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인간경영의 지혜 - 정치가로 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후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주어진 것은 호조의 옛 영지인 간토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상지인 미카와는 안타깝게도 환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어느 쪽이 이익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보다는 옛 영지가 훨씬 좋다. 특히 가이(甲斐)에는 금광이 많아 이번 군사비도 그곳에서 나온 금으로 충당했다.
무장에서 정치가로
간토로 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상경 희망은 거의 단절된다. 즉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신들의 불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의 특징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다. 이봉(移封)이 결정된 것은 7월13일,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8월1일 에도(江戶) 입성을 끝마쳤다. 여기에는 히데요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신속히 간토로 직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후다이 가신들은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등 구신을 등용했다.
이에야스가 가장 고심한 것은 간토 전역에 할거하는 소영주와 토호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호조와 다케다의 은덕을 입은 자들로 동화시키기가 용이치 않았다.
이에야스는 가이를 점령했을 때처럼 무리한 압박을 극력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가신으로 포섭해 나갔다.
그는 또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혀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호조의 연고지인 간토에 옮겨 가게 함으로써, 토호의 반란을 유발시켜 이에야스의 몰락을 기대했다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에야스는 직할령 설정, 가신의 배치, 토지조사 등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호조의 가신이던 토호에 대해 종래 신분을 인정해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대한 굴복을 이익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간토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력자의 죽음
규슈, 간토,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다이묘들의 신뢰를 잃었다. 천하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시대가 이미 '무인의 계절'에서 '정치의 계절'로 변했다고 판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재정과 민정에 밝은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것이 반사적으로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반감은 단순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의 독립성을 빼앗아 중앙정부의 전제화를 시도하려는 문관파에 대해, 중앙정부에는 복종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무장파의 반목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반감을 품었던 무장파 장수들과 접촉하며 공공연히 그들을 옹호했다. 무장파들은 조선 출병에 비판적인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당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륙침략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해진 히데요시가 1598년 8월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5대 원로에게 맡기고 드디어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5대 원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5명의 행정관이 서정을 집행하고, 그 중간에 3명의 주로(中老)가 양자간의 조종을 맡았다.
이처럼 5명의 원로가 정치의 최고 결정기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 등이 추진하려던 중앙정부의 전제정치 체제 확립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합의제라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이에야스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그는 최대의 영지와 최강의 군사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그의 기량과 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에야스와 5대 원로라는 관계가 생겼다. 물론 5대 원로라고는 해도 이에야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이에뿐이고 그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 따라서 합의 정치의 내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미쓰나리의 대립관계였다.
겨우 유지되고 있던 균형상태는 1599년 3월에 이르러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던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이른바 7인방이 미쓰나리를 죽이려 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놀랍게도 후시미(伏見)로 도망하여 적대시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도시이에가 죽고 그 배후의 실력자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중앙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利長)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영지로 내려갔다.
이에야스의 변신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또는 이에야스의 정권장악을 암암리에 승인하고 중앙에서 멀어지기 위해, 등등.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후시미 성을 둘째 아들 히데야스(秀康)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후시미와 오사카 두 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조선 출병을 면하여 경제력도 소모시키지 않고 착실히 영지 경영에 진력하여 실력을 축적한 그는 중앙무대를 지키며 천하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4대 원로와 미쓰나리가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뒤 이에야스는 거의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미쓰나리 편이면서도 자기와 은밀히 뜻을 통하고 있던 행정관인 나가모리를 이용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정보 제공을 의뢰받은 그는 충성을 나타내려고 도시나가가 모반의 기색을 보인다고 밀고했다. 결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가 계속 정보를 재촉하는 바람에 확증도 없이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서는 정보의 확실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시나가 일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그의 막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금되었다. 이어서 도시나가와, 그의 편을 들었다는 다다오키에 대해 토벌군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깜짝 놀란 다다오키는 곧 상경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전혀 반의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한편 도시나가에 대해서도 극구 변명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오키의 성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출병할 수는 없어, 양쪽이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두 사람 모두 싸우지도 않고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결과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발화점을 찾았다. 그러나 도시나가 사건으로 모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출병할 구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좋은 구실이 생겼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會津)에 옮겨진 5대 원로의 하나인 가게카쓰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새 영지 정비를 이유로 돌아갔던 그는 서둘러 성채를 수축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가 하면 병력을 증강시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이것을 안 이에야스는 사자를 보내 그의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게카쓰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며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는 그 강경한 태도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는 아이즈 토벌을 결심하고 6월16일에 오사카를 떠나 후시미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8일에는 61세의 노장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불과 2000의 군사를 주어 성을 지키게 하고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 천천히 행군하던 그는 7월2일 에도에 도착해 20일이나 성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이즈로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오사카에 있었다. 아이즈 토벌이 목적이라면 항상 과감 신속하게 행동하는 이에야스가 이처럼 느긋하게 작전을 전개할 리 없다.
미쓰나리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미쓰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수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출동한 것을 기회로 데루모토를 오사카에 입성케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후시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토타다에게 소수의 병력으로 후시미 성을 수비케 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석(捨石)' 작전이었다. 모토타다의 희생으로 그는 비로소 미쓰나리를 토벌하는 대의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토벌의 결심을 밝히고 에도를 출발했다. 동시에 동북 지방에 있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도 서진(西進)을 명했다.
패권의 향방
이에야스의 본대가 오가키(大桓) 성 서북쪽의 아카사카(赤坂)에 포진한 것은 9월14일 아침이었다. 그때 이미 오가키 성에는 미쓰나리를 위시하여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포진하고 있고, 아카사키 서남쪽 구리하라(栗原)에는 조소카베 치카모리,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나가쓰카 마사이에(長束政家), 다시 그 서쪽의 난구(南宮) 산에는 기쓰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지키고 있었다.
즉 도쿠가와 군은 동서로부터 협공을 받는 셈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동군은 10만, 미쓰나리의 서군은 8만 5000. 그러나 여기에 오사카에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가 참전하면 피아의 병력은 역전된다. 데루모토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성을 공격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보급로가 끊기면 혼성부대이기 때문에 내부 붕괴가 일어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적을 성에서 끌어내 야전을 벌이는 단기전(短期戰)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전군에 서진을 명했다. 오가키 성을 묵살하고 직접 오사카 성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사방에 첩자를 보내 적측에 오사카 진격 정보를 흘렸다.
적은 여기에 말려들었다. 미쓰나리는 성을 나와 나카센도(中山道)와 호쿠리쿠(北陸) 가도의 분기점인 세키가하라(關原)에 진입했다. 동군의 전진을 막으려는 작전이었다.
양군의 전투는 9월15일 아침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동군의 선봉 다다요시, 마사노리 등이 돌격을 개시하고, 서군의 선봉 히데이에가 공격해 나왔다. 이어서 우익과 좌익이 가세한 가운데 약 10일에 걸쳐 난투가 벌어졌다.
오전 11시경에 미쓰나리의 진지에서 봉화가 올랐다. 마쓰오(松尾) 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난구 산의 히로이에, 히데모토 등에게 미리 약속했던 대로 돌격을 명하는 신호였다. 히데아키가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히로이에 등이 배후를 찌르면 서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양쪽 모두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오경에 이번에는 이에야스 진영에서 마쓰오 산을 향해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약속대로 속히 내응하라는 독촉의 사격이었다. 히데아키는 그때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에 겁을 먹고 산에서 내려와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의 배신은 전황의 추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서군의 완패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미쓰나리는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서군의 장수들도 목이 잘리거나 자살했다. 이 전투는 8만 5000의 서군 중에서 무려 5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배신자를 내고 끝을 맺었다. 바로 이 전투가 일본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라고 일컬어 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
그러나 이에야스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아직 오사카에 남아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에 대한 처리였다. 여기서 그는 '승리는 5부를 최선으로 하고 10부를 최악으로 한다'는 신겐의 병법을 상기했다. 동군에 내응한 모리의 친척 히로이에와 나가마사 등을 오사카에 보내 데루모토를 설득하게 했다. 데루모토 역시 싸움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영지의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오사카에서 순순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야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사카 성에 개선한 것은 9월27일,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아카사카로 군사를 이동시켰을 때 그는 자신만만하게, "이제 야전에 있어서 나를 능가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호언했다고 한다.
확실히 그는 미카타가하라에서 신겐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본 후 그의 전법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신겐이 죽은 후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 전술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야전보다도 평화시의 통치와 지배에서 더 뛰어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구상하는 도쿠가와 정권 영구화 전략은 '농민들을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민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양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으로 바치게 하여 재물이 남지 않도록,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라는 의미다. 이것은 농민뿐 아니라 공경과 다이묘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한 정책이었다.
이에야스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히데요시가 배치했던 다이묘들의 영지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었다. 첫째 대상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수격이던 데루모토였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입성 때 그에게 영지의 현상유지를 약속했었지만, 그가 미쓰나리 등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20만 석의 영지 중에서 83만 석을 삭감했다.
원래는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할복을 명해야 할 것이지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고 8개 영지 중에서 두 곳을 준 것이다.
이에야스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데루모토가 살 수 없게, 그러나 죽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데루모토에 버금가는 강자였던 가게카쓰에 대한 처분도 가혹하여 120만 석 중에서 고메자와(米澤)의 30만 석을 제외하고 아이즈 지방의 90만 석을 전부 몰수했다. 그리고 5대 원로 중 하나로 서군의 부원수격인 히데이에는 57만 석을 모두 몰수당했다.
다이묘의 영지 3분의 1회수
5명의 행정관 중에서 나가마사는 동군편이었으므로 처분과 관계가 없었다. 마에다 겐이(前田玄以)는 거사에 참가하지 않아 무사했다. 그러나 그 밖에 미쓰나리, 마사이에의 영지는 모두 회수되고, 나가모리는 내통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20만 석을 빼앗긴 뒤 부자가 유폐됐다.
이렇게 해서 서군에 속했던 87명의 다이묘가 영지를 몰수당했는데 그 총계가 640만 석에 달했다. 당시 전국의 다이묘가 소유했던 영지는 모두 1800만 석이었다고 한다. 3분의 1 이상의 영지가 강제로 회수당한 것이 된다.
도요토미 가문만은 전투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가 끝난 시점에 그 영지는 200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줄었다. 도요토미 가문에서는 영지에 직접 대관(代官)을 보내 통치하는 경우가 적었다. 각지의 다이묘에게 맡겨 지배와 세납의 징수를 대행시킨 것이다. 때문에 그 영지를 맡아보고 있던 다이묘들이 제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봉되자 그 토지와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끊어져 직접 지배하던 65만 석만 남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가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는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후다이 가신들의 배치였다. 그들을 본거지인 간토와 종래 정치의 중심지인 교토 오사카를 연결하는 지역 등 요충지에 폭넓게 배치하여, 2중 3중의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이묘의 대량생산이 불가피했다. 이에야스는 39명이던 후다이 다이묘를 일약 63명으로 증원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로 발탁된 사람은 180명이었는데 그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그중 26명이 간토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미쓰나리의 거성이던 사와야마에는 소위 4천왕(天王)의 한 사람인 이이 나오마사(伊井直政)를, 이세에도 역시 4천왕의 하나인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을 보내 도요토미 세력의 준동을 막게 했다.
또 오와리에는 4남인 다다요시, 에치젠(越前)에는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미토(水戶)에는 5남인 다케다 노부요시를 배치하여 도사마(外樣) 다이묘,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등용된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를 위협했다.
이에야스는 동군을 도와 공을 세운 도사마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과감히 배려했다. 5대 원로 중에서 유일하게 동군에 가담한 도시나가는 83만 석에서 119만 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58만 석에서 60만 석,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는 18만 석에서 60만 석,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는 24만 석에서 57만 석 등 대폭적인 가자(加資)가 이루어졌다.
절묘한 가신의 배치
신상필벌을 분명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전쟁 이래 도요토미 가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그들에 대해, 이를 보충하고도 남는 보너스를 주었던 것이다. 도사마 다이묘들이 이에야스에게 더욱 신뢰를 보냈을 것은 당연하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의식하고 일부러 이런 선심을 썼던 것이다. 천하 제패를 목전에 둔 이에야스의 회유정책이 한층 더 노련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사마 다이묘들의 새 영지는 모두 주코쿠와 시코쿠 등 동북지방에 국한되고 요충지에는 한 사람도 배치하지 않았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비록 녹봉은 적었으나 막료에 포함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도사마 다이묘는 녹봉은 많았지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권력구조를 구축해 나갔다.
다음으로 직할지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야스가 직할지로 삼은 것은 금은이 산출되는 가이, 사도(佐渡), 이즈(伊豆)와 건설자재의 보고인 신슈(信州)를 비롯하여 교토, 후시미, 사카이, 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만, 전국 각지의 군사적 거점, 정치 경제적 중심지, 교통상의 요지 등으로 약 250만 석에 이르렀다. 특히 금은 산지의 직접 재배는 이에야스의 오랜 염원이었는데, 그것이 실현됨으로써 1602년 이후 금은의 생산량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때의 다이묘가 전국시대의 다이묘와 크게 다른 점은 중앙정권에 의해 그 영지가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는 설사 멸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영지가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때의 다이묘는 전국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영지와의 결합이 약했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권의 힘이 전국의 토지와 백성에게 침투한 것이 된다.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수많은 다이묘의 영지를 몰수하고 이를 재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중앙정권의 군사 통수권을 장악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중앙정권에서 주권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그때까지 이에야스도 비록 그 영지는 압도적으로 넓었지만 다른 다이묘와 동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다이묘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출범
중앙정권의 주권자로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바쿠후를 개설한 그는 에도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를 확장하고 새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이 공사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성보다는 영지의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그의 실리적인 정신에 따라 연기되고 그후 10여 년 동안은 축성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에도 성 축성은 1604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배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0척의 배가 완성되고, 이 배가 100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두 개씩 실어 이즈로 운반했다.
목재도 간토를 비롯하여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의 산지에서 벌채했다. 성벽에 바를 석회는 에도 서쪽의 오소키(小曾木)와 나리키(成木) 등 두 마을에 명하여 석회암을 태워 만들게 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606년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설계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담당하고 여기에 이에야스가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2년 후 드디어 일본에서 최고라고 평가되는 덴슈가쿠(天守閣)를 위시한 본성과 제2, 제3의 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1657년 정월의 큰 화재로 거의 불타고, 덴슈가쿠는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이 미증유의 대공사는 모두 다이묘, 그 중에서도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가자된 70명에 달하는 도사마 다이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다이묘는 자기 영지에서 1000석당 1명의 비율로 농민을 징발하여 에도에 데려왔다. 그로 인해 다이묘들은 만성적이고 과중한 부역을 할당받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영지의 재정이 핍박하여 사카이나 교토의 상인들로부터 빚을 지는 자도 속출했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란 이에야스의 정책이 이처럼 과도한 부담의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에도 성 공사와 함께 슨푸와 나고야 성의 축성도 병행하여 다이묘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나고야 성 공사 때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공을 인정받아 무려 30만 석이나 가자된 마사노리가 거듭되는 부담에 비명을 지르며, "이러다가는 재정이 파탄나겠다. 에도 성이라면 몰라도 하찮은 나고야 성에까지 우리를 동원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그것을 듣고 같은 도사마 다이묘인 기요마사가 말했다. "부역이 싫거든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가 대답을 않고 있자 기요마사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아무 불평도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어서 공사를 끝내고 쉬도록 하세"라고 말하며 인부들에게 갔다고 한다.
오고쇼(大御所)와 쇼군
아무리 부역이 고통스러워도 기요마사나 마사노리 같은, 히데요시가 키운 맹장들조차도 감히 반항할 수 없던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말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세이이다이쇼군 직을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재직한 기간은 겨우 2년 4개월이었다. 히데요시라면 어마어마한 지위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실리, 즉 그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1선에서 물러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조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측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히데요리 주변, 특히 생모인 요도(淀) 부인 일파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직후 손녀인 센히메(千姬)를 히데요리에 출가시킨 것이 그 근거였다. 그들은 이것이 차기 쇼군의 자리를 히데요리에게 물려주기 위한 사전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도사마 다이묘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쇼군이 교체되었으니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히데요리에게는 더 이상 정권이 돌아올 희망이 없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이 이어받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쇼군 승계는 이런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요도 부인은 분노했으나 히데타다의 제2대 쇼군 취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방 다이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 교체 후 1607년에 이에야스는 슨푸로 옮겨 '오고쇼(大御所)'라 불리게 되었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타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리모컨으로 정치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정치적인 실권자인 오고쇼와 중앙정권의 법적 주권자인 쇼군에 의한 이원정치(二元政治)가 행해지게 되었다.
2元 정치 체제
이에 따라 도사마 다이묘는 에도의 히데타다와 슨푸의 이에야스로부터 2중으로 체크당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보이려 했다. 다이묘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도로 올라와 처자와 중신들을 인질로 바쳤다. 토목공사의 적극적 참여도 바로 그 엄중한 체크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면서 미카와 시대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중요한 일을 했던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康政),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등 이른바 이에야스의 4천왕은 정치의 중추에서 물러가고, 그 대신 오카자키 시대 이래 후다이의 노신으로서 고난을 같이한 오쿠보 다다치카(忠隣)가 노신의 필두가 되었다. 사카이 다다쓰구와 성은 같으나 역시 오래 전부터 중신이던 사카이 다다요(忠世)와 그의 숙부 다다토시(忠利)도 각각 노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함께 히데타다의 유년시절부터 후견인이던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안도 시게노부(安藤重信), 아오야마 다다나리(靑山忠成) 등도 노신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다쓰구나 다다치카에 비하면 훨씬 나중에 등용된 다이묘다.
이와 같이 이에야스 시대의 막료 상층부가 교체되고 일찍부터 히데타다 측근에 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2대 쇼군의 막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 이에야스는 가장 신임하는 수완가 마사노부를 가담시켰다. 마사노부는 리모트 컨트롤로서 쇼군을 조정하며 이원정치의 요체가 되었던 것이다.
쇼군 휘하의 인적 구성이 이상과 같은데 비해 슨푸는 어떠했을까. 우선 미카와 이래의 원로는 한 사람도 없었고 가장 핵심 인물은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 마사스미이고 그 밑에 나루세 마사나리(成瀨正成), 안도 나오쓰구(安藤直次), 다케코시 마사노부(竹腰正信) 등이 있었다. 그들은 후에 요시나오(義直), 요리노부(賴宣) 등 이에야스의 아들 밑에서 중신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마음대로 통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의 영지에도 자신의 지시가 반영되도록 자기가 키운 정치가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에야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즉 승려로는 덴카이(天海), 유학자로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재무관료로는 오쿠보 나가야스(長安), 그리고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郞次郞)와 영국인인 윌리엄 애덤스 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슨푸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의 측근 그룹으로 활약했다.
이에야스는 경험을 통해 이원정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1591년에 간파구 직을 조카인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로 실권을 쥐고 이원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1595년 히데쓰구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자결을 명령받아 그와 처첩, 자식 등 30여 명이 무참히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후계자로 3男을 택한 이유
이에야스가 쇼군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히데요시의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바쿠후의 성립 등 대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건의 기억이 이에야스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 없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으면서도 굳이 이원정치를 감행한 것은 절대로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와 히데쓰구는 숙질간이므로, 나중에 히데요시에게서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는 것이 히데쓰구의 파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친아들이므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원만할 수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이에야스는 맏아들인 노부히데를 자결시키는 통한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에야스가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한 데는 친아들이란 점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 3남인 히데타다, 4남인 다다요시 세 사람이었다. 중신들과 상의한 결과 다다요시는 후보에서 제외되고 남은 두 사람 중에서 택하기로 했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은, 그는 무용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강하므로 쇼군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데타다를 지지하는 쪽은, '지금은 무(武)로써 천하를 위압하기보다는 문(文)을 장려하고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히데타다 공은 효심이 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히데야스의 결단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그가 후시미 성에서 승마를 하고 있을 때 항상 그를 수행하던 말구종이 따라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것을 본 히데야스는 불끈 성을 내고, 하천한 자가 무엄한 짓을 한다며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은 그 일을 예시하면서 히데야스 공이야말로 용기와 결단성이 있는 재목이라고 추천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만일 히데타다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중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에야스가 다시 말했다.
"히데타다라면 아마 그를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두 마디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처럼 두 아들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결국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과격하고 기민한 성격은 이에야스가 행하려는 이원정치에는 방해가 된다. 히데야스는 결코 이에야스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할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10년 전에 있었던 히데쓰구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이에야스가 히데쓰구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바쿠후(幕府)의 고자세
지배와 통치의 요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앞서 미카와 시대에 이에야스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잇코슈의 거점을 소탕한 것도 결국은 신도들이 그의 통제에 불복하고 외적과 결탁하여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바쿠후를 개설함에 있어 모든 세력, 즉 다이묘, 사찰과 신사, 조정, 공경 등의 행동에 법적인 제한을 가하고 이를 탄압했다.
이에야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조정에 대한 간섭이었다. 당시 조정은 비록 실권은 없이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나 국민에게 작용하는 그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므로 바쿠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정에 대한 간섭이 불가피했다.
그 첫 시도가 1611년에 공포한 3개조의 법령이다. 이것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인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정권이란 점을 조정으로 하여금 인정케 하는 아주 우회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613년에 이르러 새로 5개조에 이르는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간섭을 강화했다.
즉 조정에 출사하는 자로서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유형에 처한다, 주야의 근무를 게을리 하거나 공연히 거리를 배회하고 도박을 하는 등 행실이 나쁜 자는 유형에 처하며, 이를 바쿠후가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져 이러한 금령(禁令)이 나온 것이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구실로 조정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어서 1615년에는 '궁전 및 공가제법도'를 공표하여 천황과 조정의 생활 전반에 대해 법적인 규제를 가했다. 우선 제1조에 천황은 모든 일에 앞서 학문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천황의 행동을 법령으로 규제했다. 그리고 섭정이나 대신은 적임자에 한하여 임명하며 이 적임자는 노년이 되어도 사임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그 적임자를 바쿠후가 판단한다는 함축성이 개입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후 고관의 임명에는 바쿠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쿠후는 조정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일일이 규제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조문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간섭하였다. 천황과 조정의 자유의사를 극도로 속박함으로써 바쿠후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다.
다이묘에 관한 법령으로는 1611년 바쿠후가 다이묘들에게 내린 '무가(武家) 제법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쿠후와 다이묘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영지, 군역, 공납에 대해서는 거의 규정하지 않고, 대부분이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질서 파괴 행동을 엄단하는 금지 조항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도를 어기는 자는 영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신 중에 반역자나 살인자로 지목된 자가 있으면 추방해야 한다. 성을 보수할 때는 반드시 신고하고 신축은 엄히 금지한다. 이웃 영지에서 도당을 결성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혼인하는 것을 금지한다 등이다.
사찰에 대해 노부나가는 무력을 행사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히데요시는 불당을 짓고 탑을 세우는 등 부흥시켜 가면서 한편으로는 토지조사와 무기 회수 등을 펼쳐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썼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확립한 정치권력과 사찰의 관계를 법률과 제도를 통해 굳혀 나갔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사원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발표한 것은 1665년이었으나 이에 앞서 1615년에 각 종파에 대해 개별적으로 법령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법령을 통해 바쿠후가 강조한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승려에 대한 학문의 장려였다. 학문 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사찰에 있지 못하게 할 것, 주지나 고위 승직자는 학덕이 높은 자에 국한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는 승려의 관심을 학문에 집중시켜 사찰의 세속적인 세력확대를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본사와 말사의 제도 확립이었다. 즉 불교의 각 종파 모두가 본사를 정하고 다른 사원은 여기에 종속된 말사로서 본사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바쿠후는 본사만 확실히 장악하면 그 종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셋째, 승직 임명에 있어서 조정의 권한을 제한한 일이다. 이러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후에 천황이 발한 칙령을 바쿠후가 무효화하는 일이 많아 천황이 분노하여 양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다시 14년간의 인내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히데요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사실상 지방의 한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 앞서 히데요시에게 직속되었던 무장들은 슨푸나 에도로 올 때마다 은밀히 오사카에 들러 히데요리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에야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로 도요토미 가문과 유력한 도사마 다이묘가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실직한 무사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패전으로 실직한 무사는 전국에 걸쳐 수십 만, 대부분은 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므로 다시 난세가 오기를 바라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실직 무사를 위시하여 현상에 불만은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적인 세력과 반항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한다면, 창설기에 있는 도쿠가와 정권은 토대가 흔들려 붕괴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는 이에야스로서는 반란의 진원지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려 14년이나 기다리다가 오사카 쪽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1605년 쇼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을 때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히데요리에게, 상경하여 새로운 쇼군에게 복종하는 예를 드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사카 쪽이 거부하자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 슨푸 성 수축공사 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인근의 다이묘들과 똑같이 그에게도 부역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바쿠후의 통치권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사카 쪽에서는 크게 노하여 5대 원로의 하나인 도시나가에게 부역의 철회를 주선하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1611년 3월,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니조(二條) 성으로 불렀다. 이때도 오사카 쪽에서는 분개하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요마사, 요시나가 등이 중간에 나서 '거듭되는 항명은 이에야스에게 처벌의 구실을 준다'고 충고해 겨우 히데요리의 상경이 이루어졌다.
니조 성의 회견으로 히데요리를 형식적으로나마 복종시킨 이에야스는 상경한 다이묘들에게 3개 조항으로 된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여기에는 통제를 강화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후에 확대되어 앞서 말한 '무가 제법도'라는 법령이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폈다. 당시 오사카 성에는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가 비축되어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일컫는 오사카 성이 그 엄청난 금을 가지고 저항한다면, 이쪽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권하여 각지의 사찰을 재건, 수축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라고 설득했다.
그 제의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에나 반대하던 요도 부인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타이코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를 격려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부터 착수하여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났다. 그동안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되어, 친동생인 히데타다 부인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에 도요토미 가문이 키운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요시나가, 나가마사, 요시하루, 토시나가 등 유력한 다이묘들이 병으로 쓰러졌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팔다리가 잘린 상태가 되었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군신풍락(君臣豊樂), 자손은창(子孫殷昌)'이라는 여덟 자와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최후의 명연기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에야스는 매일같이 학자를 불러 특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간단한 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학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73세의 생애를 통해 터득한 연기를 펼쳐 보였다. 그는 크게 노하여, 아니 사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도요토미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도요토미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나날이 사태가 긴박해지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며 갖은 고초를 겪던 오다 노부카쓰도 교토의 류안(龍安) 사로 은퇴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고문격이던 그도 오사카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어서 무장의 하나인 이시카와 사타마사(石川貞政)도 물러가고 남은 것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 강경파 무장들뿐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주전파는 전투를 결의하고 사방으로 지원을 청하는 서신과 사자를 보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는 아끼던 명검을 보냈으나 그대로 돌아왔고, 마사나리는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이에마사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은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포위전의 1인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도 30만의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채 속수무책이던 적이 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동원한 것은 총포나 활이 아니라 내응과 유인 등 모략전이었다.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
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그의 소실 아챠(阿茶) 부인에게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오고쇼님의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속은 요도 부인
도요토미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이에야스도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은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이보다 더 그의 처세법을 정확히 표현한 것도 없다.
여기 언급된 많은 사항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그 모두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지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 사람을 일본 역사상의 3대 영웅이라 부른다. 사실 일본을 통일한 고대의 전설적인 영웅을 제외하면 이 세 사람이 일본 역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힘으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 바쿠후 말기의 유신 때에도 많은 영웅이 있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는 나라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야 겨우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마쿠라(鎌倉) 바쿠후를 연 미나모토(源)씨는 간토 실력자의 조종을 받았고, 무로마치(室町) 바쿠후의 아시카가(足利)씨도 지방의 다이묘들이 지지하지 않았다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지배자였다.
이들에 비해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독력으로 정권을 창출했다. 이 세 사람은 릴레이식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천하를 장악했으나, 저마다 독자적인 창립자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대책 하나만 보아도 이를 보호한 노부나가, 금교(禁敎) 정책을 쓰면서도 무역의 이익을 추구한 히데요시, 금교와 무역을 제한한 이에야스 등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부나가는 혁명적인 천재였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선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파격적인 발상만으로 난세를 헤쳐나갔다. 그에게는 군사(軍師)도 없었다.
특유의 판단으로 남이 생각지도 못한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고 이를 모두 성공시킴으로써 라이벌의 의표를 찔러 천하통일의 길을 앞당겼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인심 장악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내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발굴한 농민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부하로 종횡무진 지략과 권모술수를 발휘했다. 야전의 경험을 쌓아, 무장한 군단의 이동능력이 하루 50리에 불과하던 시절에 무려 200리나 진격하는 전격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허를 찌른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무장으로도 귀재지만 정치면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전하고도 뛰어난 정치력으로 그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만년의 히데요시는 발전하는 국운에 발맞추어 이를 경영할 역량이 부족했다. 성격적인 결함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 침략이란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가 자신의 파멸과 정권의 몰락을 동시에 초래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무슨 일에나 신중을 기하고 판단하는 인물이었다. 야전의 제일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용맹과 결속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미카와 무사의 뒷받침이 있는데도 히데요시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에야스의 강점이 있었다. 인내가 그것이다. 인내는 굴종과는 다르다. 자기 제어 능력이고 그랜드 디자인을 지속하는 의지다.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내다보는 안목이다. 일단 기회를 포착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행동력의 밑거름이다.
이 세 사람의 인물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노부나가는 때려죽이고, 히데요시는 울도록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두견새'를 '상황'이란 말로 바꾸어 놓으면 더 이해하기 쉽다. 즉 노부나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럴 상황이 아니라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있다. 히데요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략을 짜내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오로지 기다리면서 자연적으로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면 '무단'의 노부나가, '지모'의 히데요시, '인내'의 이에야스가 된다.
적을 쓰러뜨리고 난세를 평정하여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마무리하는 데는 남다른 지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천재형인 무단적 인간이나 지모의 인간으로는 안정된 천하를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의 무단과 지모는 수습된 혼란을 되살아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얘기를 한다. 창업자에게는 노부나가형의 인간이 적합하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경쟁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기업의 기초가 다져졌을 때 히데요시형의 인간이 나오면 조직이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든 기업에는 노부나가형이나 히데요시형의 리더는 필요치 않다. 그들의 모험심이 조직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슬기롭게 조정하는 이에야스형의 인간이 활약할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그러한 인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