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가 있었습니다.

바보처럼1 2007. 5. 7. 04:57
Dark_yoo :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가 있었습니다... 내가 몆살때지.. [2]
7799| 2007-05-03 추천 : 3| 조회 : 373

이로 부터 20년이 흐르는 동안 한거라고는 고조선이 신화에서 역사로 편입한것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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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주)


-> 이자료는 "우리역사의 비밀"이 최초로 인터넷에 공개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아래자료는 요청자료입니다

검색 “국회청문회”하시면
한글로 리타이핑한 많은 자료를 보실수 있습니다

새로이 구성된 국회에서
“제2의 국사청문회가 계획중”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때
우리역사의 비밀(www.coo2.net)이 생중계 할 계획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자료 -> 국회 속기록 보기)


- 개최일시 : 1981년 11월 26일 ~ 27일


(1) 국회청문회 속기록 자료 있는곳 인터넷 주소

http://search.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1/108/108ia0019b.PDF#page=1

☞ 100여 페이지가 넘는 놀랄만한 방대한 자료들이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녹취되어 있습니다
☞ 더러운 식민사학자들의 뻔뻔한 망국적 발언을 확인해 보십시요
☞ pdf 파일로 되어 있어 보실려면 아크로벳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 한자가 많은점 감안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국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는 방법


(1) 국회 사이트 접속  http://www.assembly.go.kr/
(2) 중앙메뉴중 회의록 "클릭"
(3) 목차검색 클릭->상임위원회 클릭
(4) 제 11대 클릭
(5) 문교공보위원회 클릭
(6) 제108회 클릭
(7) 제 19차 클릭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청문회 개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결정판 국사교과서를 바꾸기 위해
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국회에서
"국사청문회"가 열렸다


민족사학측은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 이었고

식민강단사학측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다

강단측은
매국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수제자"들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음이라

비전공자들과 토론하는 것이 겪에 맞지 않아 불쾌하다는 둥
거들먹 거리던 그들에게

국회는
국사편찬위원 전원 경질이라는 철퇴와
청문회 내용을 국사책에 반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민족 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83년 국사교과서" 개편시 다음사항이 반영된다

(1)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사실 수록
(2) 백제의 대륙진출 수록
(3) 한 4군의 한반도 위치설 삭제 등

이것이 밀알이 되어
2004년에는 “제 2의 국사청문회”를 개최하여
"81년의 국사청문회"보다 더 발전된 결과가 나와
매국식민사학 척결, 땅에 떨어진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래 고 임승국 교수님의 발언내용을 일부 올려드립니다



("1,000년만의 역사혁명, 식민사학 71년")


1981년 11월 27일 임승국 교수는
이병도의 제자들 5명과 국회에서 1대 5의 격론을 벌인다

(1 : 5) (임승국 : 김원룡, 김해종, 이기백, 이원순, 안승주)



▒ 임승국 교수 발언내용


위원장님(국회 문교공보위원회 위원장 한병태韓柄泰)과
배석하신 여러 위원님들 한테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서
우리 민족사로 말하자면
1,000년만의 개혁,
1,000년만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중요한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시고


우리 사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식민사학이래 71년만에 이러한 중대한 계기가 된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러한 계기를 이렇게 마련해 주셔서
정말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아마 71년이라고 하는 말의 "뉘앙스"를
좀 이상하게 받아 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일제 36년간 아닌 35년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일본시대를 일제 36년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한번 냉정한 입장에서 계산을 해보시면
아마 36년이라고 하는 말이 대단히 잘못 됐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1945년에서 1910년을 빼면 산술계산적인 숫자로 35년간이 틀림 없습니다
날짜까지 따지면 35년에서 14일이 도리어 모자라요

그런데
우리는 1년 14일을 보테서 36년 36년하고 정말 광복이후 36년간이나 떠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학계에서는 문교부 당국에다가 이 용어가 잘못 됐으니까
35년으로 고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건의도 여러차례 내었습니다

바로 어저께 강의해 주신 박시인 박사 명의로 건의를 했어요

그런데
어저께 역시 이장소에서 나와서 답변해 주신 국사편찬위원장으로부터 회신도 받았어요

제가 오늘 그 회신을 가지고 나오려고 하다가 미쳐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마는
"우리의 계산법이 틀렸으니 다시 검산해 보시고 건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우리가 아둔한 사람이라도
45빼기 10이라고 하는 빼기계산을 다시해야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금년 4월에 문교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봤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명년도 82학년도 각종 교과서부터는 일제 35년으로 하기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5빼기 10이라고 하는 이 단순한 수학계산을 하는데 36년이나 걸린 셈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문교부 자꾸 얻어 맞는데 이런 말씀하는 것은 좀 미안합니다마는
36년 빼기 10하는데 36년이나 걸렸는데
우리 민족사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이 운동이 하루 이틀에 되겠습니까 ?

정말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깨려고 하는 시도나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회에서 우리 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이런 좋은 기회까지 마련해 주시니까
그 난공불락의 식민사관이 71년만에 해결될 줄 압니다
해방이후 36년 됐으니까 분명히 71년입니다
71년만에 깨질 공산이 보입니다

가능성이 보입니다

기왕 35년에다가 36년의 말씀을 드렸으니까
제가 우리 한국사람 일반이
우리조국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무관심한가 하는 실례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조선왕조 태조의 이름은  이단(李旦) )


어저께 박시인 박사께서는
조선왕조의 태조의 성명이 누구냐 해서 여러분들에게 물어 본 줄 압니다

이성계라고 하는 이름은 고려 장군 당시의 이름이시고 그가 태조로 등극하자 이름을 바꿨습니다

즉,
날일(日)자에 한일(一)자를 쫙 근 것 지평선위로 떠오르는 "라이징 썬"
떠오르는 해라는 뜻의 단(旦)자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단(李 旦)이라고 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그렇게 역점을 두고 공부하고 있는 소위 우리한국의 사학자들이
조선왕조실록 첫 페이지 첫줄도 아직 읽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얘기이지요


(李朝가 아닌 朝鮮王朝) )


고려청자 다음에 우리 도자기 역사는 흔히들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조백자"라 합니다


우리 정사책의 제일 마지막 책이 뭐냐고 하면 흔히들 얘기하기를
이조실록이라고 그럽니다 만은

도대체 이조라고 하는 왕조가 어느때 있었습니까 ?
왜인들이 이땅에 들어와서 쓰기 시작한 말이 이조예요.
이조라고 하는 말은 "미스터"李의 나라라는 뜻이예요

이조실록이라고 하는 책이 과연 있었던가요 ?
없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 실생활과 국가생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 략)


("대학 사학과 보내지 마라 : 식민사학의 본산")




저는 3남 1녀를 가지고 있는 가장인데
바로 엊그저께 82학년도 대학입시학력고사를 본 막내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고명딸인 셈이지요

아버지가 민족사학을 하고 있으니까 내 딸이 효녀 노릇한다고
대학교 사학과 특히 한국사학과를 지망하겠다고 그래요

그러나 나는 이를 말렸습니다

"네가 사학을 하고 싶거든 그대로 다른 학문을 하면서 해라
지금 한국사학과 들어가서 배우면은 다 식민사학을 배우게 되어 있어.
그러니 제발 거기는 가지마라 !

네 뜻이 고맙다마는 제발 하지 말라"라 충고했습니다

지금 제가 식민사학 71년을 얘기하는 이시간에
지난날의 식민사학을 배운 식민사학 전문가를 전문가라 인정할 수 있을까요 ?


(일본놈들은 단군은 물론, 중국정사인 25사도 못보게 했다)


(운영자 주)

25사까지 못보게 한 일본놈들 밑에서 빌 붙어산 인간은 누구이며
또 그 제자들은 또 누구인가 ?
해방이후 아직까지 역사 매국 반역자에 대한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가하는 이 말에는 조금도 추호도 모순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단군소리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우리 고대사의 온갖 자료는 전부 금서처분돼 있었습니다

우리고대사만이 아니고 중국정사 소위 "25사"라고 하는 책도 금서처분돼 있었습니다
만일 이런책들을 보면 잡혀 갔어요

자 그러니까
그 당시에 학문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사 공부한 사람들은 무슨 사학을 했겠습니까 ?
"불문가지"입니다

물론 이용범교수께서는
연령 등으로 봐서 그 당시에 공부하신 분으로 제가 보지 않습니다 만은

저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인 학자로서 참여해서 활동하다가
금년까지 생존해 계신분 즉 일본시대에 고등관을 지내신 분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분은 돌아 가시고
지금은 꼭 한분(주1)이 표본처럼 남아 살아 계십니다

이 분의 훈도(訓導)밑에서 사학을 배운 분들 !
그 분의 감독밑에 감수밑에 감사밑에 학위를 받은 분들 !
저는 단순히 이용범교수 한분을 가리켜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역사단(現役史壇)의 전부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아직도 국사 광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는 1945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을 두가지 측면에서 봅니다
정치적인  제도적인 문화 학술적인 측면의 광복과
또 하나의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분야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바로 "국사분야"입니다

이 국사라고 하는 것은 한국정책의 사각지대에 온존(溫存)하면서
광복이라고 하는 혜택과 시대적 평가나 조명을 전혀 받지 못한 분야입니다

이러한데
이용범 교수는 그 식민사학을 과거에 배웠거나
그 스승밑에서 그 훈도 밑에서 성장한 사학을 지금 자랑하게 돼 있어요 ?

오히려 나 같으면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될 입장일 것 같습니다
지난날의 비전문사학자 "아마추어" 사학자와는 대화를 하지 않기로 했는데

모처럼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여기(국회 청문회장) 나와서 얘기하는 듯한 표정은 정녕 학자로서의
"에티케트"가 문제되는 거예요

상대방에 대한 모욕도 그런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

제발 이런 것은 앞으로 이런 공청회에서는 제발 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

(주1)

이병도(지금은 죽음)를 지칭함,
매국노 이완용의 친척으로 같은 시기 활동
부관참시의 벌을 내리지는 못할 망정 아직도 식민매국사학에 물들어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다

(중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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