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집필자 : nobopark (2006-04-04 15:12) |
퇴계의 생애와 사상적 영향
이황은 일찍부터 경학을 공부하여 동방유학을 집대성하고, 그의 학문 사상과 교육을 통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인간적으로 완벽에 가깝고, 중화중정(中和中正)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황의 도덕과 학문은 조선의 정신적 지표가 되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였으며, 역대의 군왕은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탐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원리로 삼았다. 이황은 태어나 7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 아래서 자랐다. 1528년(중종 23), 28세에 진사(進士)에 합격, 33세에 성균관(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다음 해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공직에 나갔다.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39세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후 승진을 계속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사성(司成)이 되었지만,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면학에 힘쓴다. 그러나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거쳐 45세에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을미사화(乙巳士禍) 때에 화를 입고 일시 파직된다. 나중에 복직되었지만, 곧 사직하고 안동으로 귀향해서 양진암(養眞庵)을 세우고 학문에 힘쓴다. 명종 연간 초기에 단양(丹陽), 풍기(豊基) 군수(郡守)로 부임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학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52세에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 홍문관 교리(校理),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 공조참판(工曺參判)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55세에 또 다시 안동으로 귀향한다. 57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워 본격적으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이황의 사상은 50세부터 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辯論)、저술(著述)、편저(編著)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송원리학통록(宋元理學通錄)』、『인심경석의(人心磬石義)』 및 후배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단(四端七情分離奇瑞)』 등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역작이다. 명종 21년, 66세에 예조판서(禮曺判書)가 되어, 선조 원년 68세에 대제학(大提學), 판중추(判中樞) 겸 지경연(知經筵) 등을 역임하고, 학문계발을 위해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와 『성학십도(聖學十圖) 』를 저술하였다.
이황은 이이(율곡)와 함께 조선의 유학사상에 있어서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서 주자(주희)의
이기이원론적인 사상을 계승하여, 완성하였다. 이황은 우주만물은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의 하나라도 없으면
우주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메이지(明治) 시대에 공포된 강력한 천황제를
위한 '교육칙어(*1)'의 기초가 되었다. 즉, 옳은 것은 하늘의 뜻이고, 옳은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
학문과 인생관의 최종결정은 경(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이 경(敬)을 70년 생애를 통해서
실천하였다.
이황의 활동은 연구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학을 위한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도산서당 등을 세워 실천한 교육활동은 죽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황은 1570년(선조 3)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선조는 문순공(文純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대광보국숭녹대부 의정부령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을 추증(追贈)하였다. 1574년(선조 7) 3월 제자들이 모여 「도산(陶山)은
선생이 도(道)을 강론한 곳이므로 서원을 세워향 한다」고 하여 서당 뒤편에 서원을 지어 다음 해에 낙성한 것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다.
도산서원의 사당, 상덕사(尙德祠)에는 「퇴도리(退陶李)」라고 쓰여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황의 사상과 학풍은 문하생 서애 유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 한강
정구(鄭逑)
등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嶺南學派)에 계승되어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
* 1) 교육칙어(敎育勅語)
정식명칭은 「교육에 관한 칙어(敎育ニ關スル勅語). 교육칙어는 315자로 되어 있으며 쉼표, 마침점 등이 일절 없어 당시의 생도들조차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하는 난해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1890(明治23)년에 공포되어, 국민도덕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다. 2차대전 이후, 당연히 악의 상징으로 여겨져 1946년부터 봉독과 신격적 취급이 금지되었고, 1948년에는 실효확인이 결의되어 이후로는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되었다. 교육칙어의
원안은,
당시
내각법제국
장관
이노우에(井上毅)와
추밀고문관
모토다(元田永孚)에
의해
기초
되었는데,
천황친정론자인
모토다(元田永孚)는
메이지유신
이후에
밀어닥치는
서양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으로
일본의
전통문화·사상이
경시되는
것을
우려하여
메이지
천황에
충효,
의절,
성실의
미풍을
교육의
기초로
하는
신민(국민)의
도덕교육(특히
유교사상)의
중요성을
진언하였다.
이에
메이지
천황은
이노우에와
모토다에
명하여,
부모에
대한
효와
부부의
화합,
준법정신,
유사
시의
의용심
등
12개
항목의
덕목(도덕)을
위해
신민과
함께
천황
스스로
노력하겠다는
내용으로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학술·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자칫
소홀히
여기기
쉬운
도덕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쇼와(昭和)
시대에
들어오면서
교육칙어는
국민교육의
사상적
기초로서
'신성화'되었다.
교육칙어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천황황후의
사진과
함께
호안덴(奉安殿) 또는 호안코(奉安庫)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교육칙어를
외우도록
하였다.
특히
1938년(昭和
13)에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가
제정·시행되면서
교육칙어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군국주의의
경전으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최근 오성철
교수(서울교대)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68년에
공포한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교육칙어’, ‘국기에
대한
맹세’는
‘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ノ誓詞)’(1937년
10월
제정)를
모방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10월유신'(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의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금지, 헌법의 일부 효력정지와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대행, 새 헌법개정안의 공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이 발표,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91.5%의 찬성으로 확정. 12월 27일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한 전면부정과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력집중)은 박정희가 일본을 통해서 배운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고 한다. [주요 참고문헌]
- http://www.tanken.com/cyokugo.html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주리론(主理論) 성선설(性善說)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은 맹자의 『공손축(公孫丑)』에 나오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가 되는 것(仁: 惻隱之心, 義: 羞惡之心, 禮: 謝讓之心, 智: 是非之心)으로,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 칠정(七情)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으로, 인간의 본성이 사물에 접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性理學)이 성립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즉, 심즉성(性卽理),
이즉심(理卽心)에
대해서는 이해를 했지만, 심즉성(心卽性)까지는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나 유교를 심성수양(心性修養)의 근본으로 삼고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사상으로 수립하고자 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의 '미발(未發)'을 '성(性)'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심의 '이발(已發)'을 '정(情)'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미발의 성'이 발현한 것이 '정(情)'이라는 점에서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같은 '정(情)'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희(朱熹:
1130~1200)는 이미 사단(四端)을 '이지발'(理之發), 칠정(七情)을 '기지발'(氣之發)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이기론).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논쟁의 대상이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정지운(鄭之雲:
1509~61)의 『천명도(天命圖)』에서인데, 즉 사단(四端)의 발현은 순리이며, 칠정(七情)의 발현은 기(氣)가 겸한 것으로
설명했다.
이황(李滉 :
1501~70)도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해서 일부 수정을 하면서도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현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현한 것이라고 하여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이(理)와 기(氣)로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에 기대승(奇大升 : 1527~72)이 이황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황과 기대승의 이기분속(理氣分屬)의 논쟁은 8년이나 계속되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분속(理氣分屬)의 논쟁이 16세기 후반에 철학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이 시기의 조선 성리학에 이제까지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이기일원(理氣一原)의 이기론(理氣論)이 성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이기이원론(理氣一原論)은 이(理)를 기(氣)의 존재 근거로까지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키며 이기일원론(理氣二元論)은 이(理)를 기(氣)의 조리(條理)로만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논리적 충돌은 기발(氣發)과 함께 이발(理發)을 인정하는 견해와 기발(氣發)만을 인정하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바탕을 두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이(理)와 기(氣)로 분속(分屬)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기일원론(理氣一原論)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설명함으로써 이(理)와 기(氣)의
분속(分屬)에 대해 반대 입장을 주장하였다.
기대승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황은 이기(理氣)의 관계가 비록 밀접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거기에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며,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함에 이(理)가 올라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고
해서 종래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즉 사단(四端)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 속에 있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칠정(七情)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각각을 '이지발(理之發)'과 '기지발(氣之發)'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견해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라고 한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기대승과 그 후의 이이(李珥:
1536~84)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
속에 숨어 있는 이(理)가 기(氣)를 타고 발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하는 바가 같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러한 견해를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호발설(互發說)과 겸발설(兼發說)로 정리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론적 해석은 이후 우리 나라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연구의 대상으로 유지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성리학을 이해하는 데 깊이를 더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황의 호발설(互發說)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리론(主理論)'이라 하고, 이이의 겸발설(兼發說)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되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율곡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에 의하면, 유물론적 사고(主氣論)가 ‘정(합리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관념론(主理論)에 대한 ‘반(진화)’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도막부와 메이지 정부가 유교의 원리를 수정하여 받아들였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사회발전의 과정에서 볼 때 유교의 모순을 극복한
‘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왜곡과 수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왜곡된 것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려는 행동은 시대착오적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조적 원리주의보다는 발전적 수정주의가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
영남학파가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기호학파는
현실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협상할
줄
아는
타협능력이
뛰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현장에서
뛰는
율곡이
이론의
퇴계보다
더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완고한
퇴계는
많으나,
유연한
율곡은
적다"고
김동렬은
지적하고
있다. (http://drkimz.com
에서
‘column’)
退渓・李滉の生涯と思想的影響 李滉は、早くから経学を研究して東方儒学を集大成し、その学問思想と教育を通じて数多くの人才を輩出した。人間的に完璧に近く、中和中正の境地に至ったと言われている。李滉の道徳と学問は朝鮮において精神的指標となった。朝鮮前期の性理学と後期の実学はすべてここに端を発し、歴代の君王は李滉の『聖学十図』を耽読して国を治める根本原理とした。 李滉は生後7ヶ月で父親を亡くし、母と叔父の下に育てられた。1528年(中宗23)、28才で進士に合格し、33才のときに成均館(国立大学に当たる最高の教育機関)に入り、翌年34才で文科に及第して、始めて役職に就いた。典籍、戸曹佐郎を経て39才のとき、弘文館の修撰になった。その後、昇進を重なって成均館の司成になったが、間もなく辞職して故郷に戻り勉学に励む。しかし、再び朝廷に請われ、弘文館校理を経て45才のときに典翰になった。 乙巳士禍のときには禍を被って一時罷職される。のちに復職したものの、間もなく辞職。し、安東へ帰郷し養真庵を建て、学問に励む。明宗年間初期に丹陽、豊基郡守に勤めたこともあるが、それは学問のためであった。52才で召喚され弘文館校理、大司成、副提学、工曹参判などの要職に任命されたが、すべて断って55才でまた故郷の安東へ戻る。57才にして陶山書堂を建て、本格的に学問研究に専念した。李滉の思想は、50才から60才にかけて完成され、辯論、著述、編著などの重要なものはすべてこの期間に成された。『啓蒙伝疑』、『朱子書節要』、『宋元理学通録』、『人心磬石義』及び後輩の奇大升と問答した『四端七情分離奇瑞』などは、その中でも代表的な名著である。 明宗21年、66才で礼曹判書になり、宣祖元年、68才で大提学、判中枢兼知経筵などを歴任して、学問を啓発するために有名な『戊辰六条疎』と『聖学十図』を著した。李滉は李珥(栗谷)とともに、朝鮮の儒学思想における最も代表的な学者として、朱子(朱熹)の理気二元論的な思想を継承し、完成した。李滉は、宇宙万物は理と気の二元的要所に構成され、その中の一つでも欠ければ宇宙原理が表現できないと説明した。李滉の学説は日本にも大きい影響を与えた。特に、明治時代、強力な天皇制を構築するための、教育勅語(*1)の基礎となった。つまり、正しいものは天の志であり、正しいことのため努力することは人の道理であるという論理。学問と人生観の最終決定は、敬から探ることができるものとして、この敬を70年の生涯を通じて実践した。 李滉の活動は研究著述だけに止まらず、後学のための教育にも力を注いだ。陶山書堂などを建てて、その教育活動は亡くなる前まで続けられた。 李滉は、1570年(宣祖3)12月8日に逝去した。死後、宣祖は文純公の諡号を授け、大匡輔国崇禄大夫議政府領議政を追贈した。1574年(宣祖7)3月、弟子たちが「陶山は先生が道を講論した所であるため、書院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書堂の後方に書院を建て、翌年の夏に落成したのが陶山書院である。陶山書院の祠堂、尚徳祠には「退陶李」と書かれた位牌が安置されている。 李滉の思想と学風は、門下生の柳成龍、金誠一、鄭逑らを中心として嶺南学派に継承され、儒学界に大きい影響を与えた。 註
*
1) 教育勅語 正式には、「教育ニ関スル勅語」。教育勅語は315字からなっていて句読点や段落、ルビなどいっさいない、当時の生徒さえ意味がよく分からなかったという難解な文章。明治23年(1890)に発布されて、国民道徳の絶対基準とされた。戦後、当然ながら悪の象徴とされ、1946年に奉読と神格的取り扱いが禁止、1948年には失効確認が決議され、以後は、触れることさえタブー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教育勅語の原案は、内閣法制局長官の井上毅と枢密顧問官の元田永孚によって起草されたが、天皇親政論者であった元田永孚は、明治維新後のやみくもな西洋文化への礼賛により、日本古来の文化・思想、精神的支柱が軽視されることを憂慮して、明治天皇に対して古来からの忠孝、節義、誠実の美風を教育の礎とすべく、臣民(国民)に対して道徳教育(特に儒教思想)の再興の重要性を進言した。そこで明治天皇は井上と元田に命じて、父母への孝行や夫婦の和合、遵法精神、万一の事態が生じた場合での義勇心など12の徳目(道徳)を語り、臣民とともに天皇自らもさらなる発展に努力したいと願い誓う形式でまとめたとされている。これは、西洋の学術・制度が入る中、軽視されがちな道徳教育を重視したものである。 しかし、昭和時代に入ると、
教育勅語は
国民教育の思想的基礎として「神聖化」され、ほとんどすべての学校で天皇皇后の写真とともに奉安殿・奉安庫と呼ばれる特別な場所に保管された。教育勅語の文章を暗記することも強く求められた。特に戦争激化の中にあって、1938年(昭和13年)に国家総動員法(法律第55号)が制定・施行されがら、本来の趣旨からかけはなれる形で軍国主義の教典として利用されるにいたった。 最近、オ・ソンチョル教授(ソウル教育大学)をはじめ韓国の一部の知識人から、朴正煕軍事政権が独裁政権を維持するために1968年に公布した「国民教育憲章」と「国旗に対する誓い」は日本の「教育勅語」と「皇国臣民ノ誓詞」(1937年10月制定)を真似たと非難する主張もしている。 そして、「十月維新」(1972年10月17日、非常戒厳令の宣布、国会解散、政党及び政治活動の禁止、憲法の一部效力停止と非常国務会議による代行、新しい憲法改正案の公告等を内容とする大統領特別宣言が発表、11月21日維新憲法に対する国民投票が行われて投票率92.9%に91.5%の賛成で確定。12月27日、朴正煕が大統領に就任。三権分立、牽制と均衡という議会民主主義の基本原則にたいる全面否定とともに大統領に超憲法的権力集中)は、朴正煕が日本を通じて学んだ天皇制イデオロギーの総和であったと主張している。 [主要参考文献] ・
『ウィキペディア Wikipedia』 ・ http://www.tanken.com/cyokugo.html
四端七情と李滉の主理論 性善説の根拠でもある四端は孟子の『公孫丑』の上編に出る「仁・義・礼・智」の端緒(仁:
惻隠之心、義:
羞悪之心、礼:
辞譲之心、智:
是非之心)で、先天的で道徳的な能力である。これに対して、七情は『礼記』の礼運編に出る「喜・怒・哀・懼・愛・悪・欲」の端緒で、人間の本性が物事に接しながら発現される自然的な感情である。 四端と七情に対する本格的な論争は中国の宋代に性理学が成立してからである。それまで儒教では人間の心性について深く触れていなかった。つまり、性即理、理即心は理解していたが、心即性にまでは理解していなかった。 しかし、儒教を心性修養の道理として拡大して理解し、さらにそれを体系的で統一的な世界観を樹立しようと思っていた性理学では、人間の心性について理論的に説明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性理学では心が物事に触れていないいない状態、すなわち心の未発を「性」と言う。そして、心が事物に既に触れていた状態、すなわち心の已発を「情」と言う。つまり、「未発の性」が発現したのが「情」であるという点では、四端と七情は同じ概念だといえる。しかし、朱熹(1130~1200)は、四端を「理之発」、七情は「気之発」と区分して説明したが、理と気を区分しなかったのが当時の主流であった。 朝鮮では、性理学が導入された初期から16世紀まで四端と七情をそれぞれ理と気に区分して説明したのが一般的であった(理気論)。四端七情が論争の対象となった直接的なきっかけは、鄭之雲(1509~61)が『天命図』の中で四端の発現は順理で、七情の発現は気が兼ねたことであると説明されていたことである。李滉(1501~70)も鄭之雲)の『天命図』を若干修正しながらも、四端は理から発現したことで、七情は気から発現したことと分けて説明した。 しかし、1559年(明宗14)に奇大升(1527-72)が李滉の四端七情論に対して疑問を提起しながら、李滉と奇大升の理気分属論争は8年間も続いた。 四端七情の理気分属争が16世紀後半に大きな哲学的論争の的となった背景には、この時期の朝鮮性理学にこれまでの理気二元論とは違う理気一原の理気論が台頭し始めたという事情があった。形而上学の側面において理気一原論では理を気の存在根拠にまで認めていたが、理気二元論では理を気の條理しか認めていなかった。 このような相違は、四端七情論では気発と一緒に理発を認める見解と気発のみを認める見方になった。李滉は理気二元論に基づいて四端と七情をそれぞれ理と気に分けて説明していた。しかし、奇大升は理気一原論的な見方に基づいて四端と七情を説明し、李滉の理気分属説に対して反対の見方を示していた。 奇大升の見方に対して、李滉は理気の関係が密接して、四端は理が発して気がそれに随うこと(理発気隨之)、七情は気が発して理がそれに乗ること(気発理乗之)と修正説明し、それまでの主張から一足退いた。すなわち、四端はその由来するところが心の中にある本然之性で、七情はその由来するところが気質之性で、それぞれを「理之発」と「気之発」に区分することもできると説明した。李滉のこのような見解を理気互発説と言う。 理気互発説に対して奇大升と以後の李珥(1536-84)の見方では、四端と七情は気質之性の中に隠れている理が気に乗って発する、という点ではその由来するところが同じである。奇大升と李珥のこのような見方を「理気兼発説」と言う。 16世紀後半、互発説と兼発説にまとめられた四端七情の理気論的解釈は以後、朝鮮性理学の重要な理論的研究の対象となって、多様な見方が提示され、さらに性理学を理解するうえで欠かせないきっかけになった。その中で、李滉の互発説を支持する見方を「主理論」、李珥の兼発説を支持する見方を「主気論」と言って、朝鮮性理学の両大流れになった。 [P.S] 次のような余談があります。「退渓と栗谷、どっちが偉いか」という質問がそれである。「1,000ウォン札の人物図案(肖像画)に入っている退渓より
5,000ウォン札の人物図案(肖像画)に入っている栗谷が偉い」と答える人がいる。これに対して、「5,000ウォン札より1,000ウォン札が多く通用しているから、退渓が偉い」と答える人もいる。勿論、笑い話である。 ところで、明らかなことは、栗谷(李珥)の「理気一元論」は退渓の「理気二元論」に対する進化論である。ヘゲルやマルクスの弁証法的論理から観ると、唯物論的思考(主気論)が
「正(合理的)」であってもそれは観念論(主理論)に対する「反(進化)」である。ということで、江戸幕府や明治政府が儒教の原理を修正して受け入れたとしても、それは社会発展の過程から見ると、儒教の矛盾を克服した「合」と言えよう。 しかし、歪曲されたことを修正せずに金科玉条の如く守ろうとすることは時代錯誤的な考え方である。私見であるが、教祖的原理主義より発展的修正主義が現実的に望ましいことだと思う。しかし、歪曲と修正は根本的に違うことである。 [補足] 「退渓は易しく、栗谷は難しい」と言う主張があります。 ということは、退渓は政治一線(官僚)から退いて在野で後学を教えながら政治に干渉しようとしたことに対して、栗谷は官僚として要職を勤めながら現実政治(改革)に積極的に参加しようとした。実際、栗谷の畿湖学派が科挙に合格して中央官僚に進出した人が多い。これに対して、退渓の嶺南学派はそうでなかった。嶺南儒林と呼ばれた栗谷学派は、在野でいながら現実政治に干渉しようとした。このような伝統は今も残っており、安東を中心にした嶺南地方では官僚(公務員)より学者を評価するきらいがある。 嶺南学派が現実に参加しなかったため、妥協能力が不足であったとすれば、畿湖学派は現場で積極的に参加しようとしたため交渉する妥協能力が優れていたと言えよう。要するに、現場の栗谷が理論の退渓よりストレスを受けるという話である。「今日、頑固な退渓は多いが、柔軟な栗谷が少ない」と、キム・ドルリョルは指摘している。 (http://drkimz.com
にて‘column’)
|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외톨늑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