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명신’(新羅明神)을 자신의 신주로 모신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 출신 고승은 모두 네 명이다. 전교대사 최징(傳敎大師 最澄·사이초 767∼822)과 그의 직제자인 자각대사 원인(慈覺大師 圓仁·엔닌 794∼864), 지증대사 원진(智證大師 圓珍·엔진 814∼891), 그리고 원삼대사 양원(元三大師 良源·료겐 912∼985) 스님이 그들이다. 모두 일본 땅의 신라인 후손들이다.
일본 교토시 동북쪽의 명산 히에이산(848m) 일대가 장기간에 걸쳐 신라에서 건너 온 수많은 신라인이 번창했던 대규모 지역이라는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로부터 동해를 건너 이 고장으로 이주해 온 고대 신라인들은 모국 터주신을 이 고장에 모셔다 제사 지내며 풍년과 부귀다복한 인생을 기원했다.
이 고장에서 주목받는 것은 히에이산 ‘엔랴쿠지’ 사찰 ‘요가와중당’ 경내의 ‘신라명신’을 신주로 모시고 제사 지내는 ‘적산궁’(연재 제25회)이다. 이 적산궁이 선 것은 지금부터 1159년 전인 848년. 신라 흥덕왕(826∼836 재위) 당시부터 신무왕(839 재위)과 문성왕(839∼857 재위) 대에 이르기까지 청해진 대사 장보고(출생년 미상∼846)가 서해를 주름잡으며 중국 산둥성 ‘신라방’ 지역에서 신라 스님들의 ‘적산선원’을 이끌어주면서, 이 선원에서 활발하게 신불(神佛)을 함께 공양하며 터전을 닦았다. 또한 자각대사 원인 스님도 최징 스님의 직제자로서 스승을 모범하여 히에이산에다 ‘적산궁’을 세워 직접 신라명신을 제사 지냈다.
이곳 ‘오우미’ 출신인 지증대사 원진 스님도 15세 때 히에이산에 올라 엔랴쿠지 좌주며 전교대사 최징의 직제자였던 신라인 의진(義眞·기신 781∼833) 스님 밑에서 수업했다. 원진은 신라인 와케(和氣) 문중(‘신찬성씨록’ 815)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도 신라인인 사에키(佐伯)다. 더구나 원진 스님의 모친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라계 명승 홍법대사 공해(弘法大師 空海·구카이 774∼835)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사키 료슈(三崎良周) 교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으로 평가한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 1251년쯤)에 보면 “홍법대사 공해는 신라 신족(神族)”이라고 쓰여 있다. 그 밖에 여러 불교 전적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원진 스님의 와케 가문은 신라계인 제11대 스이닌 천황 후손이기도 하다.
 |
◇(사진 왼쪽)신라선신당의 사당 안에 모신 본존인 ‘신라명신’의 신상(神像, 일본 국보), 지증대사 원진 스님의 화장한 유골을 넣어 만든 목조좌상 |
일본에서 한국 고대 관계 사찰과 신사에 관한 연구로 권위 있는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원진이 신라신 신령을 고대 일본 땅으로 모셔왔다”고 밝히면서 “신라신사(신라선신당, 필자주)에서는 지증대사 원진(엔진)이 당나라에 구도하러 갔다 돌아올 때 감득(感得)했다고 하는 ‘신라명신’을 제사 지내게 되었다”(‘歸化人と社寺’ 1974)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온조지 가람의 고대 기사에도 담겨 있다. 즉, “신라선신당의 본존인 목조 ‘신라명신상’은 텐안 5년(天安, 서기 858년) 원진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는 배 안에서 감득한 ‘신라신’이다. 원진 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뱃길에 한 노옹이 선박 앞쪽인 이물에 나타나서 ‘그대의 교법을 지켜주겠도다’고 했다.
그 후 원진이 왕도로 입경하여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경전들을 태정관(최고 관청)에 제출할 때, 노옹이 다시 나타나더니 원진 스님을 온조지로 인도해 주었고, 그 이후에도 온조지 가람 북쪽에 머물렀다. 원진은 서기 860년에 그곳에다 신당을 세우고 이 신을 제사지내게 됐다”(‘園城寺龍華會緣起’ 서기 1062년 편찬). 이에 대해 도쿄대학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도 “원진 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히에이산 아래 오우미(지금의 오쓰시) 땅에다 온조지 사찰을 창건하면서 가람의 진수(鎭守) 수호신으로서 뱃길에서 만난 신라명신을 위해 신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게 되었다”(‘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고 밝혔다.
원진 스님이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에서 수도하다가 왕실의 윤허를 받고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서기 853년, 그의 나이 39세였다. 당시 원진은 원인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원인 스님을 스승이자 핏줄을 나눈 골육처럼 존중하며 따르다 당나라로 떠났다. 그도 최징·원인 등 선배 학승들과 마찬가지로 신라 선박을 얻어 타고 유학길에 올랐고, 당나라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북큐슈의 신라신을 모신 가와라신궁사를 경유하며 신라 신도와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라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귀국한 뒷날 ‘신라명신’을 제사 지내기 위해 스스로 개창한 온조지(園城寺·현재 三井寺, ‘미이테라’로도 부르고 있음) 경내에 ‘신라선신당’을 건립했다.
 |
◇온조지 정문(왼쪽), 1599년에 재건된 온조지 금당 전경(일본 국보) |
그와 같은 사실은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가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오우미땅의 ‘신라선신당’은 오쓰시 벳쇼초(大津市別所町)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신사는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총본산 온조지 경내 엔만인(園滿院) 옆의 산속 수정보 북동쪽에 위치한다. 신라선신당은 온조지 사찰 오사진수(五社鎭守)의 하나로서 북원(北院)에 속한다. 현재의 건물은 지붕을 노송나무(편백) 껍질로 이은 국보 건물이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무로마치막부 초대 쇼군인 국가 최고 권력자 장군)가 신사 건물을 중수했다. 이 사당은 순수한 신사 건축물이다. 이 신사의 본존인 국보 신라명신의 신상(神像)은 산형(山形)의 관을 쓰고 갈색 도포를 입었으며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용모이다. 이 분이 소잔오존(素盞烏尊·스사노오노미코토, 일본의 개국신이 된 신라신)이라고 한다.”
이마이 교수는 거침없이 신라선신당의 본존 신라신을 일본 신화(‘일본서기’)에서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 지역으로부터 동해를 건너 ‘이즈모’(出雲)로 왔다는 신라신 소잔오존이라고 전했다. 물론 현대의 이마이 교수 외에도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1839∼1931) 교수가 똑같은 주장을 펼치다 도쿄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이른바 ‘황국신도’의 군국주의 일제가 한창 기세를 떨치며 학문의 자유를 유린하던 시절인 1892년의 일이다.
“무릇 ‘속고사담’(續古事談)에 보면 신라명신은 소잔오존이며, 오우미 지방은 문수보살의 터전이로다”(‘越前國名蹟考, 14세기쯤’)라고 하듯이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에서 문수보살을 신앙하는 것을 지적한다. 일본에서도 신라를 뒤따라서 신불(神佛)을 동등한 존재로, 사찰이며 신사에서 함께 모시고 제사 지낸 사실을 고증하고 있다. 와세다대학 야마모토 쓰토무(山本 勉) 교수는 “원진의 신라명신 감득은 신라 가문의 사찰로서 온조지를 창건한 오토모(大友)들이 신앙해오던 도래계의 신과 원진을 연결시켜준 전설로 보인다. 신라명신은 1052년에 ‘신라제’(新羅祭) 마쓰리(제사 축제)가 거행되면서부터 각종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데 “신라명신은 온조지 사찰에서 오토모 가문에서만 모신 것은 아니고 대부호이자 야마토정권의 장경(재무부장관)을 지낸 진(秦·하타) 가문에서도 관여하고 있었다”(‘寺門傳記補錄’)고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가 밝힌 바 있다. 교토와 오쓰 지방의 신라계 유력 가문에서는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신라명신’을 받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마이 교수는 현재의 오쓰시 일대가 신라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라고 했다.
“오우미땅 시가군(滋賀郡·오쓰시)은 현저하게 귀화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었다. 온조지의 전신이었던 ‘오토모노스구리테라’(大友村主寺) 사찰이며 신라선신당 역시 온조지가 개창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와서 살고 있던 귀화인들이 숭배하던 외국신이며, 온조지가 서면서부터 사찰을 지켜주는 ‘옹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신라신사’로서 사당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일본 고대 명문 무가(武家)인 ‘겐지’(源氏) 가문이 이곳 ‘신라명신’을 떠받들어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겐지 가문의 명장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 988∼1075)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1045∼1127)는 20세에 신라선신당에 찾아와 신라명신 신주 앞에서 관례를 올리고, 이름도 ‘신라삼랑’(新羅三郞)으로 개명했다”(三省版 ‘人名辭典’ 1978). 이 발자취를 이마이 교수도 “요시미쓰가 신라명신 보전(寶殿) 앞에서 관례를 올림으로써 신라삼랑의광(新羅三郞義光)으로 이름붙인 것은 유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마도 신라 제24대 진흥왕(534∼576 재위) 당시 원화(源花)의 뒤를 이은 화랑도(花郞徒)를 훈모하여 스스로 화랑도(花郞道)의 5계 등 무사 정신을 신라인 지역 오우미땅에서 도입한 것이 아닌지 향후 연구과제로 삼을 일이다.
왕실에 무공을 세워 고위 무장으로 장수한 그는 사후 신라선신당 바로 이웃에 스스로 묘지를 잡고 82세에 영면했다. 이마이 교수는 일본에서 ‘신라’를 표기하는 우리의 이두식 ‘만요가나’(萬葉假名)의 여러 가지 표기를 다음처럼 한자로 제시하고 있다. “신라를 나타내는 말은 白木, 志良岐, 志樂, 信樂, 設樂, 白國 등. 이처럼 신라를 훈(訓·새김) 글자로 나타내고 있는 ‘신라훈’(新羅訓) 지역들은 신라계 사람들과 연고가 있는 터전들이다.”
끝으로 밝힐 것이 있다. 고대 일본 왕실에서 천황이 직접 제사 지내는 11월23일 밤의 천황가 ‘신상제’(新嘗祭) 제사(‘延喜式’ 서기 927년에 성립된 왕실 법도) 때 모시는 3신은 원신(園神) 한 분과 한신(韓神) 두 분 등 모두 3신주를 받든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원신(園神)은 신라신이며 한신(韓神) 두 분은 백제신”(‘神樂の命脈’ 1969)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면 신라인 원진 스님이 신라명신을 모시면서 세운 온조지라는 사찰 명칭도 천황가가 제사지내는 신라신인 원신(園神)의 성터 가람을 상징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신라명신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온조지 사찰을 지켜주시는 진수신(鎭守神)이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