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오지

(25)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바보처럼1 2007. 8. 1. 13:22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5)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섬의 모습이 마치 비껴서 길게 누워 있다 해서 ‘빗갱이’라고도 한다. 제주도 북쪽 끝머리에 위치한 횡간도(橫干島).

▲ 제주도 최북단섬 횡간도.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선고운 돌담집 사잇길은 마치 영화‘천국의 아이들’에서 애들이 뛰노는 골목을 연상시킨다.

육지와 제주의 중간 거점이며 동서로 길게 뻗어 추자도로 불어대는 엄동설한의 북풍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단다.

목포에서 하루 한번 오가는 쾌속선을 탔다. 뱃길 곳곳에 들쑥날쑥 무인도가 나타난다. 하지만 자욱한 물안개 탓에 무려 38개나 된다는 무인도의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추자도 선착장을 거쳐 행정선으로 횡간도에 도착하자 배에서 사귄 전옥분(78) 할머니가 마을까지 동행을 하겠단다.

“본래 무인도였던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는 한 200년 됐지라.”

할머니는 섬의 유래를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달성서씨 가문 200년전 개척

조선시대 철종 때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들어와 정착한 것이 시초란다.

마을까지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바위뿐이어서 행정선에 실려온 생필품을 운반하기 위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마을 집들은 대부분 키보다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람이 심한 섬에서 바람막이로 만든 것인데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애들이 뛰어 다녔던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담장에 붙어서 소담한 생명의 미소를 함께 나누는 담쟁이넝쿨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을 지나서자 마을에 하나뿐인 공동 우물가에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주민이라야 고작 15명뿐인 마을에서 식수로 쓰는 우물이다. 하늘의 허락을 얻어야 비로소 생명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던가. 주민들에겐 고맙다 못해 함부로 훼손하기 힘든 영물임에 틀림없다. 척박한 섬에서 물은 생명줄과도 같다. 생명줄을 타고 올라오는 두레박은 아낙들의 수다를 함께 퍼담는 듯 연방 곤두박질을 한다. 내친 김에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대문도 문패도 없는 집들을 지나 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여기서 나고 자랐다는 김금순(77) 할머니.

“예전에 학교 자리였구먼유.”

‘추자국민학교 횡간분교’라는 녹슨 입간판이 폐건물에 걸려 있다.

“우리 아그들도 모두 여서 배웠당깨.”

한때는 30명이 넘는 학생들로 북쩍거리고 교사도 3명이나 있었단다.

이웃 추자도는 ‘닭´, 횡간도는 ‘지네´

서너평은 됨 직한 교실엔 아직도 몇 개의 책걸상이 남아 있다. 양호실로 쓰였을 작은 방엔 반창고와 약병, 체온계가 아직 그대로 놓여 있다.

정상에서 거침없이 내려다 보이는 아득한 바다.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를 재다 보니 수평선 멀리 제주의 관문인 추자항이 아물거린다. 풍수지리학상 횡간도는 ‘지네’이고 추자도는 ‘닭’으로 비유된단다. 그런 연유로 두 마을 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면 여자가 청상과부가 된다는 속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섬은 행정구역이 전라도와 제주도로 몇 번씩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사투리와 풍습은 전라도와 흡사하다.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고령의 노인만 살아서인지 눈에 띄는 밭은 모두 버려져 있다. 황돔, 흑돔, 농어 등 어종이 풍부하여 연간 100여명의 낚시객이 횡간마을을 찾아온다.

배라곤 보트 2척밖에 없어서 주민들은 먼 바다까지는 나갈 엄두를 못낸다. 근해에서 잡고기와 해조류 등을 채취하는 것이 유일한 수입원이다.

50년 장기집권(?) 이강설 이장

적막한 섬에 어둠이 밀려온다. 석양 속에서 아직도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섬에서 맞이하는 초저녁 밤은 퍽이나 낭만적이다.

하루 몇 시간 발전기를 돌려 시간제로 불을 밝히는 탓에 적막하지만 멀리 고깃배들의 불빛과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감상하는 것은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체험이다.

모깃불을 피우며 야참을 내오는 이강설(72)씨는 이장일을 50년 동안 했단다.

“제주 사는 아들놈이 모시고 살탱게 섬에서 나오라고 하지유.”

자식들의 권유에도 아랑곳 않고 부인과 둘만이 섬집을 지키는 이유가 있다.

“부모님 산소도 돌봐야 허고….”

200년 동안 섬사람들은 평화와 생명의 고귀함을 품고 느끼며 살아 왔다.

횡간도 사람들이 지켜온 느린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빠름에 지치고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다. 사람 냄새가 그리운 절해고도(絶海孤島)이지만 인간의 여유만큼은 풍족하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 얼굴에 배어 있는 넉넉한 웃음.

갓 잡은 소라와 함께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

고향의 향기가 스며나온다.

글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기사일자 : 2007-08-01    28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