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 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
광화문 교보빌딩 앞 지하도 들어가는 입구에 4모 지붕의 아름다운 건축물 하나가 서 있습니다. 안에는 단정한 비석이 하나 있고 앞에는 우아한 문 하나가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 바로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입니다.
비전 안에는 높이가 2.5m 두께가 40cm 결코 작지 않은 석비가 있습니다. 이 비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재위 1863∼1907)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대한제국 고종 광무 6년(1902년) 나이 51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비입니다. 이 비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을 기념하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기로소란 정2품 이상의 문관 가운데 70세 이상이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시대 이래의 기영회(耆英會)를 계승한 것입니다. 조선 태조는 60세 되던 1394년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그 뒤 역대 왕이 장수하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숙종은 59세 되던 해를 '망육(望六: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여 앞당겨 기로소에 들어갔고, 영조는 아예 51세 되던 해를 '망육'이라 하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고종도 영조의 예에 따라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비신(碑身)은 현무암으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수에는 봉황과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신의 네 면 상단에는 "대한제국대황제 보령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라는 전서(篆書) 제목이 황태자 순종(1874∼1926)의 예필(睿筆)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의정부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1829∼1904)이 지었고 글씨는 육군부장(陸軍副將)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이 썼다고 합니다.
비문은 서(序)와 송(頌)으로 구성되는데, 서문에는 "원구(圜丘, 원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으니, 실로 단군·기자·신라·고려 4천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해 임인년(1902)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寶齡)은 망육순(望六旬)이 된다. 이에 백관의 하례를 받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로소를 수리하고 길일을 택하여 영수각(靈壽閣, 기로소 안 어첩 봉안처)을 참배하고 친히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어 고황제(高皇帝) 이하 세 임금[태조·숙종·영조]의 고사(故事)를 이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은 2중 기단 위에 세운 정방형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기둥은 8각 초석에 세워져 있고, 공포(栱包)는 3단으로 구성된 다포식(多包式) 건축물입니다. 네모지붕의 정자 형태이지만 추녀가 밖으로 시원하게 뻗쳐 조형미를 잘 살렸으며 남쪽 처마에는 황태자가 쓴 "기념비전(紀念碑殿)"이란 예필 편액(扁額)이 걸려있는데, 그 비석이 세워질 당시에 우리의 위치가 제후국 조선이 아닌 제국, 즉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 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그냥 각이라 하지 않고 높여서 전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4모 지붕의 유려한 곡선이 아름다운 비전
비전 둘레에는 돌난간이 둘려있는데, 연잎과 연꽃을 새긴 동자기둥(童子柱) 위에 방위에 따라 사신(四神)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조각하여 배치했다. 즉 동쪽에는 용·토끼, 남쪽에는 주작·말, 서쪽에는 호랑이·닭, 북쪽에는 거북이·쥐를 배치했고, 남쪽과 북쪽의 돌계단에는 각각 해태를 배치했습니다.
세워졌을 당시 기념비전
비전 남쪽에는 돌문을 설치했는데,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철문으로 닫은 삼문(三門) 형식이며 그중 가운데 문은 양쪽의 기둥 위로 무지개 모양의 아치(arch)를 얹고 중앙에 "만세문(萬歲門)"이란 편액을 새겼으며, 편액 위에는 연잎과 연꽃을 새긴 동자기둥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주작을 얹었습니다. 각 문의 기둥에는 앞면을 당초문(唐草紋)으로 새겨 장식하고 그 위에 해태를 하나씩 얹었습니다. 이 돌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떼 내어 자신의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후 원래 자리에 복원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대한제국의 국운을 놓고 보면 허장성세의 건축물인 기념비전.
그 당시의 대한제국의 상황은 일제에 의해 거의 국운이 기운 상태에 있었는데다 당시 고종의 즉위 40년과 51세인 1902년은 전국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극심한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등 나라 안팎으로 근심과 걱정으로 뒤엉켜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를 걱정한 고종이 일체의 기념행사를 모두 중단시켰는데 일부 신하들은 기념일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고 해서 한 해 뒤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 결국 그 해에는 이 기념비의 건립과 기념우표만 발행하고 그 후년인 1903년에야 비로소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담은 전부 없어져 버리고 문만 남은 기념비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라는 망해 가는데 이런 기념비를 통해서만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최후의 몸부림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사회적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 외부의 침탈에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개혁의 주체가 미성숙해졌을 때 결국 과거로의 회귀라는 카드밖에 쓸 수 없었던 조선 말 흥선 대원군 이하 당시 조선 권력층의 고민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흥선 대원군 개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조선성리학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변혁과 변화의 시기는 반듯이 걸출한 선각자들의 탄생이 있어야 하며 그 내용을 사회적으로 담보해야 할 주체의 형성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선각적 지도그룹의 탄생과 변혁 주체의 튼실한 형성 없이는 사회 상층부의 권력재편의 의미 이상을 갖을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런 준비 없는 개혁이 바로 허장성세식 개혁입니다. 또 그런식의 개혁은 언제나 외세 또는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현 시기 사회적 개혁의 내용과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에서 '기념비전'은 허장성세식의 정치활동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5. 10. 25
금강안金剛眼
사진자료 참조 : 다음 블러그 산내들 꽃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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