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가장 슬픈 남자

바보처럼1 2010. 3. 28. 05:52



 



 

 

 

 




 





 





 





조팝나무 / 출처: Yahoo image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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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지 생각으로 여는 하루 


* 첫번째 생각 *

 

우리가 무엇을 잃기 전까지는 그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두번째 생각 *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기까지는 1분 밖에 안걸리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기까지는 1시간 밖에 안걸리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하루밖에 안걸리지만,
누군가를 잊는데는 평생이 걸린다.

 


* 세번째 생각 *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것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부분의 것들을 저절로 다가오게 만든다.

 


* 네번째 생각 *

 

꿈꾸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꿈을 꾸자.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자.
되고 싶은 것은 되도록 노력하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인생은 오직 한 번이고 기회도 오직 한 번이니까.

 


* 다섯번째 생각 *

 

진정한 친구란 그 사람과 같이 그네에 앉아
한마디 말도 안하고 시간을 보낸 후 헤어졌을 때,
마치 나의 인생에서
최고의 대화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 여섯번째 생각 *

 

외모 만을 따지지 말자.
그것은 나를 현혹시킬 수 있다.
재산에 연연하지 말자.
그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에게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자.
미소만이 우울한 날을 밝은 날처럼 만들 수 있다.

 


* 마지막 생각 *

 

내가 태어났을 때 나 혼자만이 울고 있었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나 혼자만이 미소 짓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우는 그런 인생을 살자.

<좋은글/발췌/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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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인물은 키워낸 부모들의 20가지 습관





      1.  늘 자녀에게 깔끔한 외모를 보이도록 한다.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엄마.
      집 안 어디서나 담배를 마구 피우는 아빠를 보며
      아이들은 배울 것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깔끔하게 일 처리 잘 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깔끔한 부모를 보고 자라서 그렇다.


      2.  긍정적으로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언어 습관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세 살, 네 살 정도의 아이들은 더 그렇다.

      그러므로 부모가 "~하면 안된다".  "~하면 맞는다" 등의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아이들도 따라하게 된다.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도 부정적이다.


      3. 긍적적인 호칭을 쓴다.

      아이들을 "돌머리"라고 말하면 돌머리로 자라고,
      "예쁜이"라고 말하면 예쁜이로 자란다.

      부모가 부르는 호칭은 아이들의 잠재의식에 그대로 심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자녀를 부르는 호칭을 긍적적인 것으로 바꿔 불러보라.
      바로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4. 꿈을 주는 인테리어

      집안 환경도 아이들의 꿈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넓고 푸른 자연이 있는 그림.
      아이가 존경 할 만한 위인의 사진이
      하나쯤은 집안에 붙어 있으면 좋다.


      5.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바로 풀어준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많다.
      이럴 때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로 맞춰서 농담도 하고,
      함께 운동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주도록 한다.








      7. 좋아하는 음식을 해 준다.


      아이들의 오감을 끊임없이 개발 해 주는 것이 좋다.
      맨 날 똑같은 음식만 먹다보면 오감은 개발 될 기회를
      잃게 된다. 아이의 미각을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요리 만들기에 도전 해보라.


      8. 작은 일도 축하 해 준다.

      게임 최고점을 낸 일.
      전날에 비해 가위로 색종이를 자르는 일을 잘 할 때
      주저하지 말고 축하 해주라.
      부모의 진심 어린 축하에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9.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한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단점을 혼내기보다
      장점에 관심을 보인다면 아이는 부모가
      관심을 보이는 것에 더 노력을 기울게 된다.









      10.친구에 대해 훤히 안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의 이름을 몇 개나 말할 수 있나?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의 행동은
      우리 아이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상상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어야 한다.


      11.아이의 우상을 존중해 준다

      20세기 산 부모의 우상과
      21세기를 살 자녀의 우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잣대로 아이의 우상을 비웃지 말고
      존중 해 줘야 한다.   


      12.성적이 오르지 않는 원인을 파악한다.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아이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부모는 아이의 어떤 태도와 행동이
      문제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것을  아이 스스로 느껴,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부모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유도 해 주어야한다.








      13.긍정적인 기대감을 갖는다.

      아이는 부모가 기대한 대로 자란다.
      그러므로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아이에게 부담으로 다가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드러내 도록 해야한다.


      14.아이의 능력을 믿는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알면 자신감이 생겨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15.기쁜 아침을 만들어 준다.

      아침의 기분은 하루를 좌우 한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아침에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자녀를 대하도록  한다.









      16.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책 읽기를 즐기는 부모 밑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자라고,
      약속을 잘 지키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가 약속의 중요함을 안다.


      17.식사 때는 기분 좋은 얘기만 한다.

      식사 때는 기분 좋은 얘기를 하면 소화액이 잘 분비된다.
      그러므로 식사시간에 아이에게 꾸중을 하거나
      장황한 설교를 늘어 놓지 안아야 한다.


      18.육아에 대해 항상 연구하자.

      아마도 이 항목에 있어서 우리 나라 부모님들은
      최고 점수를 받을 것이다.
      육아와 지능개발에 대해서는 관심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책과 최신 뉴스를 보며 연구하고 공부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19.아이에게 글을 쓴다.

      말을 하다 보면 자꾸만 장황해지고 비 논리적으로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아이에 대한 기대를 글로 적어서 건네준다.


      20.함께 계획을 세운다.

      아이들은 모든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부모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자녀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집안 일에도 아이의
      의견을 묻고 함께 세우거나 해결을 하는 것이 좋다.

      <펌: 동문 카페>

 

 

 

콜롬비아 , PETA 회원 환경오염 반대 ‘누드’시위

 

 

 

 

 

 

 

 

 

 

 

 

 

 

 

 

 

잔인한 투우 경기 반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PETA(동물을 인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환경오염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로이터 / 동아닷컴 2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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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슬픈 남자, 화가 이중섭

 

1938 분카 가쿠잉 재학 시절

 

 

-생일 : 1916년 4월 10일

-데뷔 :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1941년)

-학력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매력 : 자유분방하면서 격렬한 화풍

-출생 : 평남 평원군 송천리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위의 귀한 막내였으나 1923년 5세무렵 부친이 작고 했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이중섭의 스승 임용련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 북한군에 총살 당한 불은의 화가

 

 

이중섭은 193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당시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 을 그리고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했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1934년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키기도했다.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동경으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했다.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

 

 

1940. 환상적인 바다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 (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했다.

 

 

 

 

이무렵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졸업. 도쿄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 <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엽서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원산에서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했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도 했다. 이무렵 시인 오장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3년 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선택되었다.

 

 

소와 소녀 *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세 사람 * 18.2×28cm * 종이에 연필 * 1942∼5년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해 큰 아들 태현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 34세 때는 차남 태성이도 태어났다.

 

 

흰 소 * 종이에 유채 * 34.5×53.5cm * 1953년 무렵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한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소를 든 사람, 1942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되었고 . 1950년 35세,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 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는데, 이 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렸는데,. 나중에 군인이 패를 지어 보복으로 휘두른 총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만다.

 

 

이중섭이 기거했다는 서귀포의 초가

- 이 작은 집의 맨 끝 방에 머물렀다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와서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되고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여 3. 1절 경축미술전에 작품을 내었다.

 

 

 

 

그러나 가난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가고 이별하게 되었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것이 친구 김병기의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 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후배가 착복함으로써 처가는 거액의 빚만 지게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중섭은 실망과 괴로움을 안고 8월 시인 구상이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장모의 냉대와 처자식의 어려움을 보고, 일주일 만에 귀국해 버렸다. 이중섭이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지나치리 만큼 둔감한 경제적 불감증, 고향후배에게 사기를 당하여 처가가 많은 빚을 지게되었고 일본에서 이중섭의 능력으로는 그 빚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던 점, 당시의 미묘한 한일관계로 인한 출입국의 어려움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얼굴을 맞댄 가족. 1953.

 

 

1954년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했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도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고,간염이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이중섭 자화상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되었다.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 이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 로 가서 여관방을 전전 하면서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였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황달이 극심했다고 한다.

 

 

부산 남포동 - 평생지기 화가 한묵과 함께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었으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이중섭 화백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화가가 가톨릭에 귀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2004년 8월 18일 뉴스가 있었다. 화가는 편지에서 “제(第)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화가가 작고하기 직전인 1955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장 분량으로, 뒷면에 ’具常兄前 李仲燮製’(구상형전 이중섭제)라고 적혀 있다. 구상시인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화백은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비록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형’으로 높여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조선일보.2004.08.18. 서울=연합뉴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시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 참고 출처 : daum cafe niegroup, '화가 이중섭,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 한묵의 눈물의 회고 강연 참고, 고은 이중섭 평전, 엠파스,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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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놀라게 한 한국 마술


스타킹 출연 영상






 


지금 이태리는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태리 투스카니의 아름다운 산하 파노라마를 보내 드리는 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음악과 어우러진 정경이 아름다워 지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실행파일을 붙혀 보냅니다. 저 개인적인 여행 체험과 느낌에 이태리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 외에 일반 가옥, 건물의 경우 특히 기와지붕 형태가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아 친근감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제목을 클릭해 뜨는 실행파일을 두 번 클릭해 열고, 닫을 때는 자판의 ESC 버튼을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