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48)교토 이와시미즈하치만궁

바보처럼1 2007. 8. 13. 08:23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8>교토 이와시미즈하치만궁
백제계 왕족 혼령 모셔… 日 왕실서 성역화
 ◇일본 기타큐슈를 통치한 최초의 백제인 오진왕의 신주를 모신 이와시미즈하치만궁 종묘의 본신전. 오진왕의 후손인 애도바쿠후 정권이 17세기초 이곳으로 사당을 옮겼다.
일본 오사카부와 접경한 교토부의 젖줄기 기쓰강(木津川)을 동남쪽으로 껴안고 널찍이 펼쳐진 야와타(八幡)시. 이 고장에는 ‘이와시미즈하치만궁(石淸水八幡宮)’이라는 백제인 오진왕(應神·백제 곤지왕자, 4세기 말∼5세기 초, 연재 47회 참조)의 종묘(宗廟)가 드높은 ‘오도코노야마(男山)’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지난 5월13일, 이 종묘에서 필자와 만난 이나가키 가쓰히코(稻垣勝彦) 궁사는 “오진왕의 하치만신(八幡神) 신주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 종묘는 859년부터 860년에 걸쳐 본신전이 완성되었습니다. 본래 오진왕의 신주는 기타큐슈 땅에 처음 섰던 종묘인 ‘우사신궁(宇佐神宮)’으로부터 이곳으로 신주를 옮겨와 제사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터전에 하치만신의 종묘를 새로 세운 것은 그 당시 에도바쿠후((1603∼1867, 무사정권)의 국가 지배자인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종묘의 발자취가 오진왕의 일본 열도 초기 정복지였던 기타큐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확인한 셈이다. 그는 “현재 이 종묘는 국가중요문화재로 보호받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중수 공사에 들어가 내년에 끝마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에도바쿠후의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무엇 때문에 오진왕의 하치만신 신주를 저 멀리 백제인 최초의 지배 터전 기타큐슈 땅의 종묘 우사신궁으로부터 이곳 교토 땅으로 모셔온 것일까. 후쿠시대학 사학과 아오키 미치오(靑木美智男) 교수 등은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은 겐지(源氏) 가문에서 그들의 조상신을 제사 모시는 종묘로서 세워 무가(武家)가 떠받드는 숭경(崇敬)의 제사 터전이 되었다”(‘일본사사전’ 1976)고 지적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생부인 ‘에도바쿠후’ 제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그의 선조가 백제계 간무왕의 직계 후손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라는 왕족 가문(‘신찬성씨록’ 815)이다. 그러므로 17세기 초에 등장한 에도바쿠후 정권은 백제 왕족들의 왕실 무가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일본 왕실에서 제정된 법령은 백제신과 신라신을 제사 모셔야만 하는 왕실 법도가 확정돼 있었다. 즉 왕실 법률인 ‘정관식’(貞觀式 871년 성립)이 조정에서 이뤄져 왜왕들은 대대로 한국 고대의 천신(天神)인 ‘백제신’ 두 명과 ‘신라신’ 한 명을 왕실에서 왕이 직접 제사드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시미즈하치만궁 입구.(왼쪽)◇하치만궁을 올라가는 케이블카 삭도.

더구나 이 한국신 제사 의식은 뒷날까지 계승된 왕실 법도인 ‘연희식’(延喜式 927년 왕실에서 제정)에 이르러서도 다시금 명문화되어 있는 사실(史實)에 번쩍 눈뜨게 된다. 즉 그것은 ‘연희식’의 최초의 항목인 제사에 관한 ‘신기(神祇) 제1’에 다음처럼 법도가 정해져 있다. “왕실에 모신 3신주에게는 매달 월차 제사와 1년에 한 번 신상제 제사를 모신다.”(宮內省坐神三坐, 月次祭 新嘗祭, 園神社, 韓神社二坐·신라 신사당, 백제신 사당)

더구나 이 법도로 정하고 있는 월차제 제사는 일본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매월 왕이 궁안의 사당에 모시고 있는 한국신 신주들을 제사 모시는 것이며, 신상제는 해마다 11월23일 밤에 한 번 올리는 가장 큰 왕실 제사이다.

백제인 어머니 태생인 제50대 간무왕은 서기794년에 헤이안경(교토)으로 천도했을 때, 왕궁(헤이안궁) 경내의 남과 북 두 곳에다 한 곳씩 한국신을 모신 사당을 세운 것도 주목할 만하다. 즉 왕궁 안의 북쪽에는 가라카미노야시로(韓神社·가라진자·백제신 사당), 남쪽에는 소노카미노야시로(園神社·소노진자·신라신 사당)를 세웠다는 것이 ‘연희식’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지금부터 37년 전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왕실 문서 ‘연희식’에 의하면 ‘가라진자’에서는 두 명의 가라카미(韓神)의 신주, 즉 백제 신 두분을 제사 모시고, 소노진자에서는 한 명의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의 신주를 모셨다”(‘日本神話’ 1970)고 지적했다.

왕실 관계의 신은 모두 285위가 있으나, 그 중에서 한국신만을 ‘왕궁 안에 계신 세 신주’(宮內省坐神三坐)로서 최고위에 모셔 놓고, 일왕이 제관(祭官)들을 거느리고 궁 안 남북 두 곳의 한국신 사당에 가서 직접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 ‘연희식’에 명문화돼 있는 것이다.

지금도 도쿄의 일왕실에서는 이 한국신들을 일왕이 직접 제사 모신다고 본다. 도쿄의 일왕실 황거 경내 북쪽에는 ‘궁중삼전(宮中三殿)’이라는 사당 건물 3동이 나란히 서 있다. 즉 이 사당들은 우측으로부터 각기 ‘신전(神殿)’과 ‘현소(賢所)’와 ‘황령전(皇靈殿)’으로 부른다.

신전에는 세 한국신 신주를 필두로 모두 285명의 국가 신주들이 봉안돼 있다. 현소에는 일왕실의 신체(神體)라는 삼신기(三神器:거울, 옥, 검) 중 거울(神鏡)만을 모셔놨다. 그리고 황령전에 모신 신주들은 왕실의 역대왕과 왕족들인 조상신들이다.

바로 이 사당에는 오진왕 등 백제 계열의 왕과 왕족들의 혼령을 모시고 있는 셈이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裕) 교수는 “삼신기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귀화인들의 신보였다고 본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를 천황이 갖춤으로써 비로소 주권의 표상인 삼신기가 성립되었다. 일본 고대왕조는 귀화인들에 의하여 성립되었다”(天皇家 秘密 1977)라고 단정지었다.

◇이와시미즈하치만궁 종묘의 석등들.

필자는 일본 왕가가 제사 지내온 고대 한국신의 제사 내용을 고증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왕궁인 황거안을 직접 방문(2002년 7월 11일)했다(EBS TV 교육방송 ‘일본황실제사의 비밀’ 2002년 8월 15일 오후 8시30분∼9시20분 방영). 고대의 큰 ‘고구려북’이 놓여 있는 궁내청 직악부 제사음악당에서 필자는 왕실의 모든 제사를 항상 지휘 관장하는 아베 스에마사(安倍季昌, 1943∼, 국내청 式部職樂部 악장보)씨와 면담했다.

그는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1989년 등극∼) 일왕이 참석하는 왕궁의 니나메노마쓰리(新嘗祭)와 한신제(韓神祭) 등 제사의 ‘어신악’(御神樂:제사 축문 노래)에서는 하늘의 한국 천신을 불러 모셔오는 초혼가(招魂歌)인 ‘한신(韓神)’이라는 제목의 축문이 직접 낭창(朗唱)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미애현 이세시)의 공보 담당 신관(神官)인 요시카와 타쓰미(吉川 辰)씨도 확언한 바이다(앞 EBS ‘일본황실제사의 비밀’).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필자는 에도바쿠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교토부 야와타시 오도코노야마에다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을 세운 것은 그의 조상신을 왕도 헤이안경에서 모시기 위한 숭모정신의 발동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일본 제50대 간무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일본왕실 지배의 무가가 된 겐지 가문의 조상신은 다름 아닌 고대 백제인 오진왕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50대 간무왕의 어머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직계 후손인 야마토노니카사(和新笠) 황태후이다. 그 사실은 ‘속일본기’(797년 일본 왕실 편찬)에도 밝혀져 있다”(2001년 12월23일)고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도 그의 68회 생신 기념 기자회견 석상에서 말했다.

이와 같은 백제 왕실의 맥락에서 최초의 백제인 오진왕의 사당은 나라 시대(710∼784)에 기타큐슈 오이타(大分)의 우사시에 세워졌던 ‘우사신궁’이며, 9세기 후반에는 왕실이 있는 헤이안경 지역으로 종묘를 이전하여 온 것이 오늘의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이다. “이곳 종묘에서는 해마다 9월15일 새벽에 칙사(일왕의 사자)가 참여한 가운데 오진왕의 신주를 모시고 오도코노야마 산록의 돈궁(頓宮)으로 가서, ‘국태민안’ 제사를 모시고 방생회(물고기 등)도 갖는데, 방생회는 불교식 법요로 거행한다”고 이나가키 가쓰히코 궁사가 말했다.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은 본래 왕실에서 신도와 불교를 함께 신앙하며 오진왕을 제사 모시게 된 ‘신궁사(神宮寺)’로서 호국사(護國寺)라는 명칭을 함께 갖고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궁사’란 신(神)도 불교를 기꺼워한다고 하는 왜왕실의 종교 정신에서 신토(神道)를 받드는 신사나 신궁에서도 불교 승려인 사승(社僧)을 모셔다 함께 지내게 된 것으로, 나라 시대부터의 일이다. 더구나 그 효시는 기타큐슈 최초의 백제인 오진왕의 사당 우사신궁과 이세신궁(에히메현 이세시의 왕실 신궁)에서부터였다.

좀더 자세히 밝힌다면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은 백제계 기씨(紀氏) 가문(‘신찬성씨록’: 생부는 야마시로의 태수였던 紀兼弼) 태생 고승인 전등대법사 교쿄(行敎 9세기)가 기타큐슈의 우사신궁에 가서 오진왕의 하치만신 신주를 모시고 헤이안경으로 올라와 오도코노야마에다 호국사를 세우면서 동시에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이와시미즈하치만궁을 함께 세워 오진왕의 신주를 봉안하자고 청함으로써 오늘의 종묘 성역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경내에 ‘지장보살당’이 있는 것도 신궁사임을 밝혀주는 일이다.(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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