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56)오미신궁의 신주 덴지왕

바보처럼1 2007. 11. 23. 23:26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56>오미신궁의 神主 덴지왕
조메이왕의 아들… 백제 도래인 터전으로 천도
 ◇백제 멸망 직후 제·왜 연합군 2만7000명을 파견할 정도로 모국의 부활을 원했던 일본 덴지왕을 신주로 모신 오미신궁의 본전.
일본 교토부 오쓰(大津)시에는 ‘오미신궁’(近江神宮)이라고 불리는 큰 사당이 있다. 오미신궁은 일본 제38대 덴지왕(天智, 재위 661∼671)을 신주로 모신다. 덴지왕은 일왕 중 백제인과 가장 연고가 깊은 인물이다. 그의 생부가 제34대 조메이왕(敍明, 재위 629∼641)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조메이천황은 나라 땅의 구다라강(百濟川) 강변에다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지(百濟寺)를 짓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조메이 13년(641) 10월9일 구다라궁에서 서거했다. 10월18일 궁의 북쪽에다 빈궁을 설치했다. 이것을 ‘구다라노 오모가리’(百濟大殯, 백제왕실의 3년상, 필자주)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나라 땅의 구다라강(百濟川) 강변에 몸소 백제궁을 짓고 살았던 조메이왕의 발자취는 덴지왕의 뿌리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 구다라궁 인근에는 ‘구다라사삼중탑’(百濟寺三重塔)이 우뚝 서 있어 옛 백제 고대 왕실과 불교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세이조대학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교수는 “조메이천황은 당대 ‘구다라대왕’(百濟大王)으로 호칭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지적했다.

‘백제대왕’으로 호칭되었던 조메이왕의 아들인 덴지왕의 존재는 백제 멸망 당시의 한일 관계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일본서기’는 덴지왕이 백제 멸망 당시 서거한 생모인 제37대 사이메이여왕(齋明, 재위 655∼661)의 뒤를 이어 그해 7월24일, 흰 삼베옷을 입은 채 즉위식도 마다하고 조정의 정사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덴지왕은 즉위한 지 두 달째인 661년 9월 나가쓰노궁(長津宮)에서 백제 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織冠)을 수여했다. 또한 오노오미 고모시키(多臣蔣枚, 왕도 나라 조정의 조신으로서 백제 귀족인 太安麻呂의 친조부, 필자주)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때 풍장왕자는 군병 5000여명을 이끌고 본국(백제)으로 갔다. 풍장이 귀국하자 백제 조신 좌평(佐平) 귀실복신(鬼室福信)이 마중하며 땅에 엎드려 모든 국정을 그에게 맡으라고 아뢰었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다. 이때는 백제가 제31대 의자왕(재위 641∼660)을 마지막으로 멸망한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그러나 최효식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1987)에서 “이때 귀실복신과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은 백제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풍장왕자를 맞아 왕으로 삼고, 부여의 사비성을 포위해 주둔 중이던 당군과 신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나당군은 병력을 늘려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이자 풍장이 머물던 주류성(周留城)과 최후의 거점 임존성(任存城)을 663년 함락시켰다”고 주장했다.

◇소가노마코 대신이 오노노오카 북쪽 목탑 기둥 밑에 봉안했다는 부처 사리용기.(왼쪽)
◇일본 불교와 사리문화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것이라는 사실이 부상략기 등 일본 고대 불교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덴지왕은 662년 3월 백제인과 왜인 연합군 2만7000명을 백제에 파견해 나당군과 싸웠다. 하지만 구원군은 그해 8월 백촌강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다음달 7일 백제는 주류성에서 항복했던 것이다.

덴지왕은 멸망 직후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인 400여명을 맞아들여 오미 땅 가무사키(神前)군에 주택과 논밭을 줬으며 665년 10월에는 백제인 남녀 2000명에게 아즈마국(東國)에 터전을 잡아주고 관급을 베풀었다고 한다. 666년 3월 오미땅으로 천도한 덴지왕은 2년 뒤 좌평 여자신(余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백제인 남녀 700여명을 오미의 가모(蒲生)군으로 불러들였다고 일본서기는 전하고 있다. 도호쿠대학 사학과 세키 아키라(關晃) 교수는 “이 무렵 백제인 약 10만명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설명했다.

덴지왕이 오미 땅으로 천도하고 왕의 큰사당인 오미신궁이 오늘날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이곳과 백제의 역사적인 연결고리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지역 ‘오미도래인클럽’(近江渡來人俱樂部)의 가와모토 유키오(河本行雄) 회장은 지난 15일 “오미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백제인 후손은 해마다 그리운 모국인 백제의 옛 왕도 부여와 공주를 방문하곤 한다”면서 “일본 왕실이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으며 특히 오미 지방인 오쓰(大津)시가 백제 도래인의 터전이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 역사책은 그러나 덴지왕이 이전 왕도인 나라(奈良)에서 오미로 천도하자 이에 항의하는 백성들이 몹시 소란을 피웠다고 전한다. 일본서기는 “3월 왕도를 오미로 천도했다. 이때 천하의 백성들은 왕도 이전을 반대하고 비난하며 간(諫)하는 자들이 많았다. 풍자 노래가 많이 나왔다. 낮이고 밤이고 수많은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의 왕을 풍간하는 노래는 특히 순수한 백제 계열의 제왕들이 다스렸던 조메이, 고교쿠, 사이메이, 덴지 시대에 집중됐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대부분이 동요 형태로 유행된 노래인데 정치적 목적이 컸다”고 지적했다. 일본땅의 선주민 집단이 천도에 항의하며 소란을 피우거나 풍간의 노래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덴지왕의 명으로 오미에 세워진 스후쿠지 유적지.

그렇다면 덴지왕은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왜 오미로 천도했을까. 오미 지역 왕도(大津京, 오쓰경)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하야시 미치히로(林通博)씨는 그의 저서에서 “이 지역에 거주한 백제계 도래인 집단은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고도의 토목 기술을 배경으로 협소한 지역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생산력과 경제력을 창출해 7세기 중엽에는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훗날 나가오카경(長岡京, 784년부터의 교토부 지역의 왕도)과 헤이안경(平安京, 794년부터의 현재의 교토시의 왕도)의 왕도 조영(造營)은 이 지역을 주름잡던 도래인 씨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바탕이 돼 이뤄진 것이다. 오미경으로의 천도 역시 도래인의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오미 일대 도래인들의 뛰어난 산업 기술과 자본이 덴지왕의 오미 천도에 큰 밑받침이 됐다는 것이다.

이시하라 스즈무(石原進)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덴지천황은 천도에 필요한 고도의 토목 기술이며 경제적 기반을 도래인 집단에서 찾아냈다. 나라 왕도 일대가 신라와 가까워 늘 침략 위협에 노출됐다는 점도 고려됐다. 망명 백제인들의 우수한 기술로 일본 각지에 조선식 산성(山城)이 구축됐다. 덴지천황의 오미 천도는 조선반도의 정세를 강하게 의식한 극히 군사적인 색채를 띠었다고 생각된다”고 분석했다.

오미 지역의 유적 중 스후쿠지(崇福寺) 절터는 덴지왕의 독실한 불교 신앙을 보여준다. 스후쿠지는 덴지왕의 명으로 오미 천도 이듬해인 668년 세워졌으며 현재 이 유적에서 발굴된 부처 진신사리는 오미신궁에 국보로서 보존되고 있다. 사서 ‘부상략기’는 사찰 창건 당시 신라 고승 영충대사(永忠大師)가 건너와 있었으며 덴지왕이 가끔 들러 영충스님이 다려준 차를 즐겨 마셨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오미 지역에서는 현재 ‘햐쿠사이지초’(百濟寺町)의 유서 깊은 백제인 가람 ‘햐쿠사이지’(百濟寺, 백제사)를 볼 수 있다.

이 밖에 백제왕족이며 왜왕실의 이름난 조신이며 학두(學頭)였던 귀실집사의 묘지와 그의 사당 ‘기시쓰신사’(鬼室神社) 등 명소가 많다. 덴지왕대 유적은 최후를 맞이한 한반도 백제의 후손들이 어떻게 일본에서 정착하게 됐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도 학문적 탐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가지 부기한다면, 백제 제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이 577년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충남 부여 왕흥사 목탑터에서 발굴된 금은동 사리병기를 주목하고 싶다.

일본 고대 불교 문헌(‘元興寺緣起’ 등)을 살펴보면, 538년 왜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이는 백제 제26대 성왕(재위 523∼553)이다. 그로부터 46년 뒤인 584년 9월에 백제계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소아마자) 대신이 “백제에서 보내준 미륵석상을 이시카와(石川)의 자택에 모셔다 불전을 세웠으며, 이듬해 2월 소가노우마코 대신은 오노노오카(大野丘) 북쪽에 목탑을 세우고 기둥 밑에 부처님 사리(舍利) 용기를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모셨다”는 기록이 ‘부상략기’에 있다. 왜왕실 최초의 부처 사리가 백제로부터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어 부상략기는 593년 1월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소망했던 아스카(飛鳥) 땅의 호코지(法興寺, 법흥사)의 찰주를 세우던 날, 대신과 100여명(만조백관, 필자주)은 모두 백제옷(百濟服)을 입었으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때 부처님 사리가 든 용기를 찰주의 받침 속에 넣었다”고 했다. 일본 고대 불교 문헌이 백제 성왕 때 성행한 사리신앙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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