만㎥를 더 운반해야만 한다. 따라서 연인원 84만명이며, 합하면 연 114만명이 된다. 하루 1000명의 인부를 동원했다면 3년2개월 가까운 시일이 소요되는 대토목공사에 틀림없었다. (중략) 닌토쿠왕릉 축조에 필요한 모든 흙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인력은 연 140만6000명이며, 하루 1000명 동원했다면 4년 가까운 축조 기간이 소요됐으리라고 추측한”(‘대계일본역사’(2)고분시대, 1992)고 지적했다.

현재 이 지역은 ‘하비키노시’라는 행정 지명이 됐으나 본래는 ‘구다라고우리’(百濟郡)이었다. 일제 초기였던 메이지 24년(1891)에 ‘히가시나리군 후루이치촌’(東成郡古市村)으로 행정 지명이 바뀌었으며(井上正雄 ‘大阪府全志’ 1922), 다시금 1990년대부터 오늘처럼 오사카부 하비키노시가 됐다. 그야말로 고대 백제인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정다운 옛 터전이 아닌가 한다. 포도밭 산간지대로 변모한 곤지왕신사(아스카베신사) 언덕 일대에선 고대 백제인 고분 수천기의 대다수가 포도밭으로 잠식됐으나 아직도 고지대 쪽으로는 분묘 수백기가 흩어져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백제의 횡혈식 고분인 ‘간논산고분(觀音山古墳)’이다. 그 예전 ‘백제군 후루이치’ 촌락의 백제 들판에는 이미 도시가 형성되고 ‘하비키노시’ 시청사가 버젓하다. 이 시청에서 현재 발행하고 있는 홍보 책자에 보면 다음과 같이 백제시대를 추억하는 따사로운 글귀가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보드라운 실루엣의 후타카미산 기슭으로 전원 풍경이 펼쳐져 마음 푸근해지는 이 고장을 고대에 백제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은 ‘도래인’이 안주(安住)한 땅, ‘안숙’(安宿, アンスク)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 생긴 지명이 ‘아스카’(飛鳥, あすか)로, 도래인들의 문화적 고향이 자리잡게 됐다.”(‘近つ飛鳥の道舞臺, 竹內’ 羽曳野市 발행, 2007)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hensyu@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