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역사기행] (57) 日 최초 백제神 사당 ‘미시마카모’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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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카모신사 경내 모습.
마쓰이 궁사가 오사카 요도가와(淀川) 상류 동쪽에 터를 일군 백제인 후손 이구치 아키오(伊口明生) 등 16가문 대표들과 함께 5년 만에 발간했다는 사당사서(‘三島鴨神社史’ 2006)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닌토쿠천황은 가와치(河內, 오사카 옛 지명)의 ‘만다 큰 제방’을 쌓는 동시에 요도가와 강변 터전을 지키는 신(神)으로서 백제로부터 이 고장 미시마(御島, 三島의 이두식 한자어/필자주)에서 오야마쓰미노카미를 맞았다. 이 신사는 왕도 난바(難波, 오사카 고대 왕궁 지역)를 지키는 수호신에게 계속해 제사를 모시게 됐다.”
마쓰이 궁사에게 “이곳은 일본 고대 최초의 백제신 사당인데 더러 한국에서 참배객이 옵니까”라고 묻자, 그는 “한국에서는 이곳을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당신이 첫 한국인 방문자”라고 대답했다. 이 백제신 사당 참배자는 일본인들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이곳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대신의 사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마쓰이 궁사는 “모두 잘 알고 있다”면서 “신자들 중 일부는 지난 10월 충남 부여에서 열린 백제문화제에도 다녀왔으며 해마다 조상의 고국인 부여와 공주를 찾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 사당에서는 모든 참배객에게 ‘닌토쿠 천황이 400년대 창건해 백제로부터 건너오신 화다지대신의 신주를 제사모시는 사당’이라는 내용이 적힌 안내서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2007)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미시마카모신사 통로 ◇미시마카모신사에 걸려 있는 편액.
일본 고대 오사카 지도인 ‘팔랑화도’(八浪華圖)는 난바 일대가 4세기부터 이미 ‘구다라스’(百濟洲)였다고 표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1098년에 처음 그려졌다. 지도가 900년 전쯤의 난바 등 오사카 주요 지역을 표시하고 있다. 지도에는 사당 터인 요도가와 강변지대를 비롯해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久太郞里, ‘백제리’라는 이두식 한자 표기) 등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오사카 중심지의 각 지명들이 명시돼 있다. 더욱이 당시의 ‘구다라 고우리(百濟郡, 백제군) 지역을 보면 지금의 오사카시의 중심 시가지인 히가시나리(東成)구와 일치하며 이쿠노(生野)구 또한 덴노지(天王寺)구와 연결된다. ‘구다라 고우리’에서 ‘고우리’는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
팔랑화도를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가 구다라스라는 이름 아래 백제인 왕가에 의해 발전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1922년 작성된 오사카전지를 보면 “오사카 중심지는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 등의 행정 구역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백제와 관련된 오사카의 옛 지명은 일제 치하의 행정 당국자들이 거의 모두 지금처럼 바꿔버렸다. 하지만 왕인 박사가 닌토쿠왕을 왕위에 천거하면서 지었다는 와카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의 ‘나니와쓰’(난파진)가 오늘날 오사카 중심 번화가 ‘난바’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박사 왕인의 위업을 새삼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미시마카모신사의 발자취는 일본 고대 역사 문헌 ‘후도기’(風土記, 8∼10C 편찬)에서도 확인된다. ‘후도기’는 “미시마에 계신 신의 어명(御名)은 오야마쓰미노카미이다. 일명 와다시노오카미이시다. 이 신은 난바의 다카쓰노미야(高津宮) 와궁에 천황이 계시던 어세(御世)에 나타나셨다. 이 신께서는 구다라국(백제국)으로부터 건너오셔서 난바의 미시마에 계시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도기’는 일본 나라(奈良) 땅 왕조 시대 백제 계열의 겐메이여왕(元明, 707∼715 재위) 때인 713년 여왕이 각 지역 지방 역사를 왕실에 써내도록 칙조를 내림으로써 편찬되기 시작했으며 다이고왕(897∼930 재위) 역시 925년 비슷한 지역사를 제출토록 칙명을 내렸다.
◇고대 왜왕실 최초의 백제신 사당인 일본 오사카 미시마카모신사의 정문과 정전. 신사 안내서에는 왕인 박사의 애제자였던 닌토쿠왕이 5세기 사당을 세웠고 한국에서 모셔온 백제신 화다지대신을 신주로 모셨다고 기록돼 있다.
왕인이 백제로부터 초청을 받아 왜왕실로 건너가 오진왕(應神, 4∼5C)의 왕실에서 몸소 오사사기 왕자를 가르쳐 왕위에 올려줬는데 그 오진왕의 제4왕자가 다름 아닌 백제신을 그의 왕실로 모신 닌토쿠왕이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오진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천황은 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루었다”(‘日本古代國家の形成’, 1978)고 단정지은 연구로 유명하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1917∼1983) 교수도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오진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천황 가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 온 일본 이주자였다”(‘日本國家の起源’, 1960)고 밝혔다.
근년에는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씨의 2001년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 온 오진천황’이 일본 사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시와타리씨는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왕의 왕릉에 대해 “오진릉(應神陵)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 구다라에서 건너 온 곤지왕자(昆支王子)이다. 그는 5세기 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곤지왕자는 백제 제21대 개로왕의 제2왕자이다.
왕인 박사의 애제자였던 닌토쿠왕 시대 백제신 화다지대신이 왜왕실로 건너왔고 이후 왕실 터전을 수호해줬다는 게 왕명으로 편찬된 일본 각 지역 고대사 기록 문헌에 나와 있다. 이 고문서 기사만으로도 ‘닌토쿠왕은 백제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에는 “닌토쿠천황 시대에 미시마에 살던 왕족은 이 고장 다카쓰기(高槻)의 벤텐산(辯天山)에 3대에 걸친 고분을 만들었다. 이때 가라사키 일대에 살던 모노노베 가문의 가라쿠니무라지(韓國連, 한국 귀족/필자주)들이 협력했다”고 기록돼 있다.
◇고대 오사카 지도인 ‘팔랑화도’에는 백제 관련 지명이 유난히 많다.
‘미시마카모신사사(社史)’에 따라 끝으로 강조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대목이 있다. 하나는 ‘국가신도(國家神道)와 전쟁의 비극’이라는 항목의 내용이다. 제국주의 시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이곳 백제신 사당에 압력을 가해 백제신 대신 국가신도, 즉 황국신도(皇國神道)의 최정점에 서있는 ‘천조대신’을 제사지내고 오늘날 미에현인 이세 땅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향해 큰절을 하도록 강요하고, “천황은 살아있는 인간신(現人神)이다”는 것을 신앙화했으며, 사당 경내에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령하는 ‘표충비’를 세우게 하였다. 또한 미시마카모신사사는 “신사의 뒷길로 다니는 통학생들은 반드시 이곳 사당을 향하여 큰 절을 하고 지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 어제신(御祭神, 백제대신)에 대한 숭경의 절이 아니라 천조대신과 현인신 천황에 대한 절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는 ‘점령군 지령에 의한 제사 금지’ 대목이다. 여기에는 “천황이 1945년 8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본이 패전한 뒤 맥아더 장군이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에 와서 지상 명령의 하나로 군국주의와 국가신도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그 때문에 교육 개혁이 시행되고 신사의 제사도 집행정지됐다”고 적혀 있다.◇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이는 연합군이 고대 백제신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 게 아니라 황국신도로 신사와 사찰을 국유화시킨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연합군의 제거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다른 신사나 사찰 기록에서는 접하지 못한 내용이 이곳 백제대신 사당의 역사에서는 크게 다뤄져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naver.com
- 기사입력 2007.12.19 (수) 11:04, 최종수정 2007.12.21 (금)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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