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전통

우표속의 우리역사

바보처럼1 2008. 5. 17. 06:32
[귀한자료] 우표속의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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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표속의 우리역사


                                    고 조 선 건국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전하나 실제로는 기원전 10세기∼ 7세기에 건국된 것으로 보인다.



                                 광 개 토 대 왕

고구려의 제 19대 왕(재위 391-413년). 국토를 크게 넓혔으며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일컬어진다



                           을지문덕의 살 수 대 첩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명장으로 영양왕 23년(612)에 수나라 양제의 113만 대군을 살수(오늘날의 청천강)에서 격파했다. '을지'라는 성과 관련하여 그를 몽고계 귀화인으로 보는 설이있다



                              화 랑 정 신(세속오계)

원광이 신라의 화랑으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내린 계율로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 그것이다.


                              신라의 당군 격퇴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대당 전쟁을 벌이게 된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대승을 통해 7년 나당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신라의 자주적인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해상왕 장 보 고

통일신라 시대의 장군. 당나라에서 활동하다가 신라로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아 828년(흥덕왕 3년)
1만의 군사로 청해진을 세웠다. 그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신라와 당·일본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현재 청해진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강감찬의 귀 주 대 첩

강감찬(948∼1031)은 고려의 명장으로 현종 9년(1018)에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을 고려군
20만을 이끌고 적의 후면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과 거 제 도
과거는 능력에 따른 관리 등용 제도로 고려 958년 (광종 9)에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실시되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크게 제술과와 명경과, 잡과, 승과로 불류할 수 있으며, 특히 한당 유학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와는 달리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시험인 명경과 보다는 유교 경전에 입각한 여러 가지 글을 짓는
시험인 제술과를 중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무과가 추가되고 승과가 폐지되어 고려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팔 만 대 장 경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의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염원에서 목판에 불교경전을 새긴 대장경으로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금속활자 발명

금속활자인쇄는 목판의 단점을 보완하여 나타난 인쇄술이다.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최초의 책은 고려 1234년 (고종 21년)에 강화도에서 인쇄한 『상정고금예문』이다.
현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은 1377년 (우왕 3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로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그러나 고려는 먹과 종이의 우수성 때문에 기계장치를
이용한 인쇄술로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그 일은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맡게 된다.



                               안향의 성리학 전래

안향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하고 교육에 힘쓴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그는 몽고의 간섭, 정국의 불안정, 불교의 부패 등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단순히 성리학의 전래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교육하여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중종 때의 풍기 군수 주세붕이 영주에 그를 모시는 서원을 세우고
이황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