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24) 대금 제작자 이정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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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제작 장인 이정대씨
(인천=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대금 제작 무형문화재 이정대씨가 자신이 만든 대금을 직접 연주하고 있다. mina113@yna.co.kr"> mina113@yna.co.kr/2007-01-02 14:37:54/ <저작권자 ⓒ 1980-200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
(인천=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제가 대금을 끌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대금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20년전 처음으로 대금을 만진 이후 단 한순간도 대금을 놓은 적이 없다는 대금 제작 장인 이정대(李廷大.48)씨는 `대금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2001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9호로 지정된 이정대씨를 2006년 한해가 저물어가는 세밑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그의 작업실 겸 자택에서 만났다.
"쉰 고개로 넘어가려니 요즘 나이몸살을 앓고 있다"며 활짝 웃는 이씨는 40대 후반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의 소유자였다.
까맣고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꽁지머리로 묶은 채 소박한 회색저고리를 넉넉하게 걸쳐 입은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젊은 예술가'로 보였다. 거친 풍파를 헤쳐온 고집스런 장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금 얘기를 꺼내자 이씨의 얼굴에서는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가 싹 사라지고 엄숙함과 진지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문고와 함께 국악의 대표적인 악기인 대금은 제작과정에서 상당한 인내와 절제를 필요로 한다.
우선 대금 제작용 대나무가 `산삼 만큼이나 구하기 어려운 귀물(貴物)'로 여겨지고 있다.
대금의 몸통 부분인 대나무 관(管)의 속, 즉 내경(內徑)이 지름이 17㎜ 이하라야 하는데 대부분의 대나무는 속 지름이 그보다 훨씬 넓어 대금 재료로 쓸 수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속이 꽉차 원하는 크기로 내경을 뚫을 수 있는 대나무가 바로 `쌍골죽'이다. 그러나 쌍골죽은 여간 구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쌍골죽은 일종의 돌연변이 대나무다. 속이 꽉 차고 대나무 답지않게 S자 모양으로 약간 휘어져 있어 쌍골죽으로 불린다. 워낙 희귀해 대나무 1만 그루 중 하나 정도 나올까 말까한다고 한다.
지리산 기슭과 울진, 삼척, 강릉 등 깊은 산골 후미진 골짜기에서 어렵게 구할 수는 쌍골죽은 속이 꽉 차 있으나 휘어져 있다보니 곧게 펴는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
쌍골죽을 그늘에서 말린뒤 펴는 과정을 수년간 반복해 완벽하게 곧은 상태로 만든 다음 내경을 일정한 크기로 판 뒤 취구(吹口)와 지공(指空), 청공을 뚫는다.
마지막으로 온도변화에 민감한 대나무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튼튼한 무명줄로 대금을 여러번 칭칭 동여매고 내경에 기름칠을 하면 대금이 완성된다.
지공 사이의 간격이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간격 오차는 모두 합해 2㎜를 넘지 않아야 한다. 취구의 경우도 구멍의 각도를 약간만 달리 해도 음역 폭이 달라지기 때문에 취구를 만들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계량할 수 없는 섬세한 `손 감각'이 필요하다.
이같은 작업의 어려움 때문에 국내에서 제대로 대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이씨 밖에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대금 전공자들 사이에 이씨의 낙관인 `설죽(雪竹)'이 찍힌 대금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이처럼 독보적인 대금 제작 장인이 되기까지는 20년간 험난하고 고독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인천 토박이인 이씨는 1984년 군대 제대후 전기.전자 기술자가 되기 위해 컴퓨터학원과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하던 시절, 우연히 길을 걷다 한 행려병자가 틀어놓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단소소리를 듣게 됐다.
이씨는 순간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듯한 강한 충격을 받고 그 길로 곧장 단소를 가르쳐 줄 스승을 찾아 나섰다.
1986년 이씨는 드디어 악기가게를 통해 대금연주자 김정식 선생님을 만나 대금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씨는 이 때부터 대금 연주의 기초를 배우면서 대금 제작 방법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다.
수년간의 연습을 통해 연주자로서 숙련기에 접어들 무렵 이씨는 "연주의 바탕이 되는 악기를 제작하는 것이 차원이 높다"고 생각하고 대금 제작에 전념하게 된다.
특히 대금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악기임에도 불구하고 표준적인 제작방법 없이 국내 대금제작자 20여명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대금을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대금 제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대금제작에 나서 전국각지를 다니며 다른 제작자들과 의견을 교류하고 관련자료를 모아 제작방법을 다듬어 나갔지만 사실상 독학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최상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교본으로는 조선초기 만들어진 `악학궤범'이 유일한 참고자료가 됐지만 `적당한 크기로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이 워낙 추상적이고 모호해 전통방식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쌍골죽이 워낙 비싼데다 제작한 대금을 팔아도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얼마되지 않아 생계유지가 힘들었다. 이씨는 택시운전, 가스배달 등 갖가지 부업을 전전하면서 급기야 결핵에 걸려 각혈을 쏟아내기도 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씨 자신도 `내가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 때도 있었지만 대금 없는 삶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씨는 뜻을 세운지 15년만에 대금제작의 일가(一家)를 이뤄냈고 2001년에는 대금제작자로는 처음으로 인천시 무형문화재로 등록됐다.
"전통은 가장 전통적이어야 합니다."
이씨는 최근 국악이 양악의 변화 추세에 발맞춰 발전하는 것은 좋지만 양악에 지나치게 휩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대금 제작방식이 정악용(궁중음악)과 민속악용(산조)에 따라 다소 다르고 연주자가 원하는 음역에 따라 다소 변형될 수는 있지만 최근엔 양악과의 협연을 위해 대금을 무리하게 변형시켜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한다.
"양악과의 접목을 시도하되 국악과 양악의 비율은 7대 3 정도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국악기로 서양 클래식을 연주하거나 양악 오케스트라에 대금이나 가야금 한 두개가 낀다고 해서 국악이 대중화, 세계화되는 것은 아니죠."
최근에는 국악이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고급문화로 대금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제는 부업을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지만, 아직 문하생을 둘만한 경제적 여유는 없다.
이씨는 "바이올린의 명인 `스트라디바리'가 불후의 명작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남긴 것처럼 저도 `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대금을 만들고 싶다"며 원대한 포부를 밝히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mina113@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1/02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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