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53)오우미 땅의 명찰 사이교지

바보처럼1 2007. 10. 12. 11:43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53>오우미 땅의 명찰 사이교지
쇼토쿠 태자 고구려 스승 혜자스님 기려 가람 건립
 ◇고구려와 백제 등 서쪽 나라에서 건너온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는 터전이라는 의미의 ‘사이교지’ 본당 모습.
일본 교토부에 위치한 호수 ‘비와코’(642.4㎢) 옆에는 오쓰(大津)시 명찰 중의 하나인 사이교지(西敎寺)가 자리하고 있다. 게이한(京阪) 전철의 종점에서 내려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비와코 호수를 내려다보는 히에이산(표고 848m) 동쪽 기슭 언덕에 자리한 웅장한 가람이다. “그 옛날 쇼토쿠태자(聖德 574∼622)가 고구려의 혜자(惠慈 ?∼623·일본명 에지) 스님을 위하여 만든 가람입니다. 오늘의 본 사이교지는 전국에 말사 500여개를 거느리고 있는 천태종 진성파(眞盛派) 총본산”이라고 호묘(法明) 스님은 설명한다.

사이교지는 “스이코여왕(推古 592∼628 재위) 26년(618년) 당시 쇼토쿠태자가 스승인 고구려 승려 혜자 스님의 장수를 염원하기 위해 세웠다. 덴치천황(661∼671 재위) 어세에 장육(丈六) 불상을 안치했으며, 사이교지라는 사찰 명칭을 친히 내려주셨다”고 창건역사를 밝히고 있다.

일본 제31대 요메이왕(用明 585∼587 재위)의 왕자였던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고구려 고승 혜자 스님은 누구인가. 혜자 스님은 백제 건축가들이 백제계 스이코여왕 시대 초기인 596년, 장장 8년간의 긴 공사 끝에 왜나라 최초의 7당 가람 아스카노데라(飛鳥寺, 본래는 法興寺)를 나라땅 아스카(飛鳥) 왕실 터전에다 준공하기 직전인 595년 5월10일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건너갔다. 아스카 왕실에서 혜자 스님을 멀리 고구려로부터 일부러 모셔 왔다. 고승 혜자 스님은 곧장 왜왕실에 머물면서 당시 나이 21세의 청년 쇼토쿠태자에게 불교 경전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쇼토쿠태자는 친고모인 스이코여왕의 태자로 책봉되었고, 또한 조정의 섭정직에 있었다.

이 무렵 백제에서 아스카로 건너가 있던 건축가며 기와박사, 화공 등이 세우게 된 게 아스카노데라였다. 게이오대학 사학과 시미스 마사지(志水正司) 교수는 이 사찰에 대해 “1956∼1957년 사이 아스카노데라 유적 발굴 결과 가람의 건축 양식은 고구려 평양 교외 청암리(淸岩里) 사찰터의 ‘3금당 형식’과 청암리 근처 상오리(上五里) 사찰터와 닮은 고구려 양식의 사찰이었다”(‘古代寺院の成立’ 1985)고 지적했다. 스이코여왕이 당시 한반도의 불교 선진국이었던 고구려 승려들의 학문을 매우 중시했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598년 아스카노데라 7당 가람이 준공되자마자 혜자 스님은 이 절에 직접 입주하여 쇼토쿠태자를 계속 가르치게 되었다. 사제간의 정 또한 두터웠다. 쇼토쿠태자는 혜자 스님으로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는데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쇼토쿠태자가 603년 12월 왕실에서 제정한 ‘관위 12계’(官位十二階) 시행과 604년 4월 공포한 ‘17조 헌법’의 제정이었다. ‘17조 헌법’이란 삼보(三寶:불·법·승)를 받들며 불교를 통해 국가에 충성할 것을 규정한 왜왕실 초유의 법령이었다.

◇사이교지의 정문. 오른쪽에 동승상이 서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로부터 11년 뒤인 615년 11월15일, 고구려 혜자 스님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혜자 스님이 일본 왕실에 체류한 것은 20년이었던 셈이다. 그 이듬해 쇼토쿠태자는 비와코를 굽어보는 산수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명승지에 떠나간 스승을 그리며 장수를 염원하는 사이교지 사찰을 세우게 됐다. 스승이 고구려로 귀국한 지 5년 만인 622년 2월5일, 쇼토쿠태자는 나이 48세로 서거했다.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혜자 스님을 기록하고 있다.

“2월 쇼토쿠태자를 시나가노미사사기(지금의 오사카부 다이시초) 능에다 안장했다. 이때 고구려승 혜자는 귀국하고 일본에 없었으나 태자의 서거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승려들을 모아 태자의 명복을 비는 재회(齋會)를 가졌다. 그러고는 스스로 독경하고 강설하며 서원(誓願)하기를 ‘일본국에 성인이 계셨다. 가미쓰미야노도요토미미노미코토(上宮豊聰耳皇子)라는 분이다. 하늘에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으며 큰 쇼토쿠(聖德)을 가지고 일본국에 태어나셨다. 중국 3대의 성왕(聖王)도 능가할 정도로 큰일을 하였으며, 삼보를 공경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구원하였다. 진실로 대성(大聖)이다. 그런 태자가 돌아가셨다. 나 자신은 국적이 다르다고 말하더라도 태자와의 정리(情理)는 끊을 수 없다. 나 혼자 살아남아 보았자 아무런 쓸모도 없다. 내년 2월5일에는 어김없이 나도 죽을 것이로다. 정토에 가서 가미쓰미야노히쓰기노미코(上宮太子)를 만나 뵙고 서로가 중생에게 불교를 펼칠 것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혜자는 정했던 그날에 그대로 죽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누구나가 말하기를 ‘가미쓰미야노히쓰기노미코 한 분뿐만이 아니라 혜자도 성인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당시를 ‘일본국’이라고 쓴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도쿄외대 동양사 담당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교수는 “일본 국호는 서기 670년 이후의 호칭이다”(‘倭國’ 1977)고 단정했다. 첨언하자면 쇼토쿠태자는 백제인 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서 제30대 비타쓰왕을 ‘백제 왕족’이라고 했고 비타쓰의 계승자였던 제31대 요메이왕은 비타쓰왕의 친동생이었다. 그렇다면 요메이왕의 친아들 쇼토쿠태자도 백제계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보는 게 옳다.

◇사이교지 본당 불상.(왼쪽)◇덴치왕이 사이교지라는 사찰의 명칭을 친히 내려주었다는 기념 비석.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씨는 쇼토쿠태자가 스이코여왕 때 조정의 최고위 장관이던 우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였다며 “에도시대(1603∼1867)의 유학자들은 쇼토쿠태자가 스�천황(崇峻 587∼592)을 암살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스�천황을 암살했다는 것은 허구로 꾸며낸 조작이다. 쇼토쿠태자 자신이 소가노 본인이었기 때문이다”고 ‘聖德太子は蘇我馬子の分身’(1995)에서 주장했다.

또 쇼토쿠태자를 가리켜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돌궐(突厥)의 영웅으로 내세우는 사학자가 있어 주목되기도 한다.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일본 저명한 출판사인 ‘문예춘추(文藝春秋)’ 발간 역사론(‘聖德太子と日本人’ 1990)에서 “지금 일본의 고대사에는 새로운 빛이 비춰져 생각지도 못했던 시대의 모습이 우리 앞에 계속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불교 신앙의 돈독한 성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온 쇼토쿠태자는 실은 동아시아 기마민족 돌궐(터키 계통 유목민족)의 영웅 달두(達頭)였다. 달두는 백제로 와서 법왕(法王 599∼600 재위)이 되었고, 왜국으로 다시 건너와서 도요토미미노리노오키미(豊聰耳法大王)가 되었다가 후일 쇼토쿠태자로 호칭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주부대학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 교수는 쇼토쿠태자는 실재하지 않았다고 다음처럼 이설을 폈다. “쇼토쿠태자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천수국수장’(자수품 한 부분-필자주)은 당대가 아닌 후세에 만들어진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쇼토쿠태자의 위대성도 그 실재성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일체 없다는 셈이다. 사실상 쇼토쿠태자는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다”(‘聖德太子と日本人’ 2001).

사이교지라는 가람 명칭에 관해서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쇼토쿠태자가 세운 사이교지 명칭은 서쪽 나라, 즉 고구려와 백제 등 한국에서 건너온 불교의 가르침의 터전이라는 뜻에서 덴치왕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飛鳥の聖德と佛敎’ 1967)고 했다. 가도와키 교수는 “쇼토쿠태자는 그의 생존시에 사이교지에 여러 차례 가서 사원의 발전에 힘썼으나 그의 사후에는 한동안 이 가람이 퇴락했다. 그러나 덴치천황이 오우미(近江) 땅으로 천도하자 곧 사이교지의 중흥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덴치왕은 많은 재원을 가람에 내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사이교지는 퇴락을 거듭한다. 그러나 10세기 중엽 신라계 고승인 료겐 간산대사(良源 元三 912∼985, 연재 44회 참조)는 사이교지 재건에 앞장선다. “덴치천황 시대 이후 다시 장기간 황폐했으나 간산대사(慈惠大師로도 경칭)가 관여해 염불도장(念佛道場)으로서 중흥됐다. 그 후 다시 고쓰치미카도천황(後土御門, 1465∼1500 재위) 시대부터 더욱 번성했다”고 ‘사전(寺傳)’은 전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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