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44)산통으로 점치는 '오미쿠지'신라인 고승 간산대사가 시작

바보처럼1 2007. 7. 10. 20:59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4>산통으로 점치는 '오미쿠지'
신라인 고승 간산대사가 시작 널리 전파
 ◇오미쿠지 대의 수많은 오미쿠지 종이 쪽지들이 마치 흰꽃처럼 줄줄이 매달린다.
일본은 점을 쳐보는 생활이 두드러진 대표적인 나라다. 일본 도쿄 번화가 백화점 1층 매장 어귀에 점집 코너가 여러 칸 잇대어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점치는 생활이 가장 돋보이는 장소는 일본의 신사나 사찰이다. 어느 신사, 사찰에 가든 경내에서 인생의 행복을 기원하며 산통(算筒)을 흔들어 길흉사의 점쳐보는 ‘오미쿠지(御神籤)’를 볼 수 있다. 일종의 ‘부적’을 판매한다. 이러한 부적들은 경내 야트막한 나뭇가지에 흡사 흰 눈처럼 줄지어 매달려 있다.

일본 신사에서는 산통을 흔들어 1에서 8까지 숫자가 새겨진 ‘산가지’ 중에서 한 개를 뽑는 식으로 인생과 운명을 점치고 있다. 신사에 따라서는 산가지가 10개, 20개가 마련된 곳도 있다. 이처럼 산가지를 산통에서 뽑아내서 받는 부적 종이쪽지인 오미쿠지 점치기를 일본 고대에 가장 먼저 시작한 이가 신라 출신 고승 간산대사(元三大師 912∼985)였다.

일본 신사 등에서는 약 40㎝ 길이의 여덟 모 난 놋쇠 산통을 놓아두고 누구나 제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고 흔들어 놋젓가락처럼 생긴 기다란 산가지 하나를 뽑아 보게 된다. 100∼200엔의 주화를 내밀면 신사 사무실 내 흰 윗옷에 붉은 치마를 입은 무녀가 산가지를 뽑아낸 사람의 숫자에 맞는 오미쿠지를 꺼내준다. 그 오미쿠지를 펼쳐보면 남녀 애정 문제며 여러 가지 운세의 길흉 사항이 줄줄이 인쇄돼 있다. 신사에 따라서는 청춘 남녀의 ‘사랑점’을 위주로 하는 코너가 따로 있기도 하다.

오미쿠지에 적힌 콘텐츠는 우리나라 ‘토정비결’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오미쿠지를 읽은 사람들은 신사 경내 야트막한 나뭇가지나 준비된 오미쿠지 대의 끈에 좁다랗게 접어서 묶어놓고 돌아간다. 앞으로 좋은 괘는 이루어지고 나쁘다는 가르침은 신사의 신령이나 사찰의 부처가 잘 돌봐준다는 게 그들의 소망이자 믿음이다.

‘일본의 신령을 아는 사전’(日本の神樣を知る事典 2002년) 감수자인 고쿠가쿠인대학 아베 마사미치(阿部正路) 교수는 “오미쿠지는 기도하여 신의 뜻을 물어 선악길흉을 알게 되는 점치기이다. 산통을 흔드는 것은 본래 여러 개의 대나무 산가지를 통속에 넣고 흔들어 바닥의 작은 구멍에서 한 개를 빼내서 결정하는 제비뽑기”라고 했다.

◇ 간산대사당(元三大師堂)

신사에서는 말그림을 담은 어른 손바닥 크기의 ‘에마(繪馬)’라는 네모 또는 마름모꼴의 나무판도 팔고 있다. 에마 그림판에는 붓으로 자신의 소망을 적어 신사 경내의 신당이나 일정한 수집대에 내걸게 된다. 그러면 신령이 취업이며 상급학교 입학, 행복한 결혼, 상업 번창과 부귀영화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또한 신사나 사찰에서는 액막이 부적, 화살 등도 판매하고 있어 이를 사 집 안에 걸거나 붙이면 마귀를 내쫓고 가정의 행복이 온다는 믿음이 있다.

각 신사가 받드는 제신(祭神)의 가호로 액운을 없애준다는 화살 명칭도 제각각이다. 마귀를 파괴해 없애준다는 뜻의 ‘하마야’가 있는가 하면, 천신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덴진야’도 있다. 특히 액운이 든 해에는 이 활을 사와 신관이나 스님에게 가호의 기도를 요청해도 된다. 수험생들은 ‘입학 성취’의 기도를 받기도 한다. 그 액막이 화살을 사서 자동차에 걸어놓고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이도 더러 있다.

산통을 흔들어 점치는 발자취를 보면 점괘의 여섯 가지 획수를 가려 점치는 육효점(六爻占)의 하나인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헌적 근거는 7세기 초인 603년 10월의 기록이 보인다. 그 당시 백제인 스이코(推古 592∼628 재위) 여왕의 아스카 왕실 조정으로 “백제승 관륵(觀勒)이 달력과 천문 지리와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의 책들을 가져왔다”(‘후소럇키·扶桑略記’ 등)는 고대 기사가 있다. ‘방술’이란 곧 점복(占卜)과 연관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뿐 아니라 왜 왕실의 8세기 법령인 ‘양로령’(養老令·718년 성립)의 제14편인 ‘고과령(考課令)’을 보면 “방술은 점후의복(占候醫卜)”이라고 밝혀져 있다. 오늘날에도 “사주에 질병이 낫는다, 못 고친다”고 하듯 고대 한국에서 몸의 병환도 점을 쳐서 다스렸으며, 그 방술이 백제 관륵 스님에 의해 일본에 처음 전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15년 뒤 일본 왕실의 ‘양로령’이라는 법령에도 명문화돼 있다.

◇ 간산 대사의 몸이 뼈만 남은 뿔대사(角大師) 유래 비석

일본 교토 동북쪽 히에이산(848m)의 명찰이 엔랴쿠지(延曆寺)이다. 이 사찰 경내 북쪽 ‘요가와중당’ 지역(연재 25회 참조)에는 신라명신(新羅名神)의 ‘적산궁’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사당에서 다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큰 사당이 유명한 주정당(走井堂)이다. 이 주정당 사당은 신라인 출신 고승이었던 ‘간산 대사(元三大師)’를 모시고 있어 간산대사당이라고도 부른다. 일본 불교에서 간산 대사의 국가 고승으로서의 승관 직명은 지에대사 료겐대승정(慈惠大師良源大僧正)이며 료겐(良源)은 그의 본명이다.

교토국립박물관의 가게야마 하루키(景山春樹) 박사는 간산 대사인 료겐 대승정의 발자취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료겐은 서기 912년 오우미(近江·지금의 오쓰시 일대) 땅의 히가시아사이(東淺井)에서 명문 모노노베씨(物部氏)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2살에 히에이산 서탑보당원(西塔寶幢院)에 입산함으로써 고승직에 오를 수 있는 ‘일산대중’(一山大衆)에 들어섰다. 일산대중의 길은 우선 중앙 또는 지방의 이름난 명문 출신의 자제에게만 한정됐다. 료겐은 55세인 서기 966년에 히에이산 엔랴쿠지 대가람의 제18대 천태종 좌주(天台宗座主·최고위 승려)가 되었으며, 서기 985년 음력 1월3일 입적하기까지 19년 동안 교학(敎學)의 번성과 대가람의 부흥 업적 등 실로 눈부신 발자취를 보였다. 그러기에 후세의 전기에서 그를 가리켜 ‘권자’(權者·신 또는 부처가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라고 찬양했다”(‘히에이산 그 종교와 역사’ 1970).

명문 모노노베씨 가문은 신라인(‘신찬성씨록’ 815년 성립)이며, 고대 일본 왕실에서 백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신토(神道)를 일으켜 받들어 온 가문이다. 료겐은 지금의 히에이산 ‘요가와중당’ 가람 터전을 일으킨 신라인 지카쿠 대사 엔닌(慈覺大師 圓仁 794∼864)에 이어 이 터전을 크게 발전시키면서 ‘요가와 대강당’을 세웠다.

가게야마 박사는 “료겐은 강당의 완성과 동시에 각지로부터 우수한 학생들을 불러 모아 해마다 춘하추동, 몸소 이곳에서 대승(大乘) 경전을 강설하고 법화 강문(法華八講의 論議)의 법식에 따라 시문(試問)을 과하여 진학의 과정을 정해주었으며 이것을 ‘4계강’이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간산대사당(주정당) 경내 안내판에는 ‘액막이대사(厄除け大師), 오미쿠지대사(おみくじ大師) 주정당(求法寺)’이라는 긴 표제의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이 해설판에는 “간산대사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또 이곳에는 ‘간산 대사와 뿔대사(角大師)의 유래’라는 두 뿔이 솟은 뼈대만 있는 사람 모양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흥미롭다. 비석에 새겨진 유래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984년, 전국에 못된 병마가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으며 신음하게 되었다. 이에 간산 대사께서 병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조용히 큰 거울 앞에서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에 몸뚱이가 저절로 거울 속으로 들어간 대사의 모습은 점점 변신하더니 몸은 뼈만 남은 도깨비(야차·夜叉)로 바뀌었다.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중의 ‘명길아자리’가 재빨리 그 모습을 직접 붓으로 그렸다. 그러자 대사는 제자에게 서둘러 뼈만 남은 도깨비 모습의 야차 그림을 나무판에다 새겨 판본을 만들게 하였고, 대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그 판본 야차 그림을 찍어서 나누어 줬다. 이 판본으로 찍어낸 찰(부적)을 집집이 갖다 붙이자 집 안에 숨었던 병마는 겁을 먹고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후 1000여년 동안 사람들은 간산 대사의 부적을 ‘뿔대사”라고 추앙하며 호부(護符)로 삼게 되고 병마의 퇴치와 온갖 액을 면하게 되는 영험한 ‘오미쿠지’로서 전국에서 받들어 오게 되었다.”

◇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댁 거실 벽면의 200년이 넘었다는 에마의 말그림 (위에)
◇ 간산대사당(元三大師堂) 편액

이는 오늘날 일본 각지의 신사, 사찰에서 자신이 직접 산통을 흔들어 사게 되는 오미쿠지의 효시는 신라인 간산 대사임을 말해준다.

일본 통과의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액이 든 해 매기는 ‘야쿠도시(厄年)’이다. 일본인은 액이 든 해에는 마치 신앙과 같이 누구나 반드시 신사나 사찰에 찾아가 액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물론 이때 신사나 사찰에 일정한 금액 이상을 헌금한다. 액년을 규정하는 바탕이 되는 것은 음양오행설이다. 신사는 어디에 가거나 ‘액년표(厄年表)’가 경내 입구에 큼직한 간판으로 세워져 있다. 교토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의 정문 어귀에 세워 있는 대형 액년표를 보면 남녀의 액년이 또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남자는 24세, 25세, 26세, 27세, 41세, 42세, 43세, 44세이다. 여자는 18세, 19세, 20세, 21세, 32세, 33세, 34세, 35세이다. 이 나이는 만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세는 나이’이다. 일본 전국 각지의 신사, 신궁에는 이와 같은 액년표가 거의 다 세워져 있으니, 사람들은 액땜을 하러 찾아가 정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액년은 해마다 사람 나이가 바뀐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고승으로서의 신라인 간산 대사의 드높은 학덕은 그의 저서 ‘극락정토구품왕생의(極樂淨土九品往生義)’를 통해 널리 알려져 왔다. 이 저술은 간산 대사가 쓴 일본 최초의 ‘관음경(觀音經)’ 주석서로서도 높이 평가돼 오고 있다. 또한 간산 대사의 전기인 ‘지에대승정전(慈惠大僧正傳)’은 고문서들을 편찬한 총서(叢書)로 에도 시대(1603∼1867)에 간행된 총서 ‘군서유종(群書類從)’에 들어 있어 학계에 잘 알려져 있다. 간산 대사의 간산(元三)이라는 칭호는 스님이 음력 1월3일인 정월(元旦) 초삼일에 입적한 데서 왕실이 내린 사성(賜姓)이기도 하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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