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일기에 얽힌 이야기
이순신장군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정조가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를 만들도록 한 뒤였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든 편찬자가 난중일기라고 이름붙인 것이지 이 순신 장군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이 순신 장군은 그의 사후에 자신의
일기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남 아산시 소재 현충사의 유물전시관에 이순신장군 친필일기가 전시되고 있다.
이순신의 일기는 초서인지라 한문 전문가가 아니면 읽어내기가 어렵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난중일기초”는 당시
한학자들이 이순신의 초서일기를 해독하고 간추려 책자로 펴낸 것이다. 이 또한 한문이다. 시중에 나온 이 순신 일기 한글번역본 대부분은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하거나 노산 이은상의 한글번역본을 따랐기 때문에 제대로 한글로 번역된 이순신일기를 읽을 수
없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친필일기의 상당한 부분이 누락되거나
추가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든 신하들은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면서 왜 누락하거나 추가하였을까? 임금의 눈치를
본 것일까? 아니면, 편찬자 임의로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은 삭제하기도하고 추가도 한 걸까?
국보제 76호(이충무공
난중일기부 서간첩 임진장초)로 일괄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순신 친필 일기 7권 205매에 없는 기록이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에는 일부 있는
것으로 보아 덕수 이씨 종가에서 대대로 보관 중 친필일기 일부가 분실되었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서지학자.
한문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후과정을 사실대로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넘겨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1998년 이순신
장군의 400주기에 박 혜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런 사실을 알릴 목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며 펴낸 책이 “이순신의 일기”다. 현충사 관리소 시절,
자료관계로 가끔 통화 할 적마다 박 교수는 故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이용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따지고 보면 틀리거나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맹목적 찬양 일변도 이충무공 선양사업은 일부 국민을 식상하게 하여 원균의 새로운 부각 과
상대적으로 충무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연구조류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순신을 체제유지에 이용한 그 정권에 잘못이 있는
것이지 이순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1597년 9월15일 부하들에게 훈시한 유명한
必死則生 必生則死 귀절을 항간에서 즉자를 卽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국가기록유산의 원문텍스트에 따르면 則이 맞다. 이순신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불멸의 정신을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종종 원전을 확인하지 않고 태연히 잘못된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게 우리네 실정이다.
한글번역본 일기를 읽다가 1597년 4월1일 기록에서 이 순신의 인간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순신장군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겨우 사형을 면하고 4월1일 옥에서 나온 첫 소감이 너무도 짧다.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해서 땀이 몸을
적셨다는 고백에 오로지 공감하였다.
한번은 일기에 나오는 지명을 확인하려 현장에 간 적이 있다.
찾아간 곳은
1597년 4월 13일 이순신이 어머니의 시신을 영접한 곳인 게바위(蟹岩)였고,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다. 뱃길이 변하여
들이 되는 바람에 들길 옆에 자그만 돌로 된 표식만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고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한다.
게바위 위에 서서 삽교 방조제
쪽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새롭다.
인간 이순신의 생각과 느낌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쓴 일기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다른 나라 위인들 평전은 시중 서점에 숱하게 나와 있는데 제대로 된 이 순신 평전은 언제쯤 나올 것인가?
이 은상의 난중일기 한글번역본과 다른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다가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특히 주목한 것은 “1596년
9월12일 저물 무렵 무장에 이르러 여진과 잤다”는 부분이다.
가장 최근 간행된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 본(노 승석 옮김)에 의하면 여진이
계집종의 이름이라고 주가 붙었다. 아마도 여진은 관기가 아닌가 싶다.
임진왜란 중 도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전라도내 각
진영을 순시하고 있는 장군이라도 조선시대 풍속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이순신은 얼마나 정직한가!
그게
성웅 이순신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은상은 한글로 번역하면서 삭제한 걸가? 이순신은 28세 때 무과시험에 낙마하여 실격하고 1576년 2월,
32세 때 병과 제4등에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문과로도 성공할 만도 했으나
붓을 던지고 군인의 길을 택했다. 1566년 22세 되던 해부터 문과의 꿈을 접고 무과로 진출한 것은 장인 방진의 영향력을 받은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장인 방진은 무과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역임하였다.
현충사 경내에 방진의 묘소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당시 영의정을 지낸 동고 이준경이 중매를 섰다. 방진의 사람 보는 눈이 매 우 놀랍다. 몰락한 선비집안 셋째 아들인 이순신의 천품을 보고
발탁하여 외동딸을 맡기고 훈련시켜 불세출의 명장으로 키웠다.
현충사를 찾는 사람은 모름지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450년 전 아산고을 방화산 기슭에 대략 50호 가량의
농촌 마을이 있었다. 이순신은 서울서 태어나 소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외가인 아산 백암리 마을로 옮겨 성장한 가난한 청년이었다. 이곳에서 거의
10여 년간 청년 이순신은 선비로 수양하며 무예 공부에 오로지 전념하였다.
장인의 지도아래 병법공부며 말 타기며 활쏘기를 하다가 가끔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현충사 경내에서 광덕산을 바라보노라면 청정하고 굳센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청년 이순신이 수양하며
소일했던 1560~1570년대는 그
기상이 더 강했을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은1576년 12월,
32세에 초급장교로 발령받아 함경도 최 일선으로 떠난다. 이후 노량진에서 순국하기까지 공직자로서 일관된 생활자세는 아산의 방화산 기슭에서
청년시절 부단히 수련한 근기(根氣)에 바탕 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성역화 하기 전 기록 사진과 대조해
보면 지금의 현충사 경내 옛집은 너무 잘 복원하였다.
6~7십년대 전국적으로 성행한 성역화 사업의 모델이 현충사다. 그 당시 국력과 우리
의 문화재 보존과 활용 안목이 만든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이순신은 괴멸된 나라에서 7년이라는 장기에 걸쳐 온갖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여 나라를 구하였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를 덮을
해군 제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종군의
신세가 되어도 그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에 도가 있었던 것이다.
알게 되면 될 수록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간 이순신은 후손들이 어려울 때 힘을 얻도록 불후의 명문을 남겼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 이순신이기에 심금을 울리는
글이다.
문화재청 총무과 허영일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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