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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pieta999 (2006-01-03 15:55) |
조물주가 남녀를 분별하여 만드시고 그 종족을 보존케 하신 이후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결혼(혼례)이 아닐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 즉 혼인이란 남자가 장가를 든다는 뜻이자 여자가 시집을 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사랑해서 이뤄져야 할 혼례(결혼식)는 혼인의 예로서 젊은 남녀가 하나로 합쳐 위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 공경(또는 효)을 표하고 그 아래로는 자손을 후세에 존속시켜 대를 끊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서구문물이 대량 유입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전통개념들이 다소 변화된 느낌이 없지 않으나 공식적인 육체의 결합과 부부 간 고유의 정신관계를 고르게 나눠 갖는다는 점, 특히 가정이라는 하나의 공동 사회생활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넓게 보면 남녀는 혼인을 통해 가정을 만들고 이는 다시 다양한 규칙과 법규 등 제도를 다지게 된다. 이로써 가정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재생산된다. 따라서 결혼이란 단순한 남녀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사의 기초적 단계랄 수 있다. 혼례가 옛부터 인생의 일대 경사로 축복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차원에서이다.멀리 남 얘기 할 것 없이 가정의 소중함과 그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모습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체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약 600년 전 서구에서의 결혼은 어떠했을까.
<얀 반 아이크_Eyck, Jan van, 1395?~1441>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화가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통해 그 단면을 짚어 볼 수 있다. 먼저 <얀 반 아이크>라는 화가는 그의 형인 <후베르트>와 함께 '유화'를 창시한 사람이다. 유화가 발명이 되었던 말던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을 그게 그렇지 않다. 유화가 발명된 이후 그림은 보다 사실적일 수 있었으며 당시 더불어 개발된 '원근법'과 '명암법'은 그림을 보다 천천히, 정확하게 그릴 수가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전의 달걀반죽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훨씬 멋있게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눈으로 인지하는 자연사물, 즉 3차원적 공간을 캔버스라는 2차원적 공간에서 확실히 녹여 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보다 간단하게 말하면 유화의 발명은 수백년 이어져 온 그림 기법을 완전히 바꾼 것은 물론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지금은 비록 보편적인 표현 재료로서 활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를 이용한 <얀 반 아아크>의 그림 <아르놀피 부부의 초상>은 이전 기독교적 세계관을 버리고 관찰을 통해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인간의 삶을 담은 초기 대표작이라는 것, 수수께끼 같은 상징을 심어 놓아 당시의 우주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랄 수 있다.
보다시피 이 그림은 결혼식 장면을 담은 것이다. 아니, <결혼증명화>라는 게 보다 더 정확하다.
그런데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결혼식장이 아니라 조용한 실내, 즉 '신혼방'이다. 당시엔 보통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신혼방에서 몰래 결혼식을 치루는 것이 어딘가 수상하다. 바로 이 결혼이 가문끼리 하는 일종의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신랑의 표정처럼 그가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랑 신부의 입장차이가 눈에 확연하다. 옛날 모 개그맨이 했던 '숭구리 당당'의 자세를 취한 채 왼쪽에 멋대가리 없이 서 있는 기다란 얼굴의 신랑이름은 <조반니 아르놀피>라는 사람으로 이탈리아에서 무역상으로 떼돈을 벌은 사람이다.
그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 들었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판단력도 우수해 정부 재무담당이라는 요직을 차지하는 등 당대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아주 잘나가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신랑과는 다르게 침착하고 얌전하며 매우 순진해 보이는 신부는 살포시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여자의 이름은 <조반나 체나미>라는 사람으로 이탈리아 유명 은행가의 자손. 당시에도(?) 저런 스타일(조신하고 차분한)의 여자가 신부감으론 최고였다.(나도 그런 여자가 좋다...-.-) 그런 그녀가 이제 <브뤼주(지금의 벨기에)>라는 이 동네에서 사시 눈을 한 남자와 신혼살림을 차릴 요량이다.
아무튼, 이 그림이 다른 어떤 그림들보다 특이한 것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울]먼저 뒤쪽 벽에 걸려 있는 볼록 거울의 테두리를 보면 주위에 동그랗게 무언가가 그려져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죽음의 길을 걸을 때 머물렀던 10개 장소이다.(참고로 중앙일보사 옆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대문 성당>에 가면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도 이 '십자가의 길'이 조각작품으로 새겨져 있다. 한 때 어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방화를 해서 난리 났었던 그 성당이다.)
헌데 거울 속을 유심히 보면 방 반대의 정경을 환히 비추고 있고 거기엔 아르놀피 부부 외에 또 다른 두 남자의 모습이 들어있다. 이들은 이 결혼식을 지켜보며 아울러 증인까지 맡게 되었다. 누굴까? 그림이 작아서 잘 안보이겠지만 저 거울 속에는 붉은 색 옷을 입은 남자와 푸른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데 푸른 색은 화가 <얀 반 아이크>이며 붉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은 그의 조수이다.
그 당시엔 화가는 푸른색 옷을 조수는 붉은 색 옷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 위를 보면 글씨가 쓰여 있는 데, 거기에는 라틴어로 "얀 반 아이크가 이 자리에 있었노라, 1434년" 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 결혼을 <얀 반 아이크>라는 화가가 증명한다는 것이다.(주인공 외 거울에 비친 인물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그림은 약 200년 후인 1656년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스 매나니스>가 있다.)한편 거울 옆엔 [묵주]가 걸려 있다. 묵주가 반짝 거리는 것으로 보아 재질은 크리스털이다. 크릴스털은 순수와 순결을 상징하며 부자 신랑이 신부에게 주로 선물했었다. 두 번째는 네티즌들이나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논란을 많이 산 부분으로 [볼록한 신부의 배]이다.
어? '속도위반'을 한 건 아닐까? 아니다. 요상스럽게도 당시 잘나가던 첨단 유행 복식스타일은 복부 부분을 볼록하게 하는 것이었다.(별나다...-.-)더구나 이들 부부의 기록을 보면 자식이 없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 임신한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지라>에는 눈썹이 없다. 왜 없을까? 다빈치가 눈썹 그리는 것을 잊어먹었나? 아니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지워졌나? 그도 아니라면 혹시 눈썹 없애는 게 그 시절의 유행?..이는 다음에 다시 논하기로 한다.)
세 번째 상징성은 천장에 달린 놋쇠로 만든 [샹들리에]에 있다. 가만히 보니 촛대는 많은 데 하나의 촛불만 켜져 있다. 더구나 대낮인데 초를 켜놓았다. 이유는 뭘까? 이 부분에서 그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촛불이 한 자루 켜져 있는 것은 당시 풍습으로 결혼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발 밑의 [강아지](우리나라 삽살개를 닮은 것 같다. 참고로 울집 강쥐 <뚱순이>는 서양 똥개다.)와 더불어 세속적으로 다산을 의미한다.
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여자들이 애를 많이 낳으라는 뜻에서 침대 머리맡에 늘 촛불을 켜 놓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네번째는 [신발]. 화면 왼쪽 아래에는 신랑이 대충 벗어 놓은 신발이 있고 안쪽의 소파 밑에는 신부의 붉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다.(성격 보인다.-.-) 이 부부는 현재 맨발이라는 것의 반증이다. 결혼식에서 왠 맨발? 이는 신성한 결혼 서약을 하는 자리에서는 신이 만든 땅에 맨발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곳은 성스러운 땅이니 신을 벗으라"라고 한 대목에서 연유한다. 그만큼 결혼은 성스럽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부부의 신발이 한 군데로 모아져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다. 이유는 이들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화가가 은근히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창문가에 놓여진 [오렌지]이다. 지금은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 가면 한 다발에 몇 천 원 밖에 안 하지만 당시엔 오렌지가 상당히 비싼 과일이었다. 정열과 열정을 상징하는 이 과일은 가시적으로 이들이 이탈리아 사람들 임을 암시하며 꽤 부자임을 나타낸다. 당시만 해도 오렌지는 지중해 연안에서만 생산되었으며 그만큼 비쌌다.(아! 발 밑의 양탄자를 보라. 이 역시 굉장히 비싸보인다.-.-터키산이다.) 여섯 번째는 붉은 천에 덮힌 [침대]. 붉은 천은 귀족적이며 침대는 왕가 또는 귀족들의 재산정도와 지위를 나타낸다. 지금은 어느 집에나 있는 침대이지만 당시 서민들에겐 저렇게 좋은(멋진 조각이 새겨져 있는) 침대를 사용한다는 건 너무나 먼 이야기였던 셈이다.
저 당시에도 결혼이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 신중하게 선택했으며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다. 심지어 결혼을 작은 우주끼리의 만남이라고까지 여겼었다. 물론 그것이 정략적이었든 사랑때문이었든 혼인이란 인생에 있어 중요한 과정이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지금도 우리는 가락지를 끼워주며 백년해로 하자 다짐한다. 그러나 과연 처음의 그 다짐처럼 혼신으로 서로에게 신뢰와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되물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Tip]학교 다닐 때 다 배워서 알겠지만 <르네상스>란, 15세기(정확히 1452년)이탈리아 피렌체를 기점으로 불붙은 사조로서 'Re(다시)+naissance(태어남)'의 조합어, 즉 '부활'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과거(헬레니즘: 인간중심의 사상. 신을 중심으로 한 것은 헤브라이즘.)에 뿌리를 두고 다시 새롭게 인간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을 다른 말로 <거울의 예술>이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사람으로 나오는 관찰이라는, 인지와 형상의 재현이라는 르네상스 예술의 조형적 이상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또한 당시의 우주관은 자연을 대우주로,인간을 소우주로 보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지적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대자연을 소우주인 인간과 함께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무작정의 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물론 인간이 곧 자연자체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정신은 이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라는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이어진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특출하다.(근데, 이 둘은 만나면 으르렁 거렸다. 대체로 먼저 시비를 거는 것은 성질이 지랄맞은 미켈란 젤로였다. 자기 보다 2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다빈치에게 말이다. 나쁘다.)
글/홍경한(미술평론가)
[그림설명] 1)얀 반 아이크.<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목판에 유채. 81.8×59.7cm 2)'얀 반 아이크가 지금 여기 있었노라(Johannes de eyck fuit hic)라는 글씨와 작가가 비춰진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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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pieta999님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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