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51) 백제인 후손 '정이대장군' 다무라마로 에조 침공

바보처럼1 2007. 9. 11. 19:49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51>백제인 후손 '정이대장군' 다무라마로
에조 침공 2차례나 격퇴… 日王 신임 독차지
 ◇백제계 일본 왕조에 대항한 에조 세력을 정벌한 공으로 일 왕실 최고 무장격인 정이대장군까지 오른 다무라마로가 창건한 기요미즈데라의 웅장한 정문.
일본 교토시 동쪽 산 언덕에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은 고대 일본 정복왕인 백제인 오진왕(應神, 4∼5세기 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8세기 말 세워진 것으로 “교토를 관광하는 일본 사람치고 기요미즈데라를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절이다. 798년 이 사찰을 창건한 이는 백제인 가문의 무장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다.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오진왕 때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阿知使主)였다(‘續群書類從’ 1822).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간무왕(桓武 770∼806 재위)의 총애를 받던 왕실 최고 무장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다. 그는 793년 왕도를 위협하며 일본 동북 지방으로 밀고 내려오는 홋카이도 큰 섬 아이누족 집단인 에조(蝦夷·에미시, 에비스)의 무력세력을 정벌하는 큰 무공을 세워 간무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간무왕은 당시 아이누족 에조 무력집단의 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무장 다무라마로에 의해 아이누족은 계속해 격퇴, 섬멸됐다. 이러한 무공으로 다무라마로는 796년 동북지방의 태수로 임명됐고, 797년에는 왕실 최고 무장인 정이대장군이 된 것이다.

그는 801년 10월에도 침공하는 에조를 크게 섬멸하고 개선하여 간무왕의 더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다무라마로는 귀화계 씨족이며 뒷날 대납언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이 되고 사후에는 종2위(從二位)로 추서될 정도였다. 그의 딸은 간무천황의 비가 되어 후지이친왕(葛井親王)을 낳았다”(‘歸化人’ 1965)고 지적했다. 교토산대 고대사 담당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도 사카노우에노하루코(坂上春子) 등을 상세하게 거명하며 “간무왕의 후비(后妃) 중 6명이 도래계 씨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무라마로의 성명 위에 붙은 것은 ‘사카노우에’(坂上) 즉 ‘언덕 위’라는 ‘판상’ 두 글자이다. 그것은 다무라마로가 일본 동북지방으로 쳐내려온 아이누족들을 정벌하며 무공을 거듭 세우고 나서 왕도 헤이안경(平安京·지금의 교토시) “동쪽 언덕 위에다 기요미즈데라를 세운 뒤부터의 일”(‘국보·중요문화재안내’ 1963)이라고 도쿄대학 건축사학 담당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가 지적했다.

헤이안경 동쪽 산 언덕 바윗골 험준한 단애 위에다 대형 기둥들을 나란히 세워 건축한 기요미즈데라의 웅장한 본전 건물은 일본 국보 중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재이다. 본전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덮었다. 오타 교수는 이 본전 건물이 “처음 창건할 때, 교토 지방의 왕도였던 나가오카경(長岡京)의 왕궁 본전(시신덴·紫宸殿) 건물을 간무천황이 하사하여 그것을 옮겨다 세우게 되었다고 전한다”(앞 책)고 했다.

◇기요미즈데라 본전에 모셔진 불상.(왼쪽)◇기요미즈데라 삼중탑.

다무라마로는 비록 이전 왕도의 왕궁 본전 건물이었지만 국왕으로부터 직접 그것을 물려받을 만큼이나 간무왕의 은총을 입었다. 현재 일본 불교 기타홋소슈(北法相宗) 총본산이 된 이 가람의 단애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본전 건물을 두고 예로부터 비유해오는 명언이 있다. “기요미즈의 무대로부터 뛰어내린다”는 것인데, 그 풀이는 “결연하게 단행한다”이다. 이는 바로 무장 다무라마로의 에조 침략 퇴치의 무용 등 그의 늠름하고 결연한 전공의 발자취에서 생겨난 찬사다.

백제인 후손인 다무라마로가 헤이안경 동쪽 산 언덕에 세운 오진왕의 기요미즈데라는 창건 후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됐다 재건되었다. 17세기 초인 1633년에는 에도바쿠후 제3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가 앞장서서 오진왕의 기요미즈데라를 재건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장군은 백제인 간무왕의 후손이며, 교토 남부 야와타(八幡)시의 오진왕 큰사당인 이와시미즈하치만궁(石淸水八幡宮)도 헤이안경의 기요미즈데라를 재건한 이듬해인 1634년에 재건(연재 48회 참조)한 인물이다.

정이대장군 하면 흔히 근세의 강력한 무사 정권이었던 에도바쿠후(1603∼1867) 최고 실권자였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본 왕실의 정이대장군 직제는 그보다 800여년 앞선 간무왕 시대인 794년에 시작되었다. 이 당시 간무왕 밑에 있던 백제계의 무장 오도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 731∼809, ‘신찬성씨록’ 815)가 최초의 정이대장군이 되었고, 다무라마로가 큰 무공을 세우며 뒤를 이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굽어본 교토시.

간무왕은 생모인 친어머니가 백제왕족 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 ?∼789) 대비였고(‘속일본기’ 797년 왕실 편찬), 부왕인 제49대 고닌왕(光仁 770∼781 재위)도 백제인이었다(‘대초자’ 1158). 그러기에 간무왕 당시에 “왕실 요직은 모두 백제인 출신 인물들이었다”(‘속일본기’)는 것이 왕실 역사에 장황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헤이안경 왕족과 귀족 족보 ‘신찬성씨록’(총 30권) 편찬의 발자취다. 처음으로 왕실에서 ‘신찬성씨록’ 간행을 명령한 것은 간무왕이었다. 이 역사책 간행은 간무왕의 왕자 만다친왕(万多親王, 788∼830)이 주축이었다. 어째서 간무왕이 이와 같은 족보를 만들도록 명한 것인가. 간무왕은 왕실 율령(律令) 체제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계책으로 편찬시켰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일본 동북지방의 선주민들이 아이누족과 결탁하여 백제계 간무왕의 정권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헤이안경의 왕족과 귀족의 신분을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에 다무라마로와 같은 충신의 아이누족 정벌로 정국 안정을 꾀한 뒤 ‘신찬성씨록’ 간행을 왕자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다.

간무왕이 부왕 고닌왕에 이어 781년 왕위를 계승한 지역은 헤이안경이 아니고, 오늘의 교토 동남 지방인 나라(奈良) 땅, 그 당시의 헤이제이경(平城京·현재의 나라시)이다. 간무왕은 이 지역 백제인들의 세력권에서 등극했으나 선주민들의 적지 않은 벡제 배척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등극한 지 불과 3년 만인 784년 천도를 시작했다. 헤이제이경에서 저멀리 서북쪽인 지금의 교토 지방 남쪽의 나가오카경(長岡京)으로 왕도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간무왕이 총애하던 백제계 중신인 중납원(中納言) 벼슬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繼 737∼785, ‘신찬성씨록’)가 천도를 반대하던 반목자들의 쿠데타로 785년 10월 암살당했다. 후지와라노 다네쓰구는 왕명으로 새 왕도 건설 책임자(造京使)로 일하던 중에 피습당했다. 간무왕은 몹시 애석해하며 그에게 좌대신직을 추서했다. 이와 같은 정변뿐 아니고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간무왕은 왕도 나가오카경으로부터 다시 헤이안경으로 재차 천도한 것이 794년이었다.

◇일본 교토시 야마시나구 공원 내의 다무라마로 묘지.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간무왕이 처음 헤이제이경에서 즉위한 초기 칙명으로 지시한 중대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일 동족(韓日同族) 관계 모든 서적의 분서 사건(焚書事件)’이었다(‘弘仁私記’ 9세기). 즉 백제 왕족을 부모로 태어난 간무왕이 그의 집권 초기에 이르러 일본 관가에 전해지던 한일 동족관계의 모든 역사책들을 수집하여 불태우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 분서사건에 대해 14세기 일본의 거물 정치가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帛親房 1293∼1354)도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마한·진한·변한)과 동종(同種)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간무와 어대(御代)에 불태워버렸도다”(신황정통기 14세기)라고 썼다.

이런 내용으로 추찰할 때 등극 초기의 간무왕은 백제인이라는 출신 때문에 호시탐탐 동북지방 침략을 꾀하던 아이누족과 선주민 세력으로부터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다무라마로와 같은 유능하고 용맹한 무장을 둔 까닭에 그는 차츰 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더구나 794년 세 번째 왕도인 헤이안경에 천도한 뒤부터 간무왕은 백제인 신하들을 거느리고 확고부동한 왕실 정치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무장 다무라마로를 총애하며 역대 어느 백제계 왕보다 모국 백제 의식이 투철한 군왕으로 권세를 펼쳐 나갔다. 그것은 ‘신찬성씨록’ 편찬뿐만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794년 헤이안경 천도와 동시에 왕궁 안 남북에다 백제신 두 분과 신라신을 위한 사당 두 곳을 건립한 것이다. 그 상세한 경위는 일본 왕실 법도인 ‘엔기시키’(延喜式·총 50권·왕실에서 서기 927년 완성)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일본 왕이 직접 궁 안에서 제사 모시는 신은 한신(韓神) 두 분과 원신( 園神)으로 규정되어 있다. 역대 일본 왕들이 무엇 때문에 백제신과 신라신에게 몸소 제사지내는 것일까. 이 제사는 해마다 11월23일 전야에 거행하는 ‘니나메노마쓰리(新嘗祭)’이다. 이때 일왕은 햇곡식으로 빚은 제주(祭酒)와 떡, 온갖 제수를 진설하고 첫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마친다. 이와 같은 왜 왕실의 한국신 제사에 관한 고대 문헌에는 “한신과 원신은 간무왕에 의하여 헤이안경으로 천도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본래 궁중에서 제사를 모셨다. 천도 당시에 조궁사(造宮司)가 다른 곳으로 신주를 옮기려고 했을 당시, 간무천황의 꿈에 현신하기를 지금까지처럼 ‘제왕(帝王)을 지켜줄 것이로다’는 탁선(託宣)이 있어 새로 천도한 궁 안에도 전처럼 다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江家次第’)고 기록돼 있다.

간무왕은 또한 헤이안경 천도와 동시에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백제 재위)의 왕실 관장 사당을 왕명으로 헤이안경 북쪽에 세웠다. 지금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연재 36회 참조)가 그 사당이다. 간무왕은 본래 헤이제이경에 모시고 있던 백제 성왕의 사당도 새로 천도한 그의 왕도 헤이안경으로 모셔왔다. 이 무렵 가장 두드러진 충신은 다무라마로 장군이었다. 그러기에 다무라마로 장군의 장례식은 왕에 버금가는 장중한 것이었다. 장례 행렬은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조정 고관들과 고승들의 독경 속에 갑옷과 검과 활통 등 무구를 함께 매장했다(‘대일본사’ 1906).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전기가 실릴 정도로 이름난 무장 다무라마로의 묘지는 현재 교토시의 야마시나구(山科區)에 있는 ‘다무라마로공원’ 부지 안에 있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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