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9>아스카니이마스신사의 신라 대국주신 | ||
"매우 잘생기고 염복도 타고나 처 6명·자식 181명” 설화 전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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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백제왕실 터전인 아스카(飛鳥) 땅에 신라신 대국주신(연재 23회 참조)의 사당인 ‘아스카니이마스신사’(飛鳥坐神社)가 자리 잡고 있어 이채롭다. 그 사당에서 불과 100m 떨어진 지점에 596년 백제인 소아마자(출생년 미상∼626) 대신이 앞장서서 세웠던 ‘아스카노데라’(飛鳥寺·본래 명칭 法興寺) 터전이 있다. 그곳에는 7세기 초 백제 불공 사마지리가 제작한 ‘아스카대불’을 모신 안거원(安居院)이 서 있다. 안거원은 “6세기 말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절터”(일본서기)를 상징하는 자그마한 절이다. 신라 사당이 그 인근에 있는 것이다.
이 사당의 신주인 대국주신은 이른바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선도하는 신라계 제신(祭神)으로 이름이 높다. 그 때문에 자식을 점지해 주기를 바라는 일본 각지의 여성들이 참배하러 온다. 사당 경내에는 남근석 석상이 많다. 인조 석조물이 아니라 모두 자연석이다. 대표적인 것은 ‘큰 남근석 신령’(奧の大石御皇産靈神)이다. 경내 서쪽 깊숙이 후미진 곳의 독자적인 사당(奧の社)에 모셔져 있다. 이 남근석은 사당 가까이에 있는 “아스카강에서 묘한 큰 돌이 나타나자 아스카 마을사람들이 그 돌을 모셔다 아스카니이마스신사에 바쳤다”(掘內民一 ‘大和の神話’ 1964)고 한다. 이곳뿐 아니라 아스카 여러 곳에 신라신 대국주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석물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사당의 큰 남근석 신령이다.
도쿄대 오바야시 다료(大林太良) 교수는 “대국주신은 ‘고사기’에서 ‘수려한 장부’, ‘매우 잘생긴 신’ 등으로 불리고 있다. 대국주신은 대단한 미남신이며 여러 신 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염복가(艶福家)이다”(‘日本神話の構造’1987)라고 지적했다. 대국주신은 염복을 타고난 신이라는 게 일본사학계의 통설이다. 따라서 이곳 아스카니이마스신사뿐 아니라 이 지역 아스카 일대에 모셔 있는 남근석들은 모두 대국주신의 상징인 셈이다. 대국주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신 등 여러 ‘오미나’(おみな·여성)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가는 곳마다 오미나가 둘러싼다. 정식 처만 모두 6명에 이른다. 첫 번째 오미나는 ‘야가미히메’다. 그다음 아내는 ‘스세리히메’이며 이 외에 ‘누마카와히메’, ‘다키리히메’, ‘가미야타테히메’, ‘도리미미’ 등이 있다. 대국주신은 자식도 많아 아들딸이 다 합쳐 181명이다. 그래서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성들은 아스카니이마스신사의 남근석 앞에 찾아와 두 손 모아 합장해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기원한다. 남근석에는 부정타는 것을 막고 역귀가 범치 못하도록 새끼줄로 만든 ‘금줄’을 쳐놓고 있다. 금줄에는 흰 무명 헝겊들을 꿰어 놓았다. 가쿠슈인대학 국문학과 오노 스즈무(大野 晉) 교수는 “고대 일본어에서는 여성을 ‘오미나’(おみな)로 불렀고, 뒷날에 이 말은 ‘온나’(おんな·女)로 변했다”(‘日本語の世界’ 1980)고 한다. 일본 고대사의 역사 기사에 보면 줄곧 여자를 ‘오미나’(おみな)로 써 오고 있다. 그러면 이 ‘오미나’의 어원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한국어라고 본다. 지금도 강원도며 북한(함경도 등지)에서는 여성 명사로서 ‘에미나(계집애)’와 ‘에미네(여편네)’ 등을 쓰고 있다. 경상도 방언으로는 어머니의 비칭인 ‘어미’를 ‘에미’로 쓰고도 있다. 일본의 고대 한자어 사전 ‘신찬자경’(‘新撰字經’, 9C경)에서도 여자를 ‘오미나’로 불렀던 것이 고증된다. 필자는 일본어 ‘온나’(おんな·女)가 고대 우리말인 ‘에미나’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에미나’가 일본에 건너가서 처음에는 ‘오미나’라는 귀공녀의 대명사 구실을 하다가, 후에 가면 일반 여성 명사인 ‘온나’(여자)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신 대국주신의 결혼 설화에는 기묘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대국주신이 붉은 화살로 변신해 어여쁜 처녀의 몸 속으로 날아들었다는 기이한 신화다. 대국주신이 자신의 신산(神山)인 나라땅 미와산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미와산 인근에는 ‘세야다타라히메’라는 이름을 가진 어여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대국주신은 어떻게 하면 그 오미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을 것인가 궁리했다. 그는 오미나가 측간(화장실)으로 들어가는 것을 몰래 기다렸다. 그 당시는 측간을 냇물 위에다 세웠다고 한다. 즉, 자연적인 수세식 화장실이다. 드디어 대국주신이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아가씨가 집에서 나와 냇가의 측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국주신은 재빨리 자신의 몸을 화살로 변신했다. 그 화살은 붉은 황토 흙을 바른 ‘단도시’(丹塗矢·니누리야)였다. 화살이 된 대국주신은 강물 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아가씨가 측간에 앉으려 속옷을 벗으며 아랫도리를 내놓는 순간 붉은 화살은 오미나의 음부에 날쌔게 꽂혔다. 붉은 화살에 기습당한 아가씨는 나자빠졌다가 버둥대면서 간신히 화살을 뽑아들고 몹시 부끄러워 서둘러 남모르게 제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화살을 방바닥에 내려놓자 그 화살은 대뜸 멋진 청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로 다시 변신한 대국주신은 순간 아가씨를 덥석 껴안았다. 세야다타라히메는 그날로 대국주신의 아내가 되었다. 그 둘 사이에 태어난 것은 여자아이였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스케요리히메’다. 이 신화와 유사한 전설이 교토의 ‘시모카모신사’의 제신 ‘다마요리히메노미코토’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대국주신이 여성을 기습했듯이 이른바 ‘요바이’(よばい)로 아내를 얻는 관습이 있었다. ‘요바이’란 밤에 처녀의 침실로 몰래 기어드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세계의 결혼도 신혼(神婚) 형식을 답습했다. 밖이 어두워지면 여자 집에 찾아드는 남자는 제 이름을 고하면서 안에 있는 처녀의 뜻을 물었는데 그것이 요바이의 형식이다.”(掘內民一) 따지고 보자면 대국주신은 요바이의 선두주자라 할까. 그가 나라 땅의 자신의 신산 미와산에 살던 당시 어여쁜 아가씨 ‘이쿠타마요리히메’의 집에도 밤마다 ‘뱀’으로 변신해 방문 틈을 비집고 드나들었다. (연재 23회 참조)
대국주신이 또다른 ‘작은 뱀’으로 변신한 신화도 있다. 오미나 여신인 ‘모모소히메노미코토’(백습희명·百襲姬命)는 대국주신의 아내가 된다. 그러나 대국주신은 낮에는 나타나지 않고 항상 밤에만 찾아왔다. 어느날 밤에 모모소히메노미코토는 남편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한낮에는 뵐 수가 없군요. 그래서 당신의 거룩한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하네요. 소원이오니 오늘 밤에는 돌아가지 마시고 여기서 묵어 주세요. 그러면 날이 밝는 내일 아침에는 늠름하신 당신 모습을 뵈올 수 있다고 여깁니다.” (밤에 등불을 켜지 않고 살던 신들의 신화시대이니, 밤은 언제나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필자주) 그러자 대국주신이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내일 아침에는 그대의 빗통(빗 따위를 담는 일종의 화장품용 나무그릇) 속에 들어가 있을 테니, 제발 내 모습에 놀라지 말아요.”
그 말에 모모소히메노미코토는 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빗통을 열어 보니 자그마한 뱀이 들어 있는 게 아니가. 뱀의 크기는 옷에 매다는 끈만 했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대국주신(작은 뱀)은 자기 스스로를 몹시 부끄럽게 여기면서 즉시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러더니 잔뜩 화를 내며 “너는 참지 못하고 내게 창피를 주었어.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창피를 주겠다”고 하더니 하늘로 휙 날아 미와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모모소히메노미코토는 후회하면서 젓가락으로 제 음부를 쿡 찔러 죽어 버렸다. 죽은 모모소히메노미코토는 오치(大市·현재의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북부)에 묻혔다. 사람들은 그 묘지를 가리켜 ‘젓가락 무덤’(箸御墓·하시노미하카)이라고 불렀다. “그 무덤을 낮에는 사람들이 만들었고 밤에는 신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젓가락 무덤’은 지금도 나라 땅 사쿠라이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지는 둘레에 도랑을 파서 섬처럼 되어 있는데, 전장 280m의 큰 분묘이며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흔히들 ‘하시하카’(箸墓·はしはか)라고 줄여서 부른다. 묘지 앞 쪽에는 현재 도랑물이 없어 누구나 쉽게 걸어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 가려면 긴테쓰전철의 사쿠라이역에 내려 택시편을 이용해야 한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
2007.05.22 (화) 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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