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야생초 이야기 | 용담꽃]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바보처럼1 2010. 3. 30. 02:57

[야생초 이야기 | 용담꽃]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글_ 복효근 시인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 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 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 <용담꽃 -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전문

가을의 공기와 햇살 속에는 마음 저 깊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그 어떤 입자나 파동이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 새삼 왔던 길을 뒤돌아보고 삶과 우주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사람들은 책에서 그 답을 찾으려 책 속으로 빠져들고 더러는 자연이 들려주는 변화와 질서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도시적 일상 속에서 자연의 순화로운 리듬을 잃어버리고 쫓기듯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저 산과 들의 생명들은 분명 무슨 답인가를 들려줄 것만 같다. 다가올 겨울을 예감하며 최선을 다하여 피어나고 있을 꽃들이 궁금하다. 자칫 늦으면 높은 산지엔 일찍 서리가 내리고 가을꽃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서둘러 산행을 준비한다. 용담이 저 짙푸른 하늘빛으로 피어날 무렵이다. 푸른 하늘 빛깔로 피어나다가 서서히 깊은 바다 그 심연의 빛깔로 변해가는 용담꽃을 만나러 간다. 용담은 늦은 8월부터 깊은 가을까지 피긴 하지만 10월 전후해서야 그 빛깔이 이 가을과 잘 어울린다. 푸른 빛깔의 꽃이 그리 많지 않은데 용담의 보랏빛에 가까운 그 빛깔은 신비한 힘으로 시선을 끈다.

현란하게 아름답지 않아서 좋다. 그 수수하고 신비로운 빛깔과 단정한 꽃모양이 삶의, 우주의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 듯하다. 용담꽃의 꽃말은 ‘당신이 슬플 때 사랑한다’라고 한다. 당신이 기쁘고, 부유하고, 행복해서가 아니고 쓸쓸하고 슬프고 외롭고 고달플 때 사랑한다는 뜻이겠다. 언젠가 이 꽃말을 접하고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신이 기쁠 때도 사랑하겠지만 슬플 때 당신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제주에서부터 저 북쪽 지방까지 널리 분포되어 서식하는 이 용담은 ‘용담’ ‘산용담’ ‘비로용담’‘칼잎용담’ ‘흰그늘용담’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2007년부턴가 야생초 용담을 이르는 명칭을 ‘과남풀’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 어쩐지 그 이름이 낯설어 여기서는 옛이름 용담으로 통칭하여 부르기로 한다.

무릎 높이의 키에 잎자루 없는 잎이 마주 난다. 날렵한 잎 모양은 뾰족하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세 가닥 맥이 있다. 줄기 밑부분에 있는 잎은 작은데 줄기 위로 올라가면서 크기가 커진다. 꽃은 통꽃인데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다. 통 안 쪽으로 작은 반점과 같은 무늬가 보인다. 암술 하나에 수술 다섯 개가 종모양의 꽃 안쪽에 붙어 있다.

이곳 지리산 정령치 산마루는 벌써 깊은 가을의 적요가 감돈다. 가을꽃들이 여기저기 마구 꽂아놓은 듯 아무렇게나 흩어지거나 무리지어 피어 있다. 억새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서늘한 공기 속에 제 빛깔을 마음껏 풀어놓고 있다. 그 가운데 풀섶 사이로 서늘한 빛깔의 용담 몇 포기가 눈에 들어온다.

용담 뿌리는 웅담보다도 그 맛이 써서 상상의 동물인 용의 쓸개와 같다 해서 용담이라 부른다. 이 쓴맛은 겐티오피크린이라는 물질로 미각 신경을 자극하여 위액의 분비를 촉진한단다. 특히 위와 장의 활동력을 높이며 소화액이 잘 나오도록 한다. 만성 위산과다증이나 저위산증에 달여서 먹거나 가루 내어 먹는다.

뿐만 아니라 용담은 혈압을 낮추는 효과도 있으며 염증, 암, 류머티스 관절염, 수족 마비 등에도 쓴다. 용담 뿌리에 들어 있는 겐타오닌이라는 알칼로이드 성분은 염증을 없애는 동시에 진통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용담 뿌리를 달인 물은 상당한 항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위암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달기가 있는 간염에 용담간사탕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용담의 약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설로부터 그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농부가 겨울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포수에 쫓기는 토끼를 구해줬는데 토끼가 웬 풀뿌리를 캐어서 주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씹었더니 쓴맛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농부가 화가 나서 토끼를 잡아 죽이려 하자 토끼는 산신령으로 변하여 그 풀이 용담이라는 약초라는 것과 그 약효를 알려주었다 한다.

 

약효와 관련된 전설이 서양에도 있다. 헝가리에서는 용담을 ‘성 라디스라스 약초’라 부르는데 그것은 옛날 라디스라스 왕국이 페스트라는 병이 창궐했을 때 이 약초가 병을 낫게 했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백성들을 가엾이 여긴 왕이 화살을 쏘면서 신에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식물에 맞춰 달라고 빌었다. 그러고 나서 화살을 찾아보니 화살은 용담의 뿌리에 박혀 있었고, 그 뿌리를 모아 병을 낫게 했다. 이렇듯 병을 다스리는 효용 탓으로 용담의 꽃말 가운데 하나가 ‘정의’이다.

잎겨드랑이를 비집고 끝이 살짝 말린 꽃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몇 송이가 활짝 문을 열어젖혔다. 길고 뜨거운 여름을 건너온 이 아름다운 꽃이 어찌 인간의 몸만을 치유하겠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아 고통스러운 마음과 쓸쓸하고 외로운 영혼에 위안을 얻는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용담을 찾아 길을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200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