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도법 스님·김용택 시인 지리산 숲길 대담 | |||||||||||||
2008 06/10 뉴스메이커 778호 | |||||||||||||
지리산을 걷다 “걷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과의 대화입니다”
도법 스님과 김용택 시인이 만나 대담을 나눈 5월 27일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는 굵었지만 하늘은 이상하게도 환했다. 김용택 시인은 “날이 참 맑고 좋다”고 말했다. 비 오는 날을 ‘맑은 날’로 표현하는 시인의 미세한 감각이 역시 예사롭지 않다. 운무가 하얗게 지리산을 에워쌌다. 좀처럼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길에 대한 질문과 강설이 아름답게 이어졌다. 분노와 한탄, 그리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도법 스님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논리는 단호했다. 김 시인은 투박한 화법으로 참석자를 웃겼지만 실상 그의 이야기 속에 배어 있는 페이소스는 눈물겹다. 도법 스님은 실상사에 머물던 1998년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생태계 파괴 현상을 현대 문명의 위기로 진단, 대안 문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자연과 지역, 농촌, 먹을거리를 지키기 위한 사업을 전개했으니 그것이 이른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다.
도법 지리산 숲길은 굴곡이 많은 길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총 연장이 300㎞에 달할 것이므로 중간 중간 숙박할 수 있는 곳도 구상하고 있어요. 이 길은 탐방객들의 도보 여행지기도 하고 지리산 일대 주민들의 생태 자립 마을 공동체를 가꿔내는 장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길이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지만 현대의 길은 속도와 생산성만 추구하지요. 생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만남의 길이 될 수 없어요. 지리산 숲길은 오직 걷기만 하는 길입니다. 지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리산을 지킬 수 없어요. 자연생태적 가치와 공동체 가치를 중심에 두고 지리산 지역 섬진강과 경호강 안의 자연공동체, 이웃공동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죠. 원래 안보다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지리산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김 우리는 산 기슭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농촌공동체 문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숲길입니다. 그 길은 얼핏 원시적인 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굉장히 걷기 편하고 과학적인 길이지요. 도법 20세기에 추진했던 개발과 성장 중심의 사회 발전 형태는 대재앙이에요. 생명·평화·공동체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바로 지리산 숲길 만들기의 취지입니다. 2003년 3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한 탁발 순례가 지리산 길 구상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찰의 삶과 문화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원래의 안은 섬진강, 경호강 순례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소 축소되었습니다. 김 산을 오르는 것과 산 주변을 걷는 것 사이에는 가치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산을 즐기는 두 가지 방식에는 삶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개입돼 있다고 봅니다.
도법 등산문화는 정상을 향해 몰려드는 것이지요. 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행태입니다. ‘산을 정복한다’는 만족감은 사실 부질없는 환상일 뿐입니다. 도대체 산을 어떻게 정복한다는 말인가요. 먹고 놀자 식의 관광문화도 문제입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갈 수 없죠. 자기 성찰과 걷는 문화를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지리산을 순례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 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 친구와 친구, 아이들과 지역 주민이 만나는 장이 숲길 순례입니다. 아주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저절로 터득하게 돼 있어요. 김 아름다운 길이 사라지고 있어요. 길에는 자동차만 가득하죠. 아름다운 석양이나 무지개, 흐드러지게 핀 꽃과 같은, 우리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길의 친구들이 사라졌습니다. 도법 우리나라 도로 정책은 국도 4차선 정책이에요. 4차선 공사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길이 사라졌습니다. 구례 하동간 섬진강 꽃길이 대표적이지요. 지자체와 지역 주민은 4차선 공사를 지지하지요. 새만금은 전국적인 반대 여론에 부딪혔지만 지역 주민들은 찬성했잖아요. 그것과 같은 이치로 아름다운 2차선 길을 폐지하자는 겁니다. 안목과 철학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어요. 지리산 길은 어디를 가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걷기 위해 만든 길이죠. 걷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대인은 걸음을 잃어버렸어요. 걸음을 통한 성찰의 기회도 상실했죠.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누구나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숲길 순례는 걸음 자체를 즐기면서 이 길 위의 모든 것을 만끽하게 합니다. 길 위, 길 주변의 자연, 문화, 사람, 문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요. 시를 외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김 걷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시골길을 걸으면 대상이 눈에 나타납니다. 상대가 있는 것이죠. 자아만이 아닌… 상대를 바라보는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자기 발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게 곧 성찰의 단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대단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사람들은 바라보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상실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TV에서 본 것만 그리려고 하지요. 걷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과 대화하는 일입니다. 지리산에는 마을이 있지요. 그 마을의 삶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리산 숲길은 마을 문화를 복원, 생성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저는 논두렁 길 걷는 것을 좋아해요. 거기엔 온갖 생물이 있지요. 마을 하나를 자세히 보는 것도 가능해요. 아주 설득력이 있는 사업입니다. 도법 스님 혼자 걸으면 재미 없지요.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이 생긴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을 상업적 욕심으로 망칠까봐 두렵습니다. 도법 이 길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또 하나의 목적은 도시 문명을 구제하자는 겁니다. 농촌공동체가 살아야 도시가 살아요. 농촌공동체를 되살리는 길… 어떻게 가능할까요. 도시인들로 하여금 이 길을 통해 직접 몸으로 자연생태를 만나고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건강하고 책임 있는 소비자가 되게 하자는 것이지요. 이 길을 통해 도시인의 각성을 호소해야 합니다. 지역 주민들은 자연과 마을공동체에 대해 의외로 무지해요. 이들로 하여금 지역의 문화적·생태학적 가치에 눈뜨게 하자는 취지도 있습니다. 농부로서 자기가 선택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게 만드는 길이 바로 이 현장입니다. 김 농촌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상당히 절망적이에요. 농촌에는 사람이 없죠. 일하고 먹고 노는 공동체가 사라졌습니다. 지리산 길의 문화지리학적 가치는 그 공동체를 살리는 일인데 마을과 마을을 이어갈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길입니다. 그런 네트워크가 도시인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봐요. 도법 자연생태적 가치, 이웃의 가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상대의 존재가치를 무시한 이기성이 횡행하지요. 이 길을 통해 만나야 하는 문화는 이웃 사촌과 품앗이 정신입니다. 숲길을 걸으면 역사 속에서 마을과 마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 의미의 길은 이웃과 이웃, 집과 생산 현장을 연결하는 길이지요. 그 길을 통해 우리 문명사의 모든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온갖 이야기가 거기에 서려 있습니다. 고향처럼 그리워할 수 있는 따뜻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순례 문화 정착이 필요합니다. 김 요즘엔 시골에도 골목길, 돌담길이 사라졌어요. 그러나 지리산 주변에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마을에 살아 있는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를 복원해야 해요. 엄청난 지리산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지게 해서는 안돼죠.
김 제가 연작으로 쓰고 있는 책 ‘진메마을 이야기’가 그런 생태지도예요. 저는 물 길 속 바위 모습까지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책에 그림을 보태 진짜 생태지도를 그리자고 생각했어요. 도법 성대 건축과 대학원 교수와 학생들이 보름간 머물면서 실상사 주변의 생태지도를 그린다고 합니다. 실상사 역시 이곳 자연과 문화의 일부분이니까요. 생태지도는 주민들의 참여가 바람직합니다. 생태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지역을 사랑하고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 지리산 길은 빨치산 길이기도 합니다. 제 고향에는 6·25 당시 남로당 전북도당 본부가 있던 회문산이 있어요. 그 산을 중심으로 숱한 살육이 벌어졌지요. 아직도 빨치산 위령제를 지냈다고 감옥에 간 교사가 있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좌와 우의 문제도 이젠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도법 저는 좌우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니 잡혀갈 염려는 없습니다(웃음). 좌와 우의 문제는 아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봐야 해요. 강대국에 의한 이념 대립에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좌익도 우익도 다 희생자라는 것이죠. 어느 한 쪽만 옳다고 보는 것은 객관적인 시각이 아닙니다. 김 지리산은 산을 중심으로 문화를 형성한 유일한 곳입니다. 산이 순하기 때문이죠. 이곳 사람들은 다 산업이 비슷하니까. 도(道)가 달라도 친구처럼 지내지요. 걱정스러운 일은 지리산 숲길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구석구석에 식당 여관 민박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도법 숙박시설을 만든다고 해도 마을의 집을 활용하자는 것이죠. 트레일 주변 경관을 헤치는 상업시설을 막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있어야 해요. 김 전국의 아름다운 강, 산, 바위, 나무, 길을 지키는 운동이 필요해요. 당산나무와 정자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산문시, 한 마당 판소리예요.
도법 지리산 주변엔 마을마다 오래된 나무가 있어요. 마을 회관이지요. 언론 기관 역할도 해요. 김 마을 뒤 느티나무가 당산나무죠. 그 나무는 마을의 나이와 비슷해요. 그걸 심어놓고 마을을 만든 거죠. 정자나무는 느티나무도 있지만 팽나무·소나무·참나무를 심기도 해요. 우리 동네는 강가에 심어놨어요. 아이들이 물가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나 노인들이 감시하기 위해서죠. 정자나무는 여론 수렴 기관입니다. 돼지 한 마리를 잡아도 한 달은 걸리죠. 풍성한 논의가 이뤄지는 현장입니다. 마을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곳이죠. 도법 지리산 길은 아직 평안하지만 세상은 어지럽기 그지 없습니다. 대통령을 아무래도 잘 못 뽑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 시장 5년 한 그분을 서울 시민들이 많이 지지했어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 사회의 지식인과 종교인의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대중들을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곡학아세한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정치세력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책임 있는 대답을 내놔야 합니다. 철학의 빈곤, 가치의식의 부재… 이 대통령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 우리나라에 지식인들이 있나요? 이명박 정권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가 된 사람들이 관직을 출세의 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사의 난맥상이 정치·철학의 빈곤과 함께 집권 불과 100일 만에 훤하게 드러났어요. 도법 운하를 왜 만들려는 걸까요. 좋은 나라 만들자는 건데… 그것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인데요. 반대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대답해요. 결국은 가치의식의 문제입니다.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사회라는 신념… 반대로 자연과 이웃과 함께, 친구·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상반된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정책에는 이웃이 무너지든 말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지리산 숲길을 만든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전혀 다른 거죠. “미국산 쇠고기 안 사먹으면 된다”는 발언은 자신이 대통령 자격 없다고 고백한 것과 같아요.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지요. 한반도 운하는 민족사 전체에 걸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올해는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한반도 운하 문제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탁발 순례’를 기획하고 있어요. 서울·경기를 200일에 걸쳐 그 화두를 갖고 도보 순례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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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지리산 800리 도보길’을 가다 | |||||||||||||
2008 06/10 뉴스메이커 778호 | |||||||||||||
지리산을 걷다 길은 길과 만나고
-다비드 드 브르통 ‘걷기예찬’ 중에서 ‘지리산길’을 굳이 자동차를 가지고 가겠다면, 호남고속도로나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려 88올림픽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 지리산IC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함양JC에서 남원 방향으로 향하는 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반대로 남원 쪽에서 오는 이라면 지리산IC에 이르기 전에 지리산휴게소를 지나게 되고 그 휴게소에 세워진 ‘문제의 구조물’ 하나를 떠올릴 법하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째 권 첫째 장에서 그토록 타박해 마지않은 ‘그 놈의 전승탑’이다. 애써 기억을 되짚거나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대신해 잠시 인용해드린다. 게다가 지리산휴게소 저 아래쪽에는-내가 차마 내려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무슨 전승 내지는 반공, 참전, 순국과에 속하는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시절에 무수히 제작된 기념 조각의 전형으로 삐죽 솟은 20여m의 기념탑 아래쪽에 철모 쓴 군인들이 돌격하는 동상인 것이다. 특히 이 기념탑은 약 80도를 이루는 예각의 첨탑으로 삐죽 솟아 있고 위 모서리도 사선으로 마감함으로써 날카로움을 극대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앞산 지리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순례길의 안내를 이런 신랄한 인용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는 ‘엄청난 시절’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지리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놈의 전승탑’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첫 장거리 도보길로 ‘지리산길’을 열게 된 것도 2004년 지리산자락의 섬진강꽃길을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하려는 짓에 반대하면서 비롯했다. 한 해 전 지리산국립공원 내의 청학동과 거림골을 잇는 묵계치에 터널을 뚫어 관광용 도로를 낸 것에 적이 놀란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이상의 파괴는 막아내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지리산생명연대와 실상사가 중심이 되고 지역 주민과 생태전문가들이 동참, 그 대안으로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순환탐방로를 제안했고 5년 만에 마침내 그 첫 구간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더욱 ‘하수상’해져 이제는 국토가 통째로 ‘회칼질’당할지도 모를 지경에 직면하게 되고야 말았다. ‘지리산길’ 가는 길 지리산IC를 빠져나오면 바로 인월이다. 길의 내력에 제법 밝은 이라면 인월에서 ‘똥돼지의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 인월장터에는 ‘똥돼지’를 파는 집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흥부마을’로 알려진 아영면과 산내면 일대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영면 아곡리나 송리에 가면 비좁은 고샅길을 따라가며 구수한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는 별채 건물을 두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딸린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소위 ‘2층 변소’가 나온다. 그곳 변기에 앉아 일을 보면 아래층의 돼지가 달려와 널름 받아먹는다. 제주의 통시와는 달리 이곳의 돼지우리는 지나치게 비좁아 제법 덩치가 큰 돼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머리로 ‘음식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것 참 고약하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쥐어틀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의 ‘수입소 파동’을 생각하면 오히려 곰곰 되짚어 볼 일이다. 광우병이야말로 ‘먹이의 순환’에 어긋나면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지리산길’의 본산이랄 수 있는 실상사에 이르기 전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에 오른다. 본절인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 잡은 것과는 달리 백장암은 수청산(772m) 중턱에 있어 제법 그윽한 산사의 정취를 선사한다. 현재는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작은 암자지만 경내 아래의 옛 절터로 미루어 예전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실상사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 들어와 화를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치 장독대마냥 낮은 담장을 두른 부도전 안에는 삼층석탑과 석등, 몇 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어 보기에도 아늑하고 정갈하다. 몸돌에 주악천인상, 사천왕상과 동자상 등이 새겨져 있는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층석탑 앞에 서 있는 정교한 솜씨의 석등은 보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 김택근 ‘사람의 길’ 중에서 실상사에서 모든 중생은 편안하다. 절의 자리가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밥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그 꽃은 언제 피어 있는지도 모르게 은연중에 피어 있다. 절로 가는 길은 개울을 건너 논밭을 거쳐 불현듯 절에 이르게 하는,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길이다. 들머리에는 돌장승 세 기가 서 있지만 마을을 지키는 것인지 절을 지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원래 네 기가 쌍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한 기는 언젠가 큰물이 져서 떠내려갔다고 한다. 명색이 ‘무슨무슨 장군’들이고 제법 큰 키에 무서운 인상들을 짓고 있지만 뜻한 바만큼 위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실상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섰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고 나올 수 있는 절은 결코 아니다. 절 안 곳곳에는 생각지도 않게 많은 보물이 산재해 있어 경내가 비좁을 정도다. 먼저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삼층석탑 2기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드물게 온전히 남아 있는 상륜부는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 복원 때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37호다. 다음으로 석등이 있다. 큰 키의 석등 앞에는 석등에 불을 붙일 때 사용했을 법한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다른 석등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보물 제35호다. 약사전 안에는 거대한 철불이 모셔져 있다. 풍만한 상체를 지닌 철불은 결가부좌의 자세로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 있다. 원래 노천불이었다는 설도 있고,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땅의 기운을 막기 위해 일부러 맨 땅에 세웠다는 설도 있고, 이를 안 일제가 훼손했다는 설도 있다.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 보물 제41호다. 이밖에 증각대사 부도와 부도비, 수철화상 부도와 부도비 등은 실상사의 정신이 피어올린 보물들이다. 실상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면 이제 신들메를 고쳐매고 바랑을 단단히 짊어져야 한다. 본격적으로 ‘지리산길’ 순례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열린 길은 지리산 800리, 300여㎞ 도보길 중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과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을 잇는 20여㎞로 지리산 트레일(trail) 첫 구간이자 시범구간이다. 길은 매동마을에서 의탄교에 이르는 ‘다랭이길(1구간)’과 의탄교에서 세동마을에 이르는 ‘산사람길(2구간)’로 이루어져 있다. 1구간 ‘다랭이길’
지리산길을 이어주는 매화꽃을 닮은 매동(梅洞)마을과 오르막의 소나무 숲을 오르다 뒤돌아보면 시원한 지리산 주능선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리기다소나무 숲길로 접어든 지리산길. 숲을 빨리 푸르게 하기 위해 몇십 년 전 조림사업으로 심은 리기다소나무는 경제가치가 떨어져 쓸모없는 나무라고 홀대받기도 하지만 여느 식물과 다름없는 소중한 생명이다. 숲에서 만나는 오래된 돌담은 옛 사람들이 논을 만들기 위해 쌓았던 축대다. 사람이 떠나고 묵어버린 논은 이제 야생동물들의 삶터가 되었다. 돌담 사이로 자란 진달래. 진달래꽃 즈려밟고 숲을 나오면 반야봉과 천앙봉을 함께 조망할 수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사방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연 재해를 막기 위한 시설이 어떤 형태로 자연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 고민해볼 수 있다. 중황마을에서 상황마을로 들어서면 치마처럼 펼쳐진 다랑논이 풍요롭다. 큰 돌을 쌓아 만든 다랑논의 석축, 그 아름다움에서는 자연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와 고단했던 산촌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다랑논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옛 전설부터 등구사라는 절에서 따왔다는 유래까지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한 등구(登龜)재. 등구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던 고갯길로 경상도의 마천 사람들이 인월에 장을 보러 가던 길, 소장수가 소를 몰고 넘던 길, 고개를 사이에 두고 시집장가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고갯길문화가 되살아나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한 고개 두 고개 잇는 날이 기다려진다. 등구재를 지나 창원마을에 도착하면 오래된 당산나무 쉼터가 걷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쉼터에서 다랑논과 어우러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고 쉬어가는 여유로움도 누리자.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가는 숲길은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에 사용하던 옛길이다. 숲길 입구의 너덜지대는 강물이 흘러가는 듯 까만 돌들이 강을 이뤄 돌강을 형성하고 있다. 소나무 향 가득한 숲을 지나 나타난 금계마을. 마을 입구에는 옛날 아이들이 뛰어놀던 의탄분교가 폐교된 채 외로이 서 있다. 등구재의 북동쪽엔 등구재와 사뭇 다른 고갯길 하나가 있다. 오도(悟道)재다. 이 고개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청매 인오조사가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하였다 하여 오도재란 이름을 얻었다. 오도재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 등지의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충청도지방으로 운송되던 주요한 육상교역로였다. 2003년 완전한 ‘S’자 커브의 사행길을 번듯하게 포장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함양군은 지리산 주능선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이 고개 정상에 ‘지리산 제1관문’을 세우고 지리산조망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지리산 제1관문 앞에는 청매선사의 시 ‘십이각시(十二覺時)’가 서있다. 覺非覺非覺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覺無覺覺覺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覺覺非覺覺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豈獨名眞覺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오 2구간 ‘산사람길’
좁다란 의탄교를 지나면 600살 먹은 느티나무가 길목에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안쪽에 위치한 추성마을로 들어가는 새 길이 뚫리며 옛길은 잊혀졌지만, 의중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던 옛길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불공을 드리고,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하던 길, 마을 사람들은 그 길에 석축을 쌓아 다니기 편하게 길을 다져 길을 만들었다. 길은 벽송사로 향한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우러져 터널을 만든 포장길을 조금 오르면 벽송사 입구를 지키는 나무장승을 만난다. 나무장승 옆의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벽송사 능선길로 들어선다. 빨치산도 넘나들던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이 길은 바닥에 떨어진 수북한 낙엽이 맨발로 걸어도 기분 좋은 능선길이다. 능선길에서 송대마을로 접어들고 나면 계속 내리막길이다. 송대마을 이후, 시멘트 포장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임도에서는 저 멀리 보이는 그림같이 펼쳐진 산능선들이 걷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엄천강과 용유담, 오래된 소나무를 눈으로 즐기며 걷다 보면 어느새 세동마을에 닿는다. 정겹게 집들이 붙어 있는 세동마을. 골목과 담 사이에 낮게 앉아 있는 집의 모습에서는 수수하고 순박한 산촌마을을 느낄 수 있다. 세동마을 아래 강가에, 아픈 역사와 아픈 다리를 잠시 내려놓자. 지리산길 또한 잠시 쉬었다가 휴천면을 지나 산청으로 이어진다.
그 꼴이 더욱 측은한 것은 그 장승들이 벽송사 일대를 무대로 하여 씌인 ‘변강쇠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까닭이다. 변강쇠는 “어려서 못 배운 글 지금 공부할 수 없고, 손재주 없으니 장인질 할 수 없고, 밑천 한 푼 없으니 장사질을 할 수 있나, 밤낮으로 하는 짓이 그 짓뿐”인 작자였다. 그는 나무 하러 갔다가 그조차 하기 싫어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장승을 뽑아다 땔감으로 쓴다. 이에 팔도 장승들이 통문을 돌려 변강쇠를 혼내준다. 말없는 민중의 분노는 예나 제나 그렇게 분출되고야 마는 법이다. 지리산길은 이제 시작되었다. 그 길은 지리산 둘레 800리 길을 에둘러 흐르며 때론 숲을 따라 숲속 친구들을 만나고, 고개를 넘어 마을과 마을을 만나고, 들을 가로질러 삶과 노동을 만나고, 강을 건너 머리칼 흩뿌리는 바람을 만나고, 끝내는 또 다른 길과 만날 것이다. 그 길을 고요히 걸어가며 산도, 물도 그냥 있는 그대로 두라. 참고; 지리산길(www.trail.or.kr)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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