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나라 땅'백제대사'의 후신 '대안사'

바보처럼1 2007. 5. 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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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4>나라 땅 '百濟大寺'의 後身 '大安寺'
백제 왕족 스이코여왕이 창건
倭왕실 사찰로 당시 이름 높아
 ◇다이안지 정전
일본 나라 땅의 ‘다이안지’(大安寺·나라시 다이안지초2-18-1)는 고대 일본 왕실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숭엄한 가람이었다. 백제 불교가 538년 제26대 성왕(523∼554 재위) 때 일본에 포교된 이래 왕실 사찰로 이름 높던 ‘구다라대사’가 바로 다이안지의 전신이다. 구다라대사라는 그 훌륭한 사명(寺名)은 사라지고 다이안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인가. 지난 1월22일 필자는 다이안지로 최고승 고노 료분(河野良文) 관주(貫主)를 찾아갔다. 고노 관주는 “구다라대사는 스이코여왕(592∼628 재위)이 처음 세웠다가 639년 조메이왕(629∼641 재위)이 재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훌륭하기 그지없는 절이었지요. 그 후 몇 번 사찰 터가 옮기면서 뒷날 나라 왕도 천도 때 지금의 터로 옮기고 다이안지로 명칭이 바뀐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고노 관주의 말 ‘구다라대사’는 일본 고대사를 장식할 만한 백제인 왜왕들의 대가람이었다.

도쿄대 건축사학자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다이안지의 족적을 다음처럼 구체적으로 밝혔다.

◇다이안지 정문.

“옛날 나라쿄(平城京, 고대 역사 기록으론 나라쿄로 읽었으나 요즘은 헤이조쿄로 왜곡하고 있다·필자주)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축으로 약사사(藥師寺)와 대칭적 위치에 세워졌던 것이 다이안지다. 원래는 현재의 터 약간 남쪽에 자리했으며, 석탑과 주춧돌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 이 사찰이 당초 스이코여왕이 건립한 구마고리조사(熊凝精舍)였다. 그 후 조메이왕 11년(639)에 아스카 땅의 구다라강(百濟川: 지금의 명칭 소가강으로 바뀐 것은 일제 치하) 부근에다 옮겨서 구다라대사(百濟大寺)로 부르게 됐다. 그 후 다시 덴무왕(673∼686 재위) 때 가쿠야마(香久山) 남쪽으로 옮겨 다이칸대사(大官大寺)로 부르다 나라 왕도 천도 때(710)에 다시 새 왕도로 옮겨 지금처럼 다이안지로 부르게 되었다.”(‘국보, 중요문화재 안내’ 1963)

그렇다면 어째서 당초 부왕 조메이왕이 웅응정사를 구다라강 옆으로 옮겨 확대 건축한 당시의 ‘구다라대사’라는 명칭을 아들 덴무왕이 ‘다이칸대사’로 바꾼 것인가. ‘구다라대사’라는 그 이름을 붙였던 당시(639년)의 ‘일본서기’ 기사에 보면 조메이왕은 “구다라강 옆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다라대사와 구다라궁을 짓도록 칙명을 내렸고, 구다라궁이 준공되자 구다라궁에 들어가 살다가 승하했으며, 장례는 구다라노 오모가리(百濟大殯, 백제왕실 3년상 장례)로 치렀다.”

◇스이코여왕의 사당에 걸린 짚신들. 불교와 벼농사 전래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구다라대사’의 ‘백제’라는 명칭이 덴무왕 시대에 사라지고야 말았다. 덴무왕은 백제가 망할 때 25000명의 백제와 왜 연합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의 백촌강으로 파견했던 덴치왕(661∼671 재위)의 이복동생이다. 덴치왕은 구다라대사를 세운 조메이왕의 장자이자 태자였고, 덴무왕은 조메이왕의 제3왕자였다. 덴무왕은 부왕이 지은 사찰 이름 ‘백제’를 지워버렸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일본 선주민들의 백제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 추찰하고 있다.

덴무왕의 형이었던 덴치왕은 665년 2월 백제에서 건너온 유민 남녀 400여명을 오미 땅(간사키)으로 이주시켜 주택과 토지를 주어 새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666년 10월에는 백제 유민 남녀 2000여명을 ‘아쓰마’(간토 지역)로 보내 3년 동안 관가 급식을 보급하였다. 그 후 669년 12월에도 백제 유민 700여명을 구원하여 다시금 오미 땅에 새 터전을 베풀어 주었다.(‘일본서기’) 그런가 하면 덴치왕 스스로도 667년 나라 땅의 왕도마저 백제 유민들의 오미 땅으로 옮겼다. 이때 나라 땅 왕도 주민들의 반발은 매우 컸다. 아오키 카즈오(靑木和夫) 교수는 덴치왕의 오미 천도에 관한 학계의 견해를 다음처럼 몇가지 지적했다.

◇다이안지 정전. 구다라대사를 세운 백제인 조메이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고노 료분 관주의 독경 장면이다.

“덴치왕의 천도는 나라 아스카 땅 옛 주민들의 세력을 피하여 인심을 일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에 신라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데 따른 방위책 등을 들고 있다.”(‘일본서기 補注’ 이와나미서점 1979)

이런 정황을 살필 때 덴치왕의 배다른 동생인 덴무왕은 어쩌면 선주민들의 비위를 건드린 형의 ‘백제인 최우대 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구다라대사’ 큰가람의 ‘백제’라는 두 글자를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글자를 지우는 데 그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다. 이 점은 추후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덴무왕의 부왕 조메이왕은 사찰뿐 아니라 궁궐 이름에도 ‘백제’를 붙여 ‘구다라궁’의 명칭을 왜나라 역사에 최초로 기록시켰다. 조메이왕은 친할아버지 비다쓰왕(敏達 572∼585 재위)이 등극하자마자 ‘구다라 터전’에다 왕궁을 세웠던 전철을 뒤따랐다.

◇경내의 ‘성관음보살’의 석상(왼쪽), ‘구다라대사’의 발자취를 기록한 사찰 연혁비.

비다쓰왕은 572년 4월(음력) 등극하자 21세기인 오늘까지도 행정지명이 ‘백제’인 나라현 가타카쓰라기군 고로초구다라(廣陵町百濟) 땅에 왕궁을 세우게 됐다. 바로 그 터전에서 조메이왕은 왕궁 이름을 정식으로 ‘구다라궁’으로 명명했다. 당시에는 선주민 반발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짚어둘 것이 있다. 즉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을 건설한 터전인 구다라강 지역에다 할아버지 비다쓰왕이 과연 최초로 왕궁을 세웠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서기’의 기사에서는 비다쓰왕이 “왕궁을 구다라 큰우물 터에 세웠다”(宮于百濟大井)고 했다. 이 터전에 대해 일찍이 역사지리학자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 박사는 ‘야마토국 히로세군의 구다라’(‘대일본지명사서’ 1900), 즉 지금의 고초로구다라 지역이라고 단정했다. 뒷날 그의 손자인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을 구다라강 옆에 세웠다고 하는 그 고장의 지명이다. 그런데 도호쿠대 사학과 세키 아키라(關晃) 교수는 비다쓰왕이 왕궁을 건축한 지역을 두 곳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키 교수도 한 곳은 요시다 박사의 지적한 고료초구다라를 가리켰고, 또 한 곳으로는 고대의 ‘기와치국 니시키베군 구다라향(百濟鄕)인 지금의 오사카부 가와치나가노시 오이(大井)설”(‘일본서기 補注’ 이와나미서점, 1979)도 있다는 ‘가와치지’(河內志)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의 어느 곳이든 백제인 터전임에 틀림없다.

◇구다라대사 터전에서 발굴된 백제인 솜씨의 연꽃무늬 수키와.

‘가와치지’는 오늘의 오사카부 가와치나가노시가 고대에는 ‘구다라향’이라는 지명을 가진 백제인 집단주거지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비다쓰왕이 어쩌면 나라 땅의 구다라 터전이 아닌 오사카의 구다라 지역에 왕궁을 세웠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살피게 해준다. 그러면 비다쓰왕은 무엇 때문에 백제인 땅에다 왕궁을 세웠는가. 일본 왕실 가계보 ‘신찬성씨록’(815)이 그 답을 준다. 이 왕실 고문서는 ‘비다쓰왕은 백제 왕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지금부터 1192년 전에 못박아 놓았다. 이제는 누구도 고쳐 쓸 수 없는 역사의 증언이다.

그 옛날 구다라대사였던 지금의 다이안지 정문 바로 우측으로 고즈넉한 곳에 ‘스이코황사’(推古天皇社)라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다름 아닌 비다쓰왕의 배다른 친누이동생이자 왕비였던 스이코여왕의 사당이다. 비다쓰왕과 스이코여왕(연재 6회 참조)은 근친혼을 했던 고대 백제 왕족이다.

다이안지 고노 료분 관주는 필자에게 스이코여왕 사당의 발자취에 대해 다음처럼 말해주었다. “그는 나라 아스카 땅에서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위대한 여왕입니다. 더구나 구다라대사를 여왕이 세우셨기에 이 가람이 구다라 강변에 섰던 당시에도 여왕을 추모하여 사당이 섰던 것이며 그로부터 줄곧 저희 사찰에서는 사당을 모시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잠시 기억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다이안지에 신라학승 심상대덕(審祥大德, 8세기)이 건너와서 화엄불교를 널리 폈다는 사실이다. 고노 관주도 시인했다. 심상대덕을 일본 승으로 왜곡하는 학자(다무라 엔초 교수 등)도 있으나 상세한 것은 근일 심상대덕 항목에서 고증하련다.

일본의 ‘왕’ 호칭도 짚어볼 만하다. 최초로 ‘왕’ 호칭을 쓰기 시작한 왕은 덴치왕이다. 도쿄외국어대 동양사학과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교수는 “그 사실은 ‘마쓰오카산 고분’에서 발굴된 백제인의 금석문(구리쇄 ‘선수왕후묘지명’)에 덴치왕의 ‘왕’호와 무진년 12월, 즉 덴치왕 시대(668)가 글자로 새겨져 있어 확인된다”고 했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 등에서는 모든 왕을 왕으로 통일하여 호칭하고 있으나 덴치왕 이전의 왕들은 왕이나 대왕으로 호칭돼야 한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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