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현진오의 꽃따라 산따라] (4) 강원도 삼척시 덕항산

바보처럼1 2008. 4. 14. 19:44

[현진오의 꽃따라 산따라] (4) 강원도 삼척시 덕항산

위도가 높은 곳에 자리잡은 강원도 산들에는 봄이 늦게 찾아온다. 백두대간에 놓인 산들은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에 봄이 더욱 늦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몇몇 산지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봄꽃소식이 일찍 전해져 온다.

개복수초라고도 부르는 가지복수초는 삼척시 자생지에서 1월 중순부터 꽃을 피워 봄꽃인지 겨울꽃인지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설악산 자락에 사는 변산바람꽃도 3월 중순이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남부지방에 비해 겨울이 긴 강원도에서 봄꽃들이 이처럼 일찍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해양성 기후 덕분이다. 제주도와 남해안에 사는 보춘화나 대흥란 같은 난초들이 강원도 지방까지 올라와 자라는 것도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환선굴과 대금굴로 유명한 삼척시 덕항산에서도 이른 봄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덕항산은 백두대간에 솟은 높이 1073m의 산으로서 북쪽의 두타산과 남쪽의 함백산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금강산부터 줄곧 동해안을 따라 달리던 백두대간이 내륙 쪽으로 꺾여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한 산으로서 동해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덕항산 같은 강원도 백두대간 산들에는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에 눈이 내리는 일이 많다. 이런 곳들에서는 ‘눈을 녹이며 피는 꽃’이 아니라 ‘눈에 파묻힌 꽃’을 볼 수 있다. 이른 봄에 일찍 꽃을 피운 식물들이 때늦은 눈을 만나 그 속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진다.

덕항산 산자락에는 일찍 피는 봄꽃이 많으므로, 이들이 눈 속에 파묻힐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3월 하순이 되면 이곳에서는 얼레지, 노루귀, 산괴불주머니, 생강나무 같은 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몇 해 전 나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봄꽃들이 때늦은 함박눈을 만나 눈 속에 파묻힌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4월 초순에 갑자기 눈이 내려 ‘한겨울에 피어난 봄꽃’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덕항산에서 눈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여주었던 봄꽃 가운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민대극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귀한 식물이다. 새싹이 날 때 붉은빛을 띤 것이 많기 때문에 ‘붉은대극’이라고도 불린다. 꽃을 일찍 피우는 봄꽃들의 에너지가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은데, 민대극의 에너지원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뿌리가 잘 생긴 6년근인삼을 2배쯤 확대한 모습인데, 무 뿌리 정도로 크기도 크고 생김새도 힘차 보인다.

산자락에 있는 환선굴과 대금굴이 석회동굴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덕항산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산 전체가 석회암 덩어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흙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바위가 드러난 곳이 많고, 물 빠짐이 매우 좋은 게 석회암 지대의 환경적 특성이다. 이 때문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식물이 많이 자란다.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는 식물들은 호석회식물이라 하여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구분한다. 이름도 낯선 갈기조팝나무, 사창분취, 산토끼고사리, 자병취, 지치, 털댕강나무, 회양목 같은 것들이 그런 종류다. 석회암 지대에서 북방계식물이 많이 자라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2005년에 이루어진 한국교사식물연구회의 덕항산 조사에서 확인된 가는대나물, 개병풍, 만주바람꽃, 바위솜나물, 벌깨풀, 산새콩, 솔체꽃, 청닭의난초, 큰제비고깔 등이 이런 식물이다.

벌깨풀은 남한에서는 사는 곳이 한두 곳에 불과한 북방계 희귀식물이다. 남한에서 발견된 곳은 모두 석회암벽이 발달한 산이다. 연구회 교사들의 조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식물의 새로운 자생지가 밝혀진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석회암 지대에 대한 최근 조사에서는 넓은잎제비꽃이나 바이칼꿩의다리 같은, 그동안 남한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온 북한 식물들도 발견되고 있다. 석회암 지역이 식물 생육지로서 다른 어떤 환경보다 중요한 곳이라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그곳에 살고 있는 희귀식물들에 대한 연구도 덜 된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석회암 지대는 대부분이 망가지고 말았다. 남은 석회암 산지라도 보전에 힘을 쏟아야 소중한 식물들을 살릴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석회암 지대처럼 귀한 식물이 많이 자라는 곳을 보전하는 일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기사일자 : 2008-03-22    26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