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8)백제인 행기 큰 스님

바보처럼1 2007. 5. 1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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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8>백제인 행기 큰스님
불우한 衆生 보살피며 불교문화 꽃피운 성인
 ◇오사카부 사카이시 에바라지초의 에바라지 전경. 행기 스님 출생 장소다.
일본 불교를 논할 때 백제인 행기(行基 668∼749) 대승정을 빼놓을 수 없다. “쇼무 왕(成務 724∼749 재위)은 행기 스님에게 ‘도다이지’ 건립을 위해 비로자나대불을 만드는데 협조해 주기를 간청했다”(도다이지요록·1106 도다이지 관정 스님 편찬)고 할 만큼 행기 스님의 영향력은 8세기 일본 불교계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막강했다. 행기 스님은 78세 때인 745년 쇼무 왕에 의해 일본 최초의 대승정으로 추대됐다. 쇼무 왕은 또한 749년 행기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적에 들었다. 그 해 행기 스님은 82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행기 스님의 출생 장소인 에바라지(家原寺). 사카이시(堺市)의 명소로,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 에바라지초(家原寺町)에 있다. 에바라지초는 오사카시의 전철 JR 시텐노지역(四天王寺驛)에서 강와선(阪和線)을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12번째인 쓰쿠노(津久野)역에서 내리면 찾아가기 쉽다. 에바라지는 본래 행기 스님의 외가였다. 행기 스님은 뒷날 자신의 생가였던 외가에 찾아와 에바라지를 세웠다. 37세 때의 일이다. 절 경내에는 행기 스님 등신대(等身大) 동상이 우뚝 세워져 눈길을 끈다.

일본 불교가 538년부터 백제 왕실을 모태로 발생했고, 백제뿐 아니라 신라와 고구려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 국내에는 졸저 ‘행기 큰스님’(자유문학사, 1996)을 내기까지 한국인이면서도 일본 대승정이 된 행기 스님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선 중세 이전부터 많은 이들이 행기 스님에 관한 연구서와 논문을 내 관련 문헌만 1000여편에 달할 정도다.

우리가 행기 스님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동안 일인 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행기 스님이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불교사학자가 뒷날 연구서에서 슬며시 혈통을 백제인에서 중국인으로 돌려버렸다. 불교사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薰 1835∼1915) 교수는 도쿄대 국사학과 출신으로 오사카대와 나라대에서 교수를 지낸 문학박사다. 이노우에 교수가 행기 스님 연구서를 처음 쓴 것은 1959년. 그는 이 저서에서 “행기는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이라고 그 출신을 밝혔다.

“행기는 덴치왕(天智)이 오우미(近江)의 오쓰궁(大津宮)에서 즉위한 해(668년)에 가와치 오토리군·지금의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지재지(高志才智)이고 어머니는 봉전(蜂田)씨였는데 고지씨는 왕인(王仁)의 자손이라고 한다.”(井上薰 ‘行基’ 吉川弘文館 1959)

행기 스님의 묘지(오사카 가쿠린지·鶴林寺 경내)에서 발굴된 묘지명(도기, 749년 2월23일 승려 진성이 씀)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도 “백제 왕인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노우에 교수는 1980년 다시 쓴 글에서 왕인 박사를 중국 사람으로 돌려버렸다.

“행기의 아버지는 고지재지이고 어머니는 봉전씨이며 고지·봉전씨는 한계(漢系) 도래인이다.”(井上薰 ‘古代史の群象’ 創元社 1980)

이노우에 교수가 무엇 때문에 중국인으로 바꿔버렸을까. 행기 스님 무덤에서 파낸 ‘사리병’의 ‘대승정사리병기’ 기록에 행기 스님의 생부는 “왕인 박사의 직계 후손”으로 나와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 고대의 대표적 불교 사서이며 역사의 명저로 평가되는 고승전(高僧傳)인 ‘원형석서’(元亨釋書 14세기)에도 백제 왕손임이 밝혀져 있다. (釋行基 世姓高志氏 泉州大鳥郡人 百濟國王之胤 天智七年生.)

일본의 가장 오래된 불교 전적으로 꼽히는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822년경 편찬)는 상세하게 일화까지 전한다. ‘일본영이기’는 야쿠시지(藥師寺)의 경계(景戒) 스님이 787년 집필한 고전이다.

일본 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된 백제인 행기 스님의 생애는 파란만장했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일본 각지에 49곳의 수도장과 사찰을 몸소 세웠다. 특히 빛나는 업적 중 하나는 나라(奈良)시에 있는 도다이지(연재 35회 참조) 건조와 세계 제1의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 주조에 앞장선 일이다. 일본 고대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행기 스님은 지금의 에바라지 터에서 668년 태어나 15세 때인 682년 출가한다. 나라 땅 야쿠시지에 찾아가 신라에서 건너온 혜기 법사(惠基法師)의 문하에 들어갔다. 3년간 혜기 법사 밑에서 ‘유가유식론(瑜伽唯識論)’을 공부한 뒤에 685년, 18세 때에 나라 땅 아스카데라(飛鳥寺) 남쪽 선원으로 옮아가 이번에는 백제 스님 도소 화상(道昭和尙) 문하에서 선을 배우면서 금식과 심신 수련을 했다. 22세에는 나라의 가스가산(春日山) 암자의 백제 스님 의연 법사(義淵法師) 문하로 옮겨 수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4세 때 청년 행기는 가쓰라기산(葛木山) 고쿠지(高宮寺)로 가서 신라에서 건너온 덕광 법사(德光法師) 문하에서 비로소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됐다.

일본에는 538년 백제 성왕(523∼554 재위)에 의해 불교가 처음 전파된 이래로 백제와 신라로부터 건너온 고승들의 포교가 활발했다. 그러기에 행기 스님은 소년 시절부터 신라와 백제에서 건너온 고승들의 문하를 두루 돌면서 불법을 수도했다.

행기 스님은 당시 거리를 누비면서 적선을 하게 된다. 행려병자들을 보듬어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베풀면서 불법으로 선도했다. 당시 일본 왕실은 백제인 계열 왕족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악정 때문에 왜나라 선주민 백성은 고통스러운 삶에 허덕였다. 백제인 왕가는 백성을 부역에 강제동원해 왕궁을 짓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징발돼 도읍지 나라 땅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부역 도중 다치면 공사판에서 쫓겨나 도읍지를 방황하면서 구걸했고, 노자가 없어 거리를 헤매다 지쳐 쓰러져 참혹하게 굶어 죽기 일쑤였다.

행기 스님은 그런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700년 나라 땅 호키산(法器山) 기슭에 부랑인 수용소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행기 스님은 행려병자들을 구휼하느라 계속해서 무료 숙박시설인 ‘포시옥(布施屋)’을 새로이 지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 행기 스님은 자신의 생가인 에바라지며 신호지(神鳳寺), 온코지(恩光寺) 등 사찰도 직접 지어 나갔다. 헐벗고 굶주린 대중은 행기 스님의 설법회로 몰려왔다.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도랑을 파서 냇물을 끌어준다. 물 웅덩이를 파주었으며 큰 냇가에 다리를 놓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고통도 덜어 주었다. 그러기에 “행기의 추종자는 때로 1000명을 넘었다”(속일본기)고 전한다.

◇‘행기보살행장기’. 행기 스님의 탄생에서 입적까지 82년의 생애를 3폭의 비단에 그린 것으로 유명한 문화재(에바라지 소장)이다.

701년, 당시 백제인이며 왕실의 조신인 대납언(大納言) 후지와라노후히토(藤原不比等 659∼720)는 추종자가 계속 크게 늘어나자 행기 스님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이 직접 승정으로 임명한 지연(智淵)법사에게 거리에서 설법하는 “행기 스님을 단속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신라인 출신의 지연승정이 거절하자 지연법사를 승정 자리에서 몰아냈다. 행기 스님의 스승 고후쿠지(興福寺) 의연법사가 뒤이어 승정직에 취임했고 의연 승정 역시 행기 스님의 노상 설법회를 단속하지 않았다. “행기 스님의 설법회는 불우한 중생을 구휼하고 불법으로 이끄는 일이기에 단속은커녕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라”고 애제자를 감싸주었다.

조정의 실권자인 대납언 후지와라노후히토 등은 오우미태수(近江太守)인 아들 후지와라노나카마로(藤原武智麻呂 680∼737)와 함께 ‘승니령’(僧尼令, 717년 4월23일)을 내려 행기 스님을 탄압했다. 백제계 겐쇼왕(元正 715∼724 재위) 시절이었다. 승니령은 행기 스님을 ‘소승 행기(小僧行基)’라고까지 비하하며 행기와 제자들의 탁발 등 모든 옥외 활동을 제재했다.(속일본기 권7) 그뿐 아니라 행기 스님과 제자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다.

“행기는 옥에 갇힌 사미승을 구출했으며, 자기 자신도 감옥에 있는 몸이면서도 거리로 나가서 설법하면서 다녔다. 옥리(獄吏)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왕이 행기를 사면하게 됐다.”(‘원형석서’ 14세기)

이같이 행기 스님이 이적(異蹟)을 보이면서 성인으로 더욱 추앙받게 됐다. 왕위를 이은 쇼무왕은 행기 스님의 덕행과 불법에 감화받아 행기 스님을 공경하기에 이른다. 행기 스님이 빈궁한 농민들을 위해 벌인 관개사업을 본으로 삼은 것이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다. 농민이 스스로 개간한 땅은 개인의 소유로, 아들과 손자대까지 물려줄 수 있게 한 은전이었다.

◇에바라지 경내의 ‘행기당’(사당). 이 안에 ‘행기 목상’이 모셔져 있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