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인장분야 명장 이동일 씨

바보처럼1 2007. 6. 20. 20:08
[송성갑의 新匠人탐구]인장분야 명장 이동일씨
도장파기 48년 "예술을 새기죠”
 이동일씨는 앞으로 인장은 실용성보다 예술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김창길기자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에서 인장코너를 운영하는 이동일(65)씨는 인각작품에 전각 기법을 도입,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독특한 인장을 만드는 기능인으로 유명하다.

이씨는 1979년 인장공예 1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82년 전국 인장기능경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 이 분야의 실력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전국인판연합회 회원들에게 기술교육을 실시한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는 등 화려한 수상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특히 예술인장인 전각에도 관심을 둬 87년 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입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씨는 2002년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인장분야 명장으로 선정돼 이 분야의 달인임을 공식 인정받았다. 현재 국가기술자격 검정시험 출제전문위원과 전국인각작품공모전 심사위원, 국제 인장예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맡고 있다.

이씨는 “그동안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전각도장과 탤런트 유동근·전인화의 결혼기념 도장 등 명사들의 도장도 많이 새겼다”며 “진짜로 내 작품을 아는 사람들은 유명인들이라기보다 따로 있다”고 털어놨다. 조형미를 아는 사람들로 이들은 제주도는 물론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도장을 새기러 온다고 소개했다.

이씨가 인장에 입문한 것은 지독한 가난이 계기가 됐다. 그는 독자로 태어나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 해결을 위해 16세 때인 56년 경북 봉화에서 기능견습공으로 인장에 첫발을 디뎠다. 어릴 적부터 법조인을 꿈꿔 온 그는 견습공으로 일하면서도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각고의 노력 끝에 고교 3학년 때 전국남녀고교생 학력대회에서 국사과목에 입상, 경희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안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가난을 이기지 못해 1년만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안간힘을 다해 주간대학까지 다니게 됐는데 중도에 주저앉으려니 심적 고통은 이루 말로 못할 만큼 컸습니다. 하지만 당시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죠.” 얼마간 상심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서점에 들러 ‘전각입문’이란 중국책을 발견한다. “그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까진 인장을 한낱 밥벌어 먹기 위한 수단으로만 알았는데 그 속에 엄청난 예술성과 전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때부터 인장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열심히 연마하기 시작한 거죠.”

한때 회정 정문경 선생으로부터 전각을 배우기도 한 그는 이 당시 체득한 인장의 예술성을 실용인장에 접목, 나름의 독특한 인각기법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내 자신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 애써 만든 작품을 고객이 몰라보고 거절할 때 절망감을 느낀다”는 이씨는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인장을 길인이니 흉인이니 따지는 풍조는 일종의 미신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 특유의 예술인 서예를 다시 새기는 작업이란 점에서 인장을 ‘동양문화의 꽃’으로 규정한다. “예로부터 중국의 최고통치자인 천자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장을 활용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왕권은 옥새라는 인장으로 상징됐고요. 요즘도 인감도장을 잘못 찍으면 집도 날아가고 사기도 당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인감도장은 자신을 상징하는 분신입니다.”

인장업의 전망과 관련, 그는 서구문명이 밀려 들어오면서 외견상 상당한 위기를 맞은 것 같지만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예술인 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근 인장을 새기는 컴퓨터가 나오기도 했지만 인장은 손으로 공들여 만드는 게 원칙”이라는 그는 “인간문화재조차 제자가 없는 요즘 세태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는 법조인에 대한 꿈이 깨진 이후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앞으로도 인장을 잘 새기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sk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