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술이 아닌 문화재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경주 교동법주를 빚습니다.” 경북 경주의 대표적인 명주로 꼽히는 교동법주(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 기능보유자 최경(63)씨. 이순을 훌쩍 넘긴 그는 요즘도 더욱 빛깔과 향, 맛이 뛰어난 술을 만드는 방법 등을 놓고 고민하고 연구한다. “경주 가서 교동법주 맛을 보지 못했다면 경주에 가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교동법주는 명성이 대단하다.
경주 최부잣집에서 대대로 빚어오고 있는 교동법주는 그동안 최씨의 어머니(90)가 만들어 오다 지난해 최씨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정식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가업을 잇고 있다.
최씨는 30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평범한 회사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198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낙향해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83년 경주에서 열린 정부 행사 때 집에서 만든 술을 선보여 정부 관계자 등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최씨 일가는 이를 계기로 ‘교동법주’라는 이름으로 술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최씨는 이때부터 아내 서정애씨와 함께 교동법주 제조에 나섰다. 어머니와 최씨 부부는 국내 최고의 술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재료 등을 놓고 씨름하는 등 온힘을 다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교동법주는 86년 11월 서울의 문배주 등과 함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어머니로부터 전통 곡주 양조기술을 전수받아 94년 전수교육 조교로 선정됐으며 지난해엔 양조기술 보유자로도 인정받았다.
최씨는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전통 양조기술을 따르면서도 과학적인 방법 등을 동원해 명주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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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술을 빚어온 최경씨가 31일 교동법주를 빚기 위해 찹쌀을 찌고 있다. |
교동법주의 유래는 최씨의 10대조인 최국선씨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조상은 조선 숙종 때 임금님 수라상과 궁중 음식을 관리·감독하는 사옹원의 참봉을 지낸 인물이다.
최씨는 “사옹원 참봉은 종9품에 지나지 않지만 임금이 드시는 음식을 관리하기 때문에 충신의 자손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자리”라고 말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10대조는 대소사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술을 만들었는데, 이 술이 교동법주의 원조가 됐다. 이후 이 술은 350여년간 최씨 집안의 며느리들을 통해 ‘비주(秘酒)’로 전해져 내려왔다.
‘최부잣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씨 집안은 조선 말 전국에서 12대 만석꾼에 꼽힐 정도로 부자였다. 향교와 더불어 교동 땅의 절반이 최씨 집안의 소유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씨 집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늘 북적거렸다. ‘부와 명예를 쌓기보다는 덕을 베풀라’는 집안의 가르침에 따라 가뭄이 들면 곳간을 열어 인근 백리의 사람을 먹여 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최부잣집의 부와 더불어 인심, 덕 등을 느낄 수 있는 술이 교동법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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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 고택 뜰안의 최경씨. |
최씨는“교동법주를 빚는 시기는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6개월”이라며 “여름철에는 술을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생물이 살아 있는 약주여서 온도에 민감해 겨울에야 제 맛을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조 과정은 고급 약주인 청주를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다. 누룩을 띄우고 밑술과 덧술을 만든 후 숙성시키기까지 100일 동안 최씨의 손길과 정성이 함께한다.
그는 가장 좋은 술을 빚기 위해 원료부터 차별화하고 있다. 일반 술은 멥쌀로 제조하는 데 비해 교동법주는 토종 찹쌀을 고집한다. 누룩도 엄선된 밀 누룩만 쓴다. 물은 100년 넘은 구기자나무 뿌리가 드리워진 집안 우물물만 사용한다. 최씨는 ‘명주는 명수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술 담그기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석 달 열흘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술은 원재료 못지않게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까닭이다. 생산량은 하루에 900㎖들이 20병 정도다.
제조시설이 재래식인 탓도 있지만 최고의 술은 희소성과 품격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교동법주를 판매하기 위한 별도의 유통망도 갖추지 않고 있다. 때문에 교동마을 최씨 고택에 찾아가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최씨는“언제라도 똑같은 술맛을 내려고 애쓴다”며 “교동법주는 영리 목적이 아닌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문화재 술로 계속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한번 교동법주를 맛본 사람들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전화 주문을 할 정도라는 게 최씨의 귀띔이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아들과 며느리가 양조기술을 익히고 있어 한결 마음이 놓인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최씨의 아들 홍석(32)씨는 아내와 함께 교동법주 제조법을 배우는 등 대를 잇고 있다.
최씨는“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아들 내외와 함께 더 노력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대량 제조식이 아닌 순수 재래식으로 전통을 이어가며 술을 만들 계획”이라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경주=장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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