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47) 日 긴메이왕은 백제서 건너간 성황

바보처럼1 2007. 8. 5. 08:41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7>日 긴메이왕은 백제서 건너간 성왕
불교 앞세워 아스카서 백제계 왕실 기틀 다져
 ◇긴메이왕릉을 두른 도랑
일본 나라현 아스카 지방의 분지를 이루는 나지막한 미미나시산(표고 140m) 산줄기 구릉 지대에 아스카 왜왕실 제29대 긴메이왕(539∼571)의 왕릉(히노쿠마노 사카이노미사사기)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왕릉은 백제 성왕(523∼554)의 능이다. 백제에서의 재위 연대로 따져볼 때, 성왕은 일본에 건너간 후 17년간을 아스카왕실에서 살다 서거해 지금의 ‘히노쿠마노 사카이노미사사기’ 에 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나라현에는 백제 성왕이 왜의 긴메이왕을 겸임했다는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5세기부터 고대 일본의 초기 왕실이 실재한 지역은 오사카와 나라(奈良) 땅이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교수는 1978년 발간된 저서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에서 “오사카 땅에서 5세기 초경을 중심으로 백제 도래인인 오진왕(應神王)과 그의 아들 닌토쿠왕(仁德王)의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도쿄대학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도 미즈노설(說)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후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종합 연구한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도쿄 도세고교) 교사의 저술 ‘백제로부터 도래한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0)’ 등의 연구 성과는 고구려와 백제계 도래인들의 일본에서의 기마민족 왕조의 성립을 종합 규명해냈다.

백제인들은 6세기에 오사카 지역 구다라스(百濟洲)로부터 서서히 서쪽으로 내륙 깊숙한 곳으로 왕도를 옮겨 백제 불교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게 되었다. 그 터전이 나라(奈良) 아스카(飛鳥) 땅이다. 특히 6세기 중엽부터 나라 지역 안의 아스카 일대에서 드디어 백제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백제계 왕실이 왕조를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서쪽 내해 안쪽 지대인 지금의 오사카, 즉 당시 구다라스 바닷가 나루터(難波津) 지역으로 고구려와 신라 등 외세 침략에 대비, 왕실 방어를 위함으로 분석된다.

◇오진왕(곤지왕자) 사당

그 주도적인 역할을 이끈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의 아들인 제26대 성왕(523∼554, 백제에서의 재위 연대)이다. 성왕은 554년 극비리에 제1왕자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양위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이 554년 7월에 50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신라를 기습하다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부상해 서거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여러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성왕은 이 무렵 일본의 백제인 왕실로 잠적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우선 성왕의 등극 초기부터 간략하게 짚어보자. 그는 즉위년인 523년에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기마군 1만명을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맡겨 패수에서 격퇴시키고, 이듬해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친교를 맺었다. 525년에는 신라와도 수교했다. 529년 또다시 고구려가 남침하여 혈성을 빼앗자 기마병 등 3만을 좌평(佐平) 연막(燕謨)에게 떠맡겨 오곡에서 대항시켰으나 2000여명의 군사만 잃고 패전했다. 그 후 538년에는 왕도를 웅진(공주)으로부터 사비(소부리/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548년 1월 고구려가 예(濊)와 공모,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성왕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신라군 3000명의 도움으로 침공군을 대파했다. 550년 1월에 성왕은 장군 달기(達己)에게 1만의 군사로서 고구려 도살성을 침공시켰다. 그 해 3월에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으로 쳐들어왔다. 553년 신라가 백제 동북 변방 지역에 침공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성왕은 이에 굴복하여 공주를 진흥왕에게 시집 보냈다.

◇긴메이왕릉 주변

그 이듬해인 554년 7월에 성왕은 50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신라 구천을 기습하다 부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게 삼국사기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많은 모순을 갖고 있다. 수만 명의 기마병을 거느릴 수 있는 성왕이 겨우 50명의 기마병을 몸소 거느리고 신라로 침공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즉 성왕은 전사를 가장하기 위해 야간의 기습 작전을 택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며 그가 실전에 참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혹시 성왕이 전사를 가장, 선전해 풍문을 퍼뜨리고 왜의 백제 왕실로 완전히 건너간 것은 아닐까.

◇오진왕(곤지왕자) 사당 내부

성왕은 왜왕실로 완전히 잠적하기 이전인 539년에 왜왕실의 백제계 센카왕(宣化王·536∼539)이 서거하자 일본에 건너가 왜왕을 겸임하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이때부터 성왕은 백제와 일본을 넘나들다가 554년 전사 소문을 퍼뜨리고 태자 위덕왕에게 양위한 뒤 구다라스 서쪽 멀리 안전한 나라 아스카 분지에다 불교 국가 건설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곳만큼은 고구려나 신라가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무슨 힘으로 지금의 오사카 땅인 구다라스며 저 멀리 서쪽 나라 지역 아스카 분지를 아울러 지배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나라 지방의 지배자는 백제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570)였고 그는 백제계 왜왕실의 실권자였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소가노 이나메의 증조부는 백제 조신(朝臣) 목리만치이며 유랴쿠왕(雄略 456∼479 재위) 때 왜나라로 건너와 왕실의 삼장(三藏)을 관장했다”(‘飛鳥’ 日本NHK방송출판협회, 1995)고 저술했다. 이와 함께 고쿠가쿠인대학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1872∼1967) 교수는 “유랴쿠천황은 백제 건국신(建國神)을 제사 모셨다”(‘日鮮同祖論’ 1929)고 밝히기도 했다. 고구려의 주몽을 조상 신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또 가나자와 교수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 시절 왜왕실로 건너가 중신이 된 목리만치의 아들은 소가노 가라코(蘇我韓子)이며 손자는 소가노 고마(蘇我高麗)였고 증손자는 앞에서 지적한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이며 고손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626)이다”고 지적했다. 백제 조신 목리만치의 증손자인 소가노 이나메는 조정의 최고대신(그 당시 우대신)으로서 백제를 오가던 성왕을 철저하게 떠받들었다. 두 명의 누이(기타시히메, 오아네노키미)를 모두 성왕의 후궁으로 입궁시켰고, 동시에 왕실의 권력도 장악했다.

아스카 땅에서 백제 성왕이 왜왕실의 긴메이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백제 도래인 오진왕과 그의 아들 닌토쿠왕의 시대로부터 잇대어 왜왕실을 계속 장악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랴쿠왕 때 총애를 받으며 왜왕실에 살고 있던 마다왕자(末多王子)가 백제로 귀국하여 제24대 동성왕이 되었다(‘일본서기’).

◇긴메이왕릉 편액

유랴쿠왕이 끔찍하게 귀여워했다는 마다왕자는 다름 아닌 백제의 왜나라 정복자 오진왕(개로왕의 제2왕자인 곤지왕자)의 제5왕자였다. 그러기에 “마다왕자가 백제로 건너가 백제국의 동성왕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귀국 길에는 쓰키시(築紫·규슈땅)의 병사 500명의 호송(護送)을 받았다”(‘일본서기’ 유랴쿠 23년 4월조)는 것이다.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500명의 호위 병사가 받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이는 두말할 나위없이 왜왕실은 곧 백제인들의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동성왕이 서거하자 왜의 부레쓰왕(武烈 498∼506)은 왜왕실에 살고 있던 사마왕자(동성왕의 제2왕자)를 다시 백제 제25대 무령왕으로서 보냈다(‘일본서기’). ‘삼국사기’에는 없는 기사가 일본사에는 아주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왜왕실에 살고 있던 성왕이 귀국해 무령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를 규명할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부레쓰왕이 서거한 뒤 오진왕(곤지왕자)의 손자이며, 백제국 왕이 된 동성왕의 왕자 게이타이왕(繼體王·507∼531 재위)이 왜왕으로 등극했다. 그 이후 게이타이왕의 제2왕자 센카왕이 죽어 왕위를 계승한 것이 538년 왜왕실에 불교를 포교했던 백제 성왕이다. 즉 왜의 긴메이왕으로서의 성왕의 등극이며, 그때부터 성왕은 백제와 왜나라를 왕래하며 두 나라의 왕위를 겸임했던 것이다.

일본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백제 성왕 18년(540)에 성왕은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했으며, 성왕은 곧장 왜국으로 망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왜국 나라 땅의 가나사시노미야궁(金刺宮)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되었다”(‘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1991)고 단정했다.

일 왕실 족보격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 왕실 편찬)에 보면 일본 제30대 왕인 “휘(諱) 비다쓰(敏達)는 백제왕족”이라는 명문이 사실(史實)로 밝혀져 있다. 일본 고대 문헌에서 일본의 한 고대왕이 왕의 실명(實名)으로서 백제왕족이라는 기사가 직접 기록된 유일 사항이다. 비다쓰왕(敏達王·572∼585 재위)은 긴메이왕(성왕)의 제2왕자이다. 성왕의 제1왕자는 그 당시 백제 제27대 위덕왕이었다.

고대 일본 나라 땅에서는 역대 왕들이 백제 성왕의 신주를 받들며 왕실 사당에서 성왕을 제사 지내며 모셔왔다. 더구나 794년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이 나라 땅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에 있던 왕도를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으로 천도하자마자 백제 성왕의 왜왕실 관할 사당은 새 왕도인 헤이안경으로 옮겨진다. 그곳이 지금 교토시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이다.

물론 이 사실은 이미 19세기의 저명한 국학자 반노부토모(伴信友·1773∼1846)가 “히라노신사의 신주는 백제 성왕이다”(‘蕃神考’)라며 규명한 바 있으며 뒤이어 오늘날 수많은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일본 왕실 문헌(‘연희식’ 917 왕실 편찬)에도 백제 성왕 신주를 모신 히라노신사는 일본 왕실이 관장하며 제사 모시는 사당이라고 기록돼 있다.(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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