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퇴계 이 황이 군수로 이곳에 머물 때 중국의 소상팔경보다 낫다며 감탄했다는 단양 땅에 들자 마음이 한결 삼선암 계곡처럼
맑아진다. 초록빛 들판과 산자락을 에도는 굽이진 계곡과 나무와 풀들. 오랜만에 내린 단비는 가뭄에 시달리던 들판을 화들짝 깨우고, 덩달아 논밭을
향한 농부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삼선암 계곡의 비경이 끝나는 곳에 자리한, 단성면 벌천리 궁터골이라는 곳. 뒤로는
금강산의 한 자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도락산이, 앞에는 삼선암 계곡으로 빠지는 단양천 맑은 물길이, 단양천을 건너면 곧 바로 월악산
자락의 비경이 첩첩이 펼쳐진 곳이다.
마을에 이르러 우리는 먼저 이 땅의 마지막 초막 농사꾼인 고 황용 할아버지를 찾았다. 마을 들머리에 자리한 그이네 집으로
들어서 헛기침을 몇 번 해대자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신 듯 황급히 일어나 낯선 이방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번이 네 번째다. 2년 전 우연히 궁터골에서 초막을 짓고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단양에 올 때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뵌 적이 있다. "누구시유?" 지난해 이맘때 찾아왔던 사람이라고 하자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해보다 할아버지의 주름은 골이 더
깊어진 듯했다. 하긴 할아버지의 나이도 올해로 아흔 살이 되었다. "초막엔 이제 안 나가세요?" 라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가 보긴 가 봐야쥬.
근데 인젠 다리에 힘이 없어서 가기가 쉽지 않어유." 한다. "인제 낼 모레 팥 심굴 때나 가 볼까. 안죽은(아직은) 밭갈이두 안 했어유.
할머이가 와야 돼유. 지금 인천 딸네 집에 갔는데, 할머이가 와야 사람두 사구, 밭갈이두 하쥬. 아이구 여태 가물러서 깨가 인제 싹이 나잖어유.
저것두 심어야쥬." 할아버지네가 부치는 초막밭은 마을에서 위쪽으로 한 오리쯤 단양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그이에 따르면 올해는
아직까지 초막밭까지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무너지지는 않았을까요?" 뜻하지 않은 질문에 그이는 걱정이 된다는 듯, "그러게유?"
한다.
 할아버지의
걱정도 덜어드릴 겸 우리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초막밭으로 향했다. 초막밭에 이르러 보니 초막은 밭가에 그대로 있었다. "아이구 막이 이래 푹
까라앉았네유. 집두 그렇구 막두 그래유.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이래 까라앉는걸유 뭐." 그이의 말대로 초막은 앞부분이 지난해보다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아쉬운 대로 그이는 내려앉은 이엉을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올리려 해 보았지만, 한번 흘러내린 이엉은 좀처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이는 초막 앞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오랜 가뭄으로 밭을 묵힌 탓인지 잡풀이 듬성듬성한 초막밭은 거의 묵정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초막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던 뽕나무는 가지마다 주렁주렁 까만 오디 열매를 달고 향긋한 냄새까지 풍겼다. 담배를 다 피운 할아버지가 뒤늦게 오디를
발견했는지, 초막 뒤로 돌아가 뽕나무 가지를 잡아당겨 오디 맛을 본다. "아! 달다. 달어유 아주. 이것 줌 먹어 봐유. 날이 가물러서 그런지
달어유 진짜." 지난 해 이맘때 초막을 찾았을 때는 할아버지가 들깨밭에 웃자란 잡초를 뽑고 계셨는데, 올해는 아직 밭갈이도 못한지라 가뭄이
야속하기도 하련만, 그이는 순진한 아이처럼 달디단 오디 맛에 그 야속함을 잊은 듯했다.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농막
초막이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비가림을 한 조그만 막집을 일컫는다. 하지만 보다 엄격히 말해 이곳 궁터골에 있는 막집은
농막 또는 밭집이라 해야 옳다. 초막이라 하면, 산막과 농막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며, 농사에 편리하도록 논밭 가까이에 지은 간단한 집을 따로
농막 또는 밭집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산막이 주로 산삼이나 약초를 캐거나 송이를 따기 위해 산 속에 지어졌다면, 농막은 말 그대로 농사를 위해
논밭가에 지어졌다. 궁터골 단양천 언저리 밭둑 한편에 자리 한 이 농막은 겉모양이 마치 옛 선사시대의 움집과 거의 비슷한 모양을 띠고
있다.
흔히 초가에서 지붕만 따로 싹둑 잘라
밭가에 둔 모양이랄까. 물론 그 크기에 있어서는 초가에 견줄 바가 아니다. 기껏해야 한 사람이 들어가 간신히 발을 뻗을 정도로 좁은 공간을 지닌
것이 바로 농막이요, 초막이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인 살림집이 아니다. 농막은 밭일을 하다 잠시 들어가 쉬거나 새참을 먹거나 밭일에 필요한
호미며 괭이며 낫 따위를 보관하는 곳이다. 할아버지가 이곳 벌천리에 들어와 둥지를 틀던 30여 년 전만 해도 마을 주변에는 서너 채의 초막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농촌에도
마을길이 넓어지고, 포장도로가 생겨나면서 초막은 더 이상 밭가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실 초막이란 것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논이나
밭가에 임시 막사처럼 잠시 머물 곳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굳이 초막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하고 빠른 시대가 된
것이다. 더욱이 농촌에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초막은 더 이상 농촌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아울러 면면이 이어져 온 초막의 역사도, 초막
농사꾼도 주변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비가 오면 막에 들어가구, 일하다
낮잠두 자구 그래유. 들어가 누워 있으면 아무 생각 없어유. 바댁이 바우가 돼 있어 시원하구, 여름엔 저 우에서 또 바람이 내리오니까
시원해유." 할아버지의 말이다. 그 밖에도 일하다 힘들 때나 새참을 먹을 때도 농막은 휴게실이자 주방이 된다. 또 농막은 밭일에 필요한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 노릇도 겸하고 있다. "호매나 낫 이런 거 이래 여기 놔 두구 가유. 안 훔쳐 가유. 왜 그런 말 있쥬. 쟁기 훔쳐 가면 그
쟁기로 사람 파묻게 된다구유. 호매두 그래유. 이거 가져가면 사람 파묻게 된다구 아무도 안 가져가유."
할아버지에 따르면 이 농막은 얼추
27년 전인 1974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앞면의 높이는 어른 키의 가슴께에 이르고, 뒷면은 2미터 정도로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전체
농막의 길이는 3미터가 조금 넘고, 너비는 2미터 안팎쯤 된다. 지붕은 흡사 초가 지붕과 별다를 바 없이 볏짚으로 이엉을 둘러쳤고, 지붕 위에는
"용굽새"라 부르는 용마름도 얹어 놓았다. 크기만 작을 뿐 영락없는 초가지붕이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 보니 주춧돌이나 대들보가 있을 리 없고,
대신 이엉을 받치기 위해 나무 말뚝을 기둥처럼 박아 놓았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로는 나뭇가지를 얽어 놓아 한껏 너스레 흉내를 냈다. 바닥은
다행히 파일 염려가 없는 커다란 넓적바위가 마치 평상처럼 자리하고 있어 자연적인 구들장노릇을 한다. 이 농막 아래로는 삼선암으로 이어지는 단양천
물길이 흘러, 농막에 앉아 있어도 마음을 적시는 시원한 개울물 소리가 사시사철 들려온다.
하지만 농막 아래로 흐르는 개울물이
때때로 초막밭을 뒤엎어놓을 때도 있다. "10여 년 전인가 그리유. 그전이는 저 앞이 말짱 논이었어유. 논이 예순네 다랭이나 됐쥬. 아이구유,
큰물이 나서 집채 같은 돌이 막 떠니리오구 저런 낭구 아람드리가 그냥 쿵쿵 내리오구. 집에 사램이 막 떠니리와 둘이나 죽구 정신없드래니까유.
그래 저 방곡에설라믄 사램 찾이러 내리오구, 아이구유, 말두 말어유. 원래넌 저 건네 산비알 있는 데만 개울이었어유. 저 앞에 자갈밭이 다
논이었어유. 논이 좋았쥬. 여기 있는 밭두 그전엔 논이었쥬. 물난리 난 뒤로 밭이 된 거쥬 뭐. 여기두 인제 맨 돌이유 돌." 지금 그이네
초막밭이 온통 돌투성이인 까닭도 그 때문이다.
본래 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건리라고 한다.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에 들어온 것은 30년이 조금 넘었는데,
당시 절땅이었던 논밭을 부쳐먹으며 벌천리에 둥지를 튼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절땅이었던 논밭은 어느새 할아버지의 땅으로
바뀌었고, 다시 그 가운데 일부는 홍수 때 자갈밭으로 변해버렸다. "젊어서 고상 많이 했어유. 배운 게 읎으니 일해 먹어야쥬 뭐. 호걸은
장호걸이요, 고상은 장고상이라구, 사는 게 그래유. 고상하는 사램은 늘 고상이유. 이래 일이래두 해야지 목구녕에 풀칠하쥬. 가만 있으면 못
읃어먹쥬. 인젠 눈두 어둡구 잘뵈키지두 않어유. 여기저기 담두 절리구. 인젠 늙어서 산에 가면 자꾸 엎어지구, 넘어지구 그래유. 아무케두 인젠
갈날이 가찹지, 살날은 얼마 안 남았어유. 큰아들눔 홍천에서 버리구, 같이 살던 아덜이 또 얼마 전에 사고로 갔어유. 으이구, 사는 게 이래유.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유."
초막밭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딱 한 번 눈시울을 적셨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이는 집에서 초막까지의 오리 남짓한 길을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초막밭 행차를 한번 하자면 큰맘 먹고 나서야만 한다. 그래도 그이는 곧 있을 밭갈이 때는 초막밭에 와서 손수 팥을 뿌릴
생각이란다. 그 곳에 정든 초막이 없었다면 진작에 발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일 없어 두유, 거 가서 누워 있으면 맴이 펜해유." 남들에겐
남루하고 하찮게 보일지도 모를 초막이지만, 그이에게는 또 다른 집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초막이 거의 사라진 우리 시대에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런 농막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마다 편리하고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우는 세상을 살면서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옛것을 지켜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그것을 지켜 가는 일 또한 그러할진대, 이제 할아버지가 떠나고
나면 초막을 지켜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막에 다녀와 홀로 툇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저 쓸쓸하기만 한데, 내 눈
속에는 그 쓸쓸한 모습 뒤로 그이가 평생 가꿔온 들깨며 팥이며, 옥수수 대궁이 자꾸만 일렁거리고 있었다.
옛날 흙집에서 옛날 생활방식으로 사는 할머니
고 황용 할아버지가 30여 년 동안 고집스럽게 초막을 지켜왔다면, 올해 여든세 살인 임 순심
할머니는 평생 옛날 흙집에서 옛날 생활방식을 지키며 살아온 할머니다. 궁터골 사람들은 그이를 "참 희한하게 사는 할머니"라 부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상하게 산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금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산다는 뜻인데, 요즈음 사람들 눈에는 할머니의 그런 삶이 희한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사는 흙집은 고 황용 할아버지 댁에서 다리가 놓인 도랑을 건너면 금세 가 닿는
거리에 있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흙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그이는 툇마루에 앉아 바가지에 담긴 열무인지 무 줄기인지를 다듬고 있었다. 여러 번
인기척을 해도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고개를 들며 화들짝 놀라신다. "집 구경 좀 왔어요." "집이 이래놔서 뭐이 구경할
게 있다구. 이게 30년두 넘은 집이유." 할머니의 양해를 구하고 집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이 집이 심상치가 않은 집이다. 멀리서 보기에 흙벽의
색깔이 아름다운 것은 둘째치고, 집의 구조가 막 지어놓은 막집은 아니었던 것이다. 30년이 넘는 흙집 치고는 정말 예술적으로 지은
집이다.
이 흙집의 모양새를 뜯어보면 이렇다. 앞에서 보면 기역자를 거꾸로 놓은 듯 골마루 같은 툇마루가
놓여 있고, 그 골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갈라져 있다. 방과 방을 나눈 골마루는 봉당 쪽으로 나와서는 여느 툇마루처럼 넓어져서
부엌과 안방과 건넌방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는 열린 구조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당 왼편에는 뒤주방(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과 사랑방이
이어진 한 칸짜리 사랑채가 들어서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사이에 두고 뒤뜨락에는 정말 아담하고 보기 좋은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또 그이네 흙집 곳곳에는 손때 묻은 옛 물건들이 아직도 그 쓰임을 다하고 있다. 골마루에
말려 있는 멍석은 얼마 뒤 고추를 널 때 쓸 것이고, 사랑채 마루에 놓인 둥구미에는 씨앗으로 남겨둔 팥이며 콩 따위가 담겨 있다. 그 밖에도
다래끼며 화로, 방안의 가구들도 그이가 시집올 때 가져온 옛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할머니의 성격은 마을에서 깨끗하기로 익히 소문이 나
있는데, 집안 구석구석을 보면 할머니가 얼마나 깨끗한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마당이나 뒤뜰까지 나뭇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 찾아볼 수 없고,
툇마루에는 티끌 하나 남아나는 법이 없다. 부엌에 걸린 세 개의 무쇠솥은 기름으로 하도 반질반질 닦아놓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들거린다. 자고
나면 쓸고 닦고, 쓸고 닦고, 또 돌아서면 쓸고 닦고, 쓸고 닦고 하므로 집안 구석구석 깨끗하지 않은 것이 외려
이상하다.
본래 그이가 사는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이었다고 한다. 시집을 와서 몇 년 뒤인 스물한 살
때 그이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왔단다. 물론 그때는 고생도 오막살이만큼이나 심했다. 그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아들이 이사를
가면서 지금의 흙집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궁터골에 사는 거개의 집은 초가집이었다. 그 옛날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뀐 것은
20여 년 전. "그때 지붕을 잘못 해놨어. 슬레뜨를 쪼각을 갖다가 똥강똥강 쪼개가지구 지붕을 해 노니 튼튼할 리가 있어. 얼마 전에 바람두
불구 비가 한번 와서는 슬레뜨가 저래 내려앉았어. 그러니 비가 새지. 저걸 곤치긴 곤쳐야 되는데, 곤쳐 줄 사람이 있어야지." 지붕을 올려다보니
슬레이트 조각이 두세 개쯤 내려앉았다.
"옛날에 여 우에 곤지실(건조실) 있던 거두 사람이 손을 안 보니 폭삭 넘어가버렸어.
내가 안죽까지(아직까지) 흙집에 사니까, 우리 아덜이 집수리 해 준다고 하는데, 내가 그냥 놔 두라 그랬어. 이 수리를 할라며는 뒷돈이 또
을마나 들겠어. 인제는 쫌 살다가 아들네루다 가야지 뭐. 그래도 안죽은 내가 건강해 논께 꿈지거리면서 밥이라두 낋여먹으니까, 이래 살 수 있는
거지 뭐. 여가 고향이구, 친구들두 있구 허니까. 젊어서는 내가 논도 20마지기나 부쳤는데, 아유, 지금은 못하지. 자식 낳아 서너 명 죽이고
아들 하나 있는 데, 저어 성남 가 살어. 아덜이 자꾸만 올러오라구 그러지. 근데 가서 있으께 며칠 만 있어두 깝깝해 못 있겠어. 여가
펜하지."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희한하게 사는 사람으로 부르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 다름 아닌
옛날 흙집에 사는 것도 그렇거니와 할머니가 일체 전기제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유일한 전기제품은 방안과 마루에 달려 있는
백열전구가 고작이다. 오래 전 아들이 갖다 준 냉장고는 비닐에 감긴 채 마루 한켠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고, 그 흔한 전기밥솥마저 쓰지 않을
뿐더러 당연히 있음직한 전화조차 아예 없다. "아이구, 전기제품은 내가 겁이 나니까, 손을 안 대잖어. 밥이야 냄비에다 해먹고, 화로에 된장찌개
같은 거 낋여 먹구, 그러면 되지 뭐 져울에는 어차피 낭구 때니까, 방 따숩지. 이렇게 사는 사람 있을까 몰라. 시방은 다 집 곤치고 전기제품
쓰고 살지." 한번은 한여름에도 불때서 밥 해먹는 할머니가 가여워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이 가스 레인지를 갖다 준 모양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용법도 모를 뿐더러 가스 값이 아까워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모셔놓았다고 한다.
때문에 한여름에도 그이는 아직 아궁이에 나무를 때고 산다. "아덜이 오면 장마 때 떠니리온 거 이런 거 주워다 주고, 또
산에 가서 내가 주워오기도 하구. 낭구 때는 게 좋어. 연탄 때면 그 연탄재를 또 어따가 버려. 그렇다구 지름 때는 거두 돈이 마이 들구.
그러니까 혼차 살면 서도 저래 낭굴 마이 해 놨지." 때마침 저녁때가 되어 할머니는 "낭구"를 한아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불편하지는
않느냐, 덥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불편할 게 뭐 있냐고 한다. "그럼 혼자 사는 건 적적하지 않으세요?" 역시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30년 넘게 혼차 살았는데, 적적할 게 뭐 있어요."
사실 30년 넘게 혼자 살았다는 것은 아들을 성남으로 보내고 산 세월이 30년이 넘었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한국전쟁 때 할아버지를 잃고, 서른 살에 홀몸이 되어 여태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50년 넘게 "과부댁"으로 살아온
셈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의 고생담이 오죽할까 마는 할머니는 그저 담담하게 "그때는 다 고생했쥬 뭐"라며 그 동안의 인생을 위로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리고, 흙집 할머니 집에서는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새삼 삶이 느꺼워져서 궁터골을 떠나는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샘이깊은물>
** 이제 이 글에 나오는 이 땅의 마지막 초막 노인은 볼 수가 없다. 초막도 사라졌고, 초막 노인도
이 땅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