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해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역임하였다. 1941년 〈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과 토속적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인간의 원죄(原罪)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 명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 여러 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작품 활동 외에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 《흑산호》(1953), 《국화 옆에서》(1975),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를 통해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 708명에 문화예술계 인물에 포함되어 친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활동 및 작품 경향
생명파(인생파) 시인으로 사상기조는 영원주의(영생중의), 문화사조상 극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통적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이루었고,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점 등이 커다란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스스로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하고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여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함.
그는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의 영향을 받아 30년 대를 풍미한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대한 관심, 보를레르와 이백이 강조했던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 유.불.선의 동양사상과 샤아머니즘 및 전통정신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을 거쳐 김영랑의 순수시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강한 애착을 보이며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형상화 하였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 임.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의 시적 경향이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등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문예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등의 친일행적으로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일본이 망해도 한 백년은 갈 줄 알았다.....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함.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램.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데뷔 초창기 청년의 순수함과 고뇌가 엿보이는 시 <자화상>은 평생에 걸친 시인의 기본적 성향과 태도, 그리고 제약된 운명을 암시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절명시 변해 버린 시대의 처열한 평가 앞에 서서 그저 긴 회한을 간직한 채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 나름의 굳은 신조와 믿음을 중얼거리며 사라져 가는 70대 후반 고집스런 노옹의 자화상이자 변론이라 할 수 있겠다.
초기 (화사집~해방전)
보들레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악의미를 추구하는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임. 첫 시집 [화사집(1938)]은 미당의 이러한 제 1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으며 자의식과 관능적 욕구에 몸부림 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냈다.
중기 Ⅰ(귀촉도~ 서정주 문학전집)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이 동양사상의 영향으로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초기 시의 열정이 한 차원 높게 승화됨. [귀촉도(1948)]는 미당의 두 번째 시집으로 표제시에서 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를 시적 주제로 함. 이런 변화는 갈등과 화해라는 심리적 변동과, <국화옆에서>, <밀어> 등에서 볼수 있듯이 토착적 정서와 고전적 격조로의 지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초기시에서 보여준 젊음의 열정이 순화되어 한국의 전통 가락과 한의 세계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정주시선](1956년 간행)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에서 민족의 전통적인 한(恨)과 자연과의 화해를, <학>, <기도> 등 에선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시인은 원죄나 젊음의 방황을 극복하고 낙천적으로 변모한다. 그 낙천성은 한의 극복과 함께 적당한 체념으로서 원만하게 삶을 끌어안으려는 자세를 나타낸다 하겠다.
중기 Ⅱ (신라초~동천)
불교와 토착적 전통의 융화를 바탕으로 한 언어의 조탁. 샤머니즘과 유교, 노장사상 등 폭넓은 동양사상을 탐구하며 초기부터 이어져온 윤회 사상과 인연설에도 눈을 돌린다. 미당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러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다.
그에게 있어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 실체라기보단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일체가 된 상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신라초(1961)]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생명의 근원적.윤회적 탐구로 나가가려는 그의 노력이 신라의 불교적 세계관으로 천착되어 나타난다.
시집 [동천](1969)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임과 동시에 종교나 세계관의 차원을 넘어 사람뿐 아니라 귀신은 물론 전 우주와 공감할 수 있는 시적 깊이와 폭을 지니게 된다.
후기 (질마재신화 이후)
1970년대 고향 질마재의 유년 시절로 회귀하여 또 다른 시 세계를 개척한다. [질마재 신화(神話)](1975)에서 시인은 전통적인 ‘이야기꾼’으로 변모하여 촌락 사회의 일상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을 발굴,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지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이러저러한 삶을 신화적 단계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임. 19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는 한편 1980년대 정치적 굴곡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를 창작한다.
말기
만년의 삶을 왕성한 시작으로 보내며 노익장을 과시한 시인은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0년 ‘산시(山詩)’ 창작에 착수하여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의 상징과 의미 그리고 이미지를 형상화한 시집 [세계의 산 시](1990), [늙은 떠돌이의 시](1993년), [80 소년 떠돌이 시](1997년)를 선보이며 청년기부터 간직해온 신화적 상상력을 세계 각국의 지리와 민화 전설로 까지 지평을 넓히는 등 세계 여행 중에 바라본 남의 세계마저도 우리의 신화체계 속에 간단없이 용해시키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된다.
서정주, 시의 논리와 시세계
윤여탁 (서울대, 문학 평론가)
Ⅰ. 서정주를 논의하는 이유
우리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말 속에는 다른 것에 비하여 변화의 속도가 느린 강산마저도 변한다는 사실보다는, 세월이 무상하다는 의미나 이런 강산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이런 제반 현상의 변화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현실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변화하고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우리들의 겉모양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이에 따라 행동마저 바뀌고 있다.
그런데 60년이라면 얼마나 바뀔까?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아직 60년을 살아보지 못하여, 그 변화의 실체와 정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마도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정도의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추측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은, 60년을 넘는 세월(공식적으로 1936년에 등단하였으니 1998년 현재까지 정확하게는 62년) 동안 우리 근대 시문학사에서 꾸준히 시 창작을 하면서, 우리 근대 시문학사와 이런 시를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서 일정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이 글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시인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속칭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이 당시 대표적인 민족 자본가이자 민족 지도자(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였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일가의 농토와 소작인을 관리하던 부친 덕분에, 경제적인 곤란을 겪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개명하여 근대 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런 근대와는 거리가 먼 '신라'와 같은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근대적인 문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도시(줄포에서 서울까지)적인 삶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시골(질마재)의 원초적인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 강점, 민족 해방, 6.25 전쟁, 분단된 국가, 독재 정권의 횡포, 민중들의 피맺힌 반독재 투쟁과 같은 민족사의 파란만장한 여러 우여곡절들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시라는 언어 예술을 통하여 꾸준히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런 시적 체험은 다양한 시각에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우리 현대 시사에서 대표적인 원로 시인으로 대가(大家)를 이룬 시인으로 비추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일제와 독재 권력의 주변을 맴돈 훼절(毁節) 시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정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학교에서도, 그의 명망(名望)과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영욕(榮辱)이 부침(浮沈)하는 곡절을 겪고 있다.
이제 서정주의 시적 편력과 그 의미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서정주를 이야기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밝힘으로써, 이어질 논의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 보자. 첫번째 이유는 서정주의 작품이 우리 근대 시사에서 만만치 않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양적으로는 1000편에 가까운 작품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의 질적 수준도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서정주의 시작품은 한국 근대 문학사나 근대 시사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의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곧바로 중고등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을 위한 제재로 활용되고 있다. 서정주와 그의 문학은 문학사적으로는 물론 문학 교육에서 중요한 성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제반 현상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고 그 의의를 살피는 것은, 우리 문학사의 한 부분에 대한 실체 구명과 문학 교육의 현황 점검을 통하여 그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순수시의 논리와 교육 이데올로기
서정주는 유년기를 지나자마자 원초적인 서정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여러 추억들을 뒤로하고,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온 또다른 세계인 도시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보다는 불교의 세계를 접하거나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이런 그가 시작(詩作)을 시작할 무렵은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점의 질곡 속에서도 근대적인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때였다.
이미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이상의 초현실주의가 실험되고 있었으며, 서정주 역시 이들의 주변에 있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따라서 서정주의 시는 김기림이나 이상 등과 같은 1930년대 시인들이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1920년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는 다른 곳에서 출발점을 삼고 있다.
이 당시 그의 문학적 체험은 다양한 편력을 보여주고 있다. 회고에 의하면,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적인 육체성에서 출발하여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에 이어지는, 인간성을 신성으로까지 추구하는 초인(超人) 정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그의 이런 지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독교 구약성서에 보이는 양명성(陽明性)이 헬레니즘 신화와 맥이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해외 문인으로는 인간 질곡의 밑바닥을 떠메고 형벌 받은 시인으로 살았던 보들레르와 자연에 자리하고 살았던 시성(詩聖) 이백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 시인으로는 김영랑에게서 우리말의 달갑고 떳떳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 국창(國唱)의 가락을 듣는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비하여 형용 수식적 시어 조직에 의한 심미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정지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옷을 입히지 않은 내심의 밑바닥에서 꾸밈없이 그대로 솟아 나오는 어풍(語風)을 보이는 이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문학적 체험을 배경으로 서정주는, 체험을 강조하면서 이를 구상적 이미지로 표현하여야 한다는 시론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근대시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서정시를 감정 표현 위주로 설명하였던 일본인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런 비판을 통하여 시가 감정과 지성의 정신 전부를 담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감정과 지성이 일체가 된 상태에서 제일 밝은 눈으로 아[知]는 상태를 시적 체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시적 성취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시가 체험의 산물이 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R. M. 릴케는 그의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어떤 어린애도 시를 쓸 것이 아니냐."는 뜻의 말을 했다. 그는 감정이 아닌 체험이 시라고 하였고, 이 시 체험이란 것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 시적 체험이라는 것을 요량(料量)해 보면 그것은 울음이나 환희의 마지막 것인 동시에 그뿐만 아니라 또 제일로 잠 잘 깬 밝은 눈의 이해임에 틀림없다.
100 퍼센트의 감동과 100 퍼센트의 앎[知]이 합해진 상태 -- 이것이 시의 체득임엔 틀림없다. (중략) 시를 만일 이와 같은 지혜와 감정의 -- 즉, 전 정신의 체험의 길로 정하고 나간다면, 감정이 쉴 때는 지혜를 가지고 겪고, 지혜보다는 감정이 더 움직일 때는 또 그것을 가지고 겪고, 둘이 합해서 나타날 때는 또 그걸로 치러나가고 해서 시정신의 탐구엔 공백이 없을 것이고, 공백이 없는 곳에 매너리즘도 깃들일 여지가 없을 것이다.([시의 체험], {전집}2, 18면)
또한 이런 작자 자신의 체험을 독자가 방불하게 겪어 감동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통한 전달, 즉 형상화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이런 형상화를 이미지 즉 구상(具象)을 통하여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시의 암시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으로 겪는 다섯 가지의 구상 중에서도 더 많이 눈과 귀가 겪는, 시각적 구상과 청각적 구상의 가장 효과적이고 정리된 시적 조직을 통해서 줄밖에 없다."([시의 암시력], {전집}2, 50면)고 단정하고, 시를 쓰는 사람이 이미지(구상)를 형상화하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엔(시로 표현하는 일 -- 필자주) 먼저 시각적 구상의 어떤 것에 비교해 표현하는 길 이상의 것이 없다. 음악이라면 물론 그 기막힌 감동에 맞추어서 한 곡조의 노래를 우리의 귀에 보내야 하리라. 그러나, 시면 먼저 그 기막히는 모습을 무엇에건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가 시각의 이미지들을 잘 짜서 거기 다시 음향의 조화까지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이 이미지의 비교를 한참 계속하고 난 뒤의 일에 속한다. (중략)
시의 언어의 음향의 암시력은 회화적 영상들이 시인 자신에게 최상의 간절감을 주며 구축되었을 때, 비유해 말하면 연꽃을 에워싸고 도는 적당한 바람과 같이 거기 일고 엉기는 것이다. 시인 자신을 감동시킨 영상 구축의 힘이 그 음악성을 대동하게 되는 것이다.([시의 암시력], {전집}2, 50~51면)
이처럼 서정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형상성을 시 창작의 기초로 보고, 이와 더불어 언어의 음악적 특성 즉 청각적 이미지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는 시적 형상화에서 체험과 이미지를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적 실천은 이런 두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서정주의 시세계에서 {화사집}과 {질마재 신화}로 대표되는 초기와 후기는 체험 세계의 형상화와 관련이 있다면, {서정주 시선}이나 {동천}으로 대표되는 중기는 시의 언어와 그 언어로 표현되는 이미지의 형상화와 연결된다.
또한 이런 시론을 기반으로 하여 서정주는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주로 관심을 보이는 일련의 시를 비판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일관되게 순수시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점은 일찍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한 계기와도 관련이 있으며, 초기의 일부 모더니즘시에서 보이는 진보적 성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순응주의로 나아가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해방 정국에서 좌파 문인들과 대결 구도 속에서 그가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면서, 그의 이런 관점과 시적 경향은 더욱 견고한 틀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런 해방 직후의 변화 모습을 다음의 글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의미(사상이 시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생리적 질서와 그 관문을 통과한 표현이어야 함 ─ 필자주)에 있어서만이 사상은 시와 서로 관련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이 바로 시라는 의미에서의 관련과는 스스로 문제가 다르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시의 사상이 아니라 사상의 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시 기록자가 사상가요 시인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시적 사상가들에게도 또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저 프리드리히 니이체류의 자가류(自家流)의 사상가들이요, 또 하나는 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선전원인 프롤레타리아 시인들과 같은 아류의 사상가들이다. 조선에도 이 두 부류의 시적 사상가들은 존재해 있다. 유치환이라는 사람의 장래를 나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사람중의 하나이거니와, 그에게 있는 표현 시험자로서의 시인의 일면을 제한 또 다른 반면(半面)을 나는 전자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남로당과 문학동맹 소속의 시적 선전원들의 대부분을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시와 사상], {전집}2, 324~325면)
이 글은 해방이 되자마자 문단의 주도권 장악을 꾀했던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한 비판의 일 절이다. 이 때 서정주가 내세운 논리는 순수 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순수는 다분히 경향 문학에 대한 반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서정주는 이런 순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중기로부터 해방 전 사뭇 통속 문학과 경향 문학 -- 그것도 주로 정치적 경향 문학 이외의 모든 문학 조류를 총칭하는 말"([사회 참여와 순수 개념], {전집}2, 292면)이라고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계급 문학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의 순수의 정의는 해방 정국의 시적 실천에 그대로 적용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그가 내세운 순수의 실상 역시 우파 또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는 또다른 차원에서의 정치 사상적인 문학일 따름이었다.
문학사적으로 이런 민족주의 좌파 문학과 우파 문학의 이데올로기 대결 국면은, 해방 정국이라는 상황이 단독 정부의 수립이라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해소되게 된다. 더구나 6.25 전쟁이라는 동족간의 피의 상잔을 겪은 뒤에는 좌파의 논리는 사라지고, 우파의 논리만이 우리 문학사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순수의 개념 역시 "대한민국의 수립과 아울러 불순수한 좌익이 다수의 해방 전의 순수 작가·시인들을 몰고 잠적하고 말자, 그 따로이 말자고 할 것없이 통속에 대한 상대 관념"(위의 글, 294면)이라고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즉 '반공'을 국시(國是)를 앞세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립 이후에는 계급 사상이 부정됨에 따라, 서정주가 주장한 순수시라는 시적 지향('청문협'과 이후 '한국문인협회'의 시적 지향)은 자연스럽게 우리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의 의미는 계급 또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개념을 통용되게 된다. 즉 정부의 수립과 6.25 전쟁의 상처는 우리 문학사를 더욱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계급 문학에 몸을 담았던 전력이 있는 시인들이나 그들의 시는 우리 문학사의 서술에서 제외되었으며, 비록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박영희가 전향을 선언하면서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계급주의 이념인 '붉은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이와는 상대되는 사상만이 순수한 것이자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우리 문단의 주도권 세력의 변화와 과거 우리 문학사에 대한 이해의 왜곡은 문학 교육의 국면에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 교육은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방향에서 정립되었으며, 문학 교육도 이런 방향에서 한 걸음도 비켜 설 수 없게 된다. 우리 시 교육 역시 이런 방향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는 순수시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서정주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순수에 포괄될 수 있는 문학만이 교육 제재로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그가 개념 정의한 순수의 입장에서 보는 문학관만이 교육의 관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서정주는 이런 배경들을 바탕으로 해방 문단에서는 물론 우리 문학 교육의 여러 국면에 견고한 성을 구축하게 된다.
Ⅲ. 자기 드러내기의 시적 편력과 그 의미
앞의 장에서 서정주의 시론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그가 체험과 이미지를 시적 형상화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과 이런 요소들은 그의 시세계의 변화에도 일정한 관련이 있음을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장에서는 그의 시적 편력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시인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자 논리적 근거로서의 시론이 구체적인 작품 창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하고, 이런 시세계가 그의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나를 살필 것이다. 특히 각 시기를 대표하면서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여 이후 논의의 기초로 마련하고자 한다.
서정주의 시적 편력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먼저 보들레르와 니체, 희랍 신화의 영향 아래 자신의 온몸을 보여준 시기인 초기와 해방 이후 순수시의 논리를 표방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중기,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고향의 이미지와 방황하는 떠돌이의 삶을 표현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때 초기에는 그의 해방 전 창작으로 1941년 간행한 {화사집}이 대표적인 시집이며, 중기는 대략 제2시집 {귀촉도}에서부터 1972년 {서정주문학접집}까지, 후기는 {질마재 신화} 이후의 시 창작이 이에 속한다. 물론 이런 시기 구분은 각 시기의 특성과 해당 시집의 주조가 일치하느냐는 여부를 주목한 대략적인 나눔이다.
또한 이런 시기 구분에는 다음과 사항들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한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 시집의 시세계가 앞뒤의 시기와 일부 겹치거나 교섭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으로, 어떤 시집이 어느 한 시기의 경향만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후기에는 많은 시집들이 간행되었으나 이 범주에 속하는 시집은 {떠돌이의 노래}, {안 잊히는 일들}, {팔할이 바람}, {늙은 떠돌이의 시} 정도이며, 마지막으로 아직도 서정주의 시세계는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의 상태라는 점이다. 특히 후기의 작품군에서 제외한 작품들은 노년기에 세계 각국을 유랑하면서 쓴 여행 시편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문학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삶과 관련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 고발
서정주의 시세계에 대하여 설명을 할 때, 인생파나 생명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개념은 그가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면서 사용하였던 규정으로, 자신을 포함하여 주로 {시인부락} 동인들의 시적 경향과 {생리}의 동인이었던 유치환을 염두에 두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생파라는 용어는 일본의 현대시사의 '인생파'와 혼동하는 일이 있으므로, '생명파'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는 의견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근·현대 문학사에서는 김동리, 서정주, 오장환, 김달진, 함형수, 유치환, 조연현 등을 생명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정부 수립 이후 우리 문단에서 소위 '문협 정통파'의 적자(嫡子)라고 할 수 있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유치환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런 생명파의 시적 경향에 대하여 그는 "사람의 기본적 가치 의식, 그 권한 의식 -- 이런 것 때문에 질주하고 저돌하고 향수하고 원시 회귀하고 하는 시인들의 한때가 왔다. 그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의 역사적 의의를 두고 체득하고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마치 자연히 그리된 것처럼 1930년대 후반기의 일정치하 민족의 최후 질곡이 시작될 무렵, 나체(裸體)로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이 유파가 목적 의식을 가진 동인 활동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며, 인간적인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의 발가벗은 나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생명파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그 근본 정신으로 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정주 개인적인 시세계를 논의할 때, 이런 생명파의 경향을 보이는 시로는 초기시인 {화사집}에 수록 작품을 주로 꼽는다. [자화상], [화사], [문둥이], [대낮], [맥하(麥夏)], [바다] 등이 그 예이다. 이제 여기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시적 방식의 하나인 [자화상]을 통하여, 이 당시 그가 지향했던 시세계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를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어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註.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
-- [자화상]의 전문({시전집}1, 35면)
1937년에 쓴 이 시는 자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년이 된 시의 제작 시점까지의 체험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즉 마름이었던 아버지와 늙은 할머니, 늘 가난하였던 어머니, 외할머니, 바다에 나갔다가 죽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할아버지를 닮은 손톱이 까만 어머니의 아들인 '나'가 등장 인물로 설정되고 있으며, 이런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있다. 이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투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래서 시인 서정주가 독자를 의식하여 세상을 향한 목소리의 일성(一聲)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때로는 죄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치로 보이기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은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것으로, 그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다. 서정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뱀([화사], [대낮], [맥하])이나 문둥이([문둥이], [맥하])와 같은 원초적인 시적 상징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은 이 시에서 '종'이라고 표현된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마름의 아들로,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어부의 손자로 태어난 손톱이 까만 아이에게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나 삶에 대하여 '뉘우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않는다는 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부끄러움과 원죄 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찬란히 동터오는 아침에도 자신의 시의 이슬에 몇 방울 피가 아직도 섞여 있다는 표현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병든 수캐라는 자학적인 표현에서도 부끄러움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서정주의 초기시는 육체와 물질적 상징의 세계를 추구한 보들레르와 초극(超克)하는 인간상을 추구한 니이체를 수용하여, 자신을 발가벗긴 원초적인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 그의 시적 형상화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체험이며, 이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곧바로 그의 시이기도 하다.
2. 전통과 정신의 서정화 작업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이라는 부끄러운 상처를 남겼던 서정주는, 해방 직후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순수시 또는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대표적인 시가 [국화 옆에서]({경향신문}, 47. 11. 9)이었으며, 이 시기에 간행된 시집 {귀촉도}(선문사, 1946), {서정주 시선}(정음사, 1955), {신라초}(정음사, 1960), {동천(冬天)}(민중서관, 1968) 등은 이런 그의 시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우리 민족과 역사 속에서 전통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를 통하여 민족의 정신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신라 연구의 차원에서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신라 정신'과 불교적인 인연설이나 윤회설을 서정적인 언어와 시적 이미지화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해방 이후에 일관되게 주장한 순수시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 [국화 옆에서], [무등을 보며] 등에서 자기 반성과 생활인의 철학을 보여준 서정주는, '영통주의(靈通主義)'라고 명명된 샤머니즘과 불교적 신앙관을 바탕으로 신라 문화의 신비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일찍이 인연을 맺은 불교에서 종교적 구원을 얻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선운사 동구]나 [동천]과 같은 작품으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시인 서정주의 인간적 풍모를 유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런 시에서 보이는 시적 언어와 비유적 이미지의 효과적인 표현은 순수시의 실체를 보여줌은 물론, 시사적으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예로운 찬사를 받기도 한다. 이제 이런 시 한편을 읽으면서, 그가 보여준 중기시의 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 전문({시전집}1, 156면)
우선 이 시에는 깜깜한 동짓달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과 그 어두운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그려지고 있다. 마치 한 폭의 담백한 수묵화(水墨畵)와 같은 시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이런 풍경화를 연상하는 시적 형상 자체로도 의미는 충분히 있다. 즉 동양적 신비감에 싸인 선(禪)의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런 분위기는 시적 정서를 형성하여 우리에게 떠나간 임과의 애잔한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떠난 임이지만 그 임을 그리는 '내'라고 표현된 시적 화자의 맑은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더구나 이런 화자의 마음을 자연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무심한 새마저도 알고 있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시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초기시나 후기시에 보이는 산문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절제된 언어와 고도의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수사적이거나 설명적인 어투를 배제하면서도 나름의 시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상징적 시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이 시에서는 '고은 눈섭'과 '매서운 새'라는 시적 이미지가 중요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때 눈썹은 일반적으로 슬픈 운명을 지닌 미모의 연인을 연상시키는 초승달과 비유되고 있으며, 이것은 내 마음속에는 고운 것으로 '즈믄 밤에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 올려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달로 표현된 눈썹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를 암시하는 동시에 완전무결한 보름달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새는 이런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지만 결국 한계가 있는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아울러 어둠과 겨울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구도적 자세를 가지고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또다른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서정주는 평범한 삶의 모습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이를 통하여 우리 문화 전통과 정신사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 우리 민족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신라의 설화에서는 물론 우리 주변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진리를 찾을 수 있음을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초승달과 같은 자연 대상은 대상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도 이런 인간과 삶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즉 그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선운사 동구], {시전집}1, 171면)에서처럼, 없는 듯한 가운데에서 '오히려' 찾아내고 있고, '남았읍디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런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3. 신화가 된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
신라와 불교에서 구원의 등불을 발견했던 서정주는, 후기시에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업보(業報)처럼 지고 있던 고향과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그는 '신라적인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면, 초기시와 같은 원초적인 죄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신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있으며, 이런 인간들의 삶에 대하여 시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지식인임네 하고 시를 쓰는 자신에 비하여 훨씬 예술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진솔함을 찾아내고 있다. 이제 그는 인생의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서 그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고 싶은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후기시에 보이는 방랑과 방황은 이런 고향 찾기의 시세계라고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이 시기 주로 자기 고향 사람들을 시적 형상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런 시적 형상을 통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들의 진면목을 산문적인 시로 보여주고 있다. 주로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소고·장고·꽹가리 잘 치고 멋 내길 좋아하고 또 건달패이기도 했던 사람들 ─ 일종의 심미파(審美派)"([질마재], {전집}3, 26면)들을 찾아서 고향 마을인 질마재로 내려가고 있다. 특히 무심하면 지나치기 쉬운 촌무지랭이들의 이야기마저도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평범한 서민들을 그가 쓰는 새로운 '신화'의 주인공으로 격상시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이런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질마재 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을 쓴 중을 세우고, 또 喪輿면 喪輿머리에 또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읍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 [상가수(上歌手)의 노래] 전문({시전집}1, 282면)
이 시는 {질마재 신화}에 수록된 시로, 고향에서 서정주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인 '질마재 상가수'는 평범한 농사꾼이면서 이승에서의 삶과 저승에서의 삶에 대한 노래를 유난히도 구성지게 불러대던 '심미파'의 한 사람이다. 서정주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던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습은 '왜, 거, 있지 않아'와 같은 이 시의 일상적인 언어 표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일상적인 일과 삶의 현장에서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 삼아 흐트러진 머리결을 손질하는 우스꽝스러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을 의식한 거추장스러운 장식이나 체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 생활이 일이고 일이 놀이이고 예술이었던 서민적인 생활의 모습이 일상적인 이야기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들은 더욱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는 진솔함을 느끼게도 한다.
또한 이 시기의 시들은 대부분 자신의 체험을 산문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아버지를 따라 줄포로 이사간 10살 이전에 보고들은 이야기를 찾아서, 꿈과 같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고향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향 여행에서 찾은 이야기들은 모두 자전적 체험의 내용([내 마음의 편력], {전집}3)과도 일치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는, 바다에 나갔다가 죽은 외할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서 해일(海溢)을 피하지 않는 외할머니([해일]), 억울한 오해로 인해 첫날밤에 집을 나간 신랑을 기다리다가 재가 된 신부([신부]), 단골 무당을 뒤따라 다니던 머슴이 선무당이 되어 가는 모양([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 등이다.
이처럼 그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서 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찍이 탐구하였던 희랍 신화이나 건국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이나 '환웅'이나 '단군'와 같은 신성스러운 인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것이며, 시인에게는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거울['명경(明鏡)']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처럼 자신을 키워준 고향(故鄕)에로 회귀하고 있다. 해방 직후에 쓴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시전집}1, 93면)라는 표현처럼, 숱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겪은 시인이 이제는 자기 성찰의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Ⅳ. 서정주, 문학과 삶의 의미
일반적으로 서정주의 시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우리 문학사의 대가를 이루고 있음이 인정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 소재를 통하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들이 지향하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앞의 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그는 시적 대상을 자신의 체험 속에서 찾고 있으며, 이를 적절한 언어와 이미지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시에서 이런 의미들을 바르게 읽을 때, 그의 시적 편력도 시 교육의 차원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다른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부터 순응주의적인 문학관으로 퇴영하고 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서정주의 시는 우리 문학 교육에서 중요한 제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과 독재 정권에 영합하였던 전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면서, 우리의 문학 교육 현장에서 그의 시에 대한 교육마저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정 교과서에서는 그의 시작품이 제외되었으며, 일부 검인정 교과서는 제한적인 관점에서 그의 시작품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문학 교육의 현실을 보면서, 해방 이후의 문학 교육에서 과거 '카프(KAPF)'나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의 문학을 제외했던 점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과거 서정주와 '청문협'이 중심이 되어 순수 문학이나 일제 강점기 저항 문학만을 교육적 대상으로 삼았던 기준이, 현재에는 역설적이게도 이를 주창했던 서정주에게 적용된 것이다.
그동안 서정주의 문학에 대해서는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자기 비판을 감행하면서, 그의 시사적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시인은 시로서 남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이나마 삶에 문제가 있더라도 시로 이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권력이나 생활에의 유혹 때문에 생긴 시인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어도, 시에 남은 상처나 미완성의 시는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시인에게 시 외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서정주의 문학과 삶을 읽기 전에도, 읽는 중에도, 읽은 후에도 이런 잡(?)스런 생각들이 필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잡스러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회복하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이제 서정주를 읽으면서 느낀 감상적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가 일찍이 불렀던 다음의 시처럼, 올곧은 삶을 지켜가는 문단의 선배 시인으로, 이 험한 세상을 오래 산 어른으로, 우리가 그리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빌면서…….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녜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 [푸르른 날]({시전집}1, 73면)
“미당이 소월 후손 돌봤다”
미당 서정주(1914-2000) 시인이 생전에 김소월 후손에게 취직, 학비제공 등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는 소월의 셋째 아들로 현재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 김정호(70)씨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소월의 손녀 은숙씨의 고교시절 학비를 거의 미당이 댔다"고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호구지책으로 「가요 60년사」라는 음반을 외판하던 김씨에게 미당은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등 생계를 보살폈다.
1967년에는 미당의 주선으로 당시 예술원 회장이자 문인협회 이사장인 월탄 박종화가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에게 취직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
김씨는 당시 월탄이 "국민시인 소월의 자식이 남한에서 레코드판 외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면 이북에서 얼마나 악선전하겠나. 나라 망신이지. 잘 찾아왔네"라며 추천서를 써줬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월탄 박종화 등이 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씨를 취직시키기 위해 1967년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에게 써준 추천서 (연합)
월탄과 미당, 시인 구상이 연명으로 원고지에 작성한 이 추천서는 "우리 민족이 일정치하에 있을 때 순국한 우리 국민시인 김소월 선생의 친자녀들 가운데 남하한 유일인자로서, 그 근실한 성행과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직상태에 있어 그 가족이 생사의 위경에서 헤매임을 보고, 오등은 이를 선도안착시키기 위해 귀하께서 특별한 영단을 내리시어 그에게 적직을 주시어 회생의 광명이 있게 하여 주시길 무망하여, 이에 추천하나이다"라고 적었다.
이를 계기로 김씨는 국회의사당 직원으로 8년여 근무하다 퇴직했다. 김씨는 이 인터뷰에서 "이북에 큰형 준호, 작은형 은호, 유복자인 동생 낙호,누나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으나 아직 차례가 안 됐는지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미당의 주례로 1986년 결혼한 소월의 손녀 은숙씨는 현재 충남 아산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영돈씨의 결혼식 주례는 구상 시인이서는 등 원로문인들이 소월의 후손들과 끈끈한 인연을 유지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부친의 저작물과 관련된 인세를 받아본 적이 없고 일부 성의있는 출판사들이 인사로 사례비를 준 적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몇 년 전 소월장학회를 설립하기 위해 10억원 가량 모금했다가 추진하던 분이 작고한 뒤 기탁금을 환불했다"면서 "우리 애들이 돈 좀 많이 벌어서 번듯하게 소월기념사업을 하는 걸 보았으면 좋겠다"고 심경을 피력했다.(서울/연합뉴스)
[문학 뒷이야기]
▶ 서정주 보다 2살 어린 윤동주가 너무 좋아해 노트에 베껴 적어 항상 들고 다녔던 시집이 <화사집>이다
▶ [영산홍] -서정주-
서정주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김관식 시인은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기 위해 미당 서정주의 집을 드나들다 미당의 처제에게 반하게 되고 청혼을 거절 당하자 음독자살 소동 끝에 미당의 처제와 결혼하게 된다.
미당의 친일 문학
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아직 미당의 시 그늘에 푹 파묻혀 있을 때 그를 가리켜서 말한 '그는 또 하나의 정부(政府)'라는 수식어가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로, 미당의 시인된 이력과 그의 작품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자 살아 있는 '문학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팔 할이 바람'이라는 <자화상>의 첫 구절은 곧잘 인용하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기꺼이 쏟아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더러 있었다고 해도, 해방 이후에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미당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와 업적의 광휘, 그리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꽈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이 시는 미당이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로 알려진-일제는 그것에다가 옥쇄(玉碎 :공명,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라는 이름을 붙여 미화했지만-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한껏 찬양하고 있는 시다.
미당은 1933년 시 <그 어머니의 부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다 알다시피 그는 등단 초기에 <자화상><화사><문둥이> 같은 개성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동인으로 김동리(金東里), 김달진(金達鎭), 오장환(吳章煥) 등이 참여〕을 주재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시단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창씨 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평론)><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수필)><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항공일에(1943,일본어시)><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헌시(獻詩),1943,시)><보도행(1943, 수필)><무제(1944,시)><오장 마쓰이 송가(1944,시)> 미당의 당시 문단 지위나 연배로 보아 그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이 가운데 수필인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와 <스무 살 된 벗에게>, 그리고 단편 소설인 <최체부의 군속 지망>, 시<헌시> 등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일 작품들이고, 그 외의 작품들도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미당은 또 1943년 10월 18일부터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이 김제 평야에서 벌이는 추계 훈련에 평론가 최재서, 일본인 히라누마(平沼文甫) 등과 함께 종군해 그 훈련 참관기를 쓴 「보도행」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훈련 마지막 날, 이 훈련을 견학하기 위해 나온 (입영을 앞둔) 조선의 스무 살짜리 청년 수십 명과 미당 일행이 벌이는 수작은 차라리 서글픈 심정이 들 만큼 한심한 장면이다. 특히 미당의 몇 가지 미덕 가운데 그래도 높이 사주고 싶은, 우리 토박이 말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빚어 내는 그 재주를 떠올리면 그 서글픔은 더욱 배가된다.
최재서 씨가 먼저 우리들의 신분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이 중에 국어(일본어를 가리킴)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하고 동석한 교관에게 물으니 "없습니다. " 하는 교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연방 빙글빙글 합니다. 지금 세상에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는 눈치입니다. "그래, 명년에는 여러분이 모두 다 병대로서 입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이나 희망을 말해 주시오. 병정이 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떤지?" 최씨가 이번엔 그들을 향해 물으니, 그 중에 한 소년은 참으로 유창한 국어로써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용산의 어느 내지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금년 봄에사 고향으로 왔습니다. 용산에 내 일터가 있던 관계로 나는 늘 병정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는 참 씩씩하다, 나도 한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쓰겠다 하고 늘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던 만큼 우리도 군인이 된다는 기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감상은‥‥‥감상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영해서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 어떻습니까 △형. 이것은 결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는 어조와 능란한 국어에는 뭐라고 한마디 물으려 했던 나 자신이 주저될 정도였습니다. 〔서정주 「보도행」, 『조광』,1943년, 12월호(여기서는 실천문학사의 《친일문학작품선집》 2에서 재인용함]한수영
이승만의 전기를 쓰다
해방이 되자 미당은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없이 우익쪽을 선택해 그것도 이승만 노선에 충실한 쪽으로 선회한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활발한 조직 활동과 문예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던 좌익쪽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열세에 능여 있던 우익문학 진영은, 그에 맞서기 위해 1946년 4월 조직적 투쟁의 전위 부대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이하 청문협)’를 결성한다.
미당은 이 조직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시분과 회장을 맡게 된다. '청문협'의 강령 중에 한 구절을 보면 '일체의 공식적 예속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 정신을 옹호함'이란 대목이 있지만, 실제로 이 무렵 '청문협'에 소속된 문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익진영의 각종 정치 단체와 사회 단체, 문화 기구와 청년 단체 등에 기반을 두고 활발한 정치 공작을 하고 있었다.
'청문협'은 어떤 단체였는가. 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곽종원(郭鐘元)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청문협'은 발족한 지 불과 3년 반여 만에 발전적인 해산을 하고 말았지마는, 그 첫 출발부터 해산하는 그날까지, 순전히 투쟁 단체로 지속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분쇄하고, 또 공산주의 문학 이론을 타도하는가 하면, 저들의 문학 단체를 격파하는 데 또한 과감했던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감개무량함을 느낄 따름이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해방문학 20년》, 145쪽),
미당은 이 '청문협'의 시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이 단체가 확대재편된 '한국 문학가 협회(1948)'에서도 시가 분과 위원장을 맡는다. 그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행보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미당은 1946년 최재서와 함께 부산의 '남조선대학교(지금의 동아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내려가 있다가, 이듬해 「민중일보」 사장이자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던 윤보선(尹潽善)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온다.
당시 「민중일보」는 그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동리의 회고를 빌자면, 자신들 스스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이승만 개인의 선전과 그를 위한 여론 형성의 창구 역할을 했던 신문이었다(돈암장은 당시 이승만이 묵고 있던 택호).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던 어느 정치가보다도 조직이나 정치적 배경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이승만과 그의 추종 세력으로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을 더 널리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전기 집필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당은 나중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는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흔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서정주 문학선집》3, 264쪽)
당초 「민중일보」에 연재하기로 했던 이 전기는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0월 '삼팔사(三八社)'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전작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꼬박 2년의 공력을 들인 이 전기는 출간되자마자 이승만의 지시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이유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이승만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이미 이 무렵에는 정부가 수립되어 확고한 정권을 쥐게 된 이승만으로서는,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전기 출간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노회한 정치가를 향한 미당의 짝사랑은 그렇게 무너져 내린 셈인데, 이쯤되면 정치가와의 신의나 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볼 법도 한 일이건만, 미당은 그렇지를 못했다. 특히 그가 5공화국 때 보여 준 여러 행적은 그를 따르던 문인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 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한 그의 친여성(親與性)은 딱히 시인된 천품으로서의 천진난만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은 것이다.
미당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보에 힘입어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에 앉게 된다.
민중 문학을 향한 비난과 매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당은 문총 구국대 결성에 앞장서서 후방의 선무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예술원 회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관변 문화단체의 중핵 역할을 맡아 이른바 '순수문학'의 성곽을 철옹성처럼 지키는 역할에 주저함없이 나선다.
미당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조선 백자니 학이니 구름이니 꽃을 벗삼을 때는 그의 시적 미덕이 그런대로 지켜지지만, 이미 일제 말에 경험했던 그 정세에 대한 오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 문제에 달려들기만 하면 그는 거의 예외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문학가는 현실에 초연해 '영원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면서도,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정권의 편에 서서 충실히 그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그 '영원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던 경우가 바로 1980년대였다.
1980년대는 그 초입에 '광주민중항쟁'이 있었고, 그 피어린 민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지긋지긋한 박정희 군사 독재에 이어 또다시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불의의 현실에 맞서 싸웠다.
그 치열한 문학 운동이 이른바 '민중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퍼지게 되었던 것인데, 미당은 그 '민중 문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대두되던 1986년에 「문학정신」이란 잡지를 만들어 그 발행인이 된다. 이 잡지가 창간된 자세한 배경과 연유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 큰 힘을 지니고 뻗어나가던 민중 문학의 기세에 맞서 보수 우익 진영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일단의 시도임은 창간호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정신」은 그 창간호에 '문학자 50인의 목소리'라 하여 민중 문학을 일제히 비판하는 글을 특집으로 싣는가 하면, 이 잡지가 1989년 발행인이 바뀌고 잡지의 편집진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전까지 줄곧 미당이 도맡아 쓰던 그 '권두언' 속에서 민중 문학에 대한 형언키 어려운 비난과 험담을 늘어놓게 된다. 그 몇 구절을 옮겨 보자.
민족이나 인류의 역사 진행 속에서 한 사람의 문학자가 어떤 사관(史觀)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비평을 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특히 오늘날의 우리 한국 문단의 현상 속에서는 중요한 일로만 보인다.‥‥‥ 사관의 유형 가운데서 아무래도 재고삼고(再考三考)를 요하는 문젯거리는 그 사회혁명파적 사관이라고 보이는데, 이것이 점점 더 파급되어 그 수를 늘여갈 경우에 올 하기(下記)의 두 가지 효과에 대해 나는 문학 외적인 입장에서까지도 심한 우려를 여기 표명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염려되는 효과의 첫째는 아직도 철이 덜 든 학생들이나 공장 근로자의 군중 심리를 선동하여 '민주 민족 민중은 아시안 게임도 망국 아시안 게임이라고 몰고 우방 미국까지도 따돌리고‥‥‥때려 부수자. 돌이다. 화염병이다. 막 던져라!'의 파괴의 편이 되어, 유사 이래의 새 발전의 여러 계기들이 눈앞에 마련되어 와 있는 민족사적 호운(好運)의 이 시점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요, 그 둘째는 (이것이 더 큰 염려이지만) 그런 일조의 힘이라는 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 이건 북한 김일성 일파의 한반도 적화 통일 야욕을 고무하여 제2의 6.25의 참변을 이 민족에 다시 가져오는 촉진제가 되면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문학자의사관」, 「문학정신」, 창간호 권두언) .
먼저 문학인의 입장에서보다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서 근년 우리 나라 문단 일각에서 문제되어 오고 있는 그 민중 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나 같은 연배의 사람의 사적 식견(史的 識見)으로는 이 민중이란 말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무산 계급 혁명을 이 나라에서 달성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로 알고 있는데 근년 우리 나라 문단 일각에서 써오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그것과 다른 것이라면 여기에 대한 해명은 반드시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걸로 안다. 만일에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38선 이북에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의 딴전을 두고 있는 우리 자유 민주주의 국민들로서는 더 이상 좌시만 하고 있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민중 문학 재고」, 『문학정신』,1987년 1월호, 권두언
위의 권두언의 내용은 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공안 당국의 서슬퍼른 검사의 엄포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 민주화 운동이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수놓은 바 있는 1987년 초여름의 그 시점에, 한국문인협회는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가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그 관제 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지만, 바로 그 초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온 나라가 독재 정권의 음모에 저항해 싸을 때, 이 노시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그것을 꾸짖고 있었다.
우리 겨레의 이 역사적 현시점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각자 자기가 해온 전공의 일들을 각자가 놓인 그 자리에서 성실히 침묵 속에 꾸준히 이행하여 이 결과의 합계로서 이 민족의 홍융(興隆)을 가져오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은 접어 두고 전연 불필요한 자유 과잉의 풍조 속에 정권 탈취의 야망의 발산만 음으로 양으로 왼갖 꾀와 폭력까지 다하여 전개하고 있는 식자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으니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거슬리는 꼴이 아닐수 없다.
'이 사람들 속셈은 베트남의 말로와 같이 이 나라를 새빨갛게 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이목구비와 건전한 마음 가진 사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뚜렷한 사실로, 우리 나라는 지금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 경제 속의 혹자 생산 제2연도를 통과하고 있고, 또 여러모로 일대 약진의 계기가 될 게 분명한 세계 올림픽 개최 1년 전의 바른 준비기에 처해 있다.
전 국민의 획기적인 합심 노력만이 요청되는 이 중차대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왜 무슨 바람으로 등 돌리고 뒤돌아서서 딴전을 보며 힐난과 불화 조성과 혼란과 파괴만 일삼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이다.
문학자들이란 특히 민족과 인류의 사회 현상 속에 간절하게 살면서도 그것들이 주는 의미와 느낌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여기 역사적 영원성의 가치까지를 부여해야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하는것인데, 정말 신중해야 될 줄로 안다(「문학자의 사관, 「문학정신, 1987년7월호, 권두언) .
이 글에서, 저 일제 말기에, 천황폐하의 황은을 배신하고 대동아공영의 위업에 찬물을 끼얹으며, 조선 독립과 같은 가당찮은 꿈이나 꾼다고 동족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타매하던 친일 인사의 논조와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헛된 상상력의 발등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정말 신중해야 했던 것은 정작 그가 아니었을까.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논리의 허구성
미당은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 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애써 감추고 숨기려는 친일 인사들이 훨씬 많은 사실에 견주어 그 솔직함만은 높이 사줄 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의 〈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친일 경력을 밝혔으며, 1992년 1월 잡지 『시와 시학』의 대담에서도 솔직히 털어 놓았고, 최근에는 「신동아」 1992년 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 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묘한 상황론에다가 죄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 넣어 얼토당토 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 속에 있는<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 듯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그 솔직함과, 또 솔직함 뒤에 놓인 그 우매함 덕에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년 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
열 발짝을 양보해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일제 말의 참혹한 상황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묵묵히 버텨낸 수많은 우리 민족의 선남선녀와, 징병 가라, 학병 지원해라, 당신 아들 지원병 보내라고 떠들고, 가미가제(특공대)의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본받으라 소리 높여 노래하고, 혈서로 군속 지원을 하는 젊은이를 미화시키고, 일본 군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종군 기사를 쓴 그가, 대체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행위에 감히 '하늘 뜻에 따라(從天)'라는 변명이 붙을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난 말뜻의 꼬리를 잡아 시비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친일이 하늘 뜻에 따른 것 이었다면 당시에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나라 안팎에서 항일 운동을 한 애국 지사들은 '하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란 말인가.
시대의 오욕을 참고 견뎌내는 일과, 자의든 타의든 불의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미당의 반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존재가 불의인 줄 몰랐거나, 불의인 줄 알면서도 그 힘이 너무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아 굴복하고 말았던 사실, 그것 자체에 국한되었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미당이 민중 문학자들을 향해 그토록 강조했던 문학자가 지녀야 할 신중함과 글쓰기의 엄중함은, 거꾸로 그의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에 그가 보여 준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숱한 발언과 행적을 향한 경구(警句)가 되어야 도리에 옳을 것이다.
미당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가급의 시인이며, 그 애송시의 보유 숫자로도 으뜸가는 큰 시인이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정치적 행보는 그 큰 사랑에 견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친일과 해방 이후의 활동이 우리 시문학에 남긴 그의 발자취와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과 명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기있고 진실한 반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참된 미당의 시인됨을 밝히기에는 처음부터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역사의 엄중함을 신뢰한다면, 그의 시와 시인됨이 온전히 하나로 묶여, 덜고 보탬이 없이 객관적으로 조명받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전두환 예찬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1987. 1) /
5,6공 군홧발 '찬양의 노래’부른 문인들
서정주 김춘수 등 10여명 앞장… 민속학계 음악 미술계도 '한몫'/조병화 임동권 등 현역감투 비롯 여전히 원로대접… 이젠 청산을
과거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의 큰 물결을 예술가들이라고 비켜 갈 수는 없다.'미’를 추구하고 ‘인간의 영혼’을 노래한다는 이 들이 학살의 수괴들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5,6공 신군부의 군홧발 밑에서 국민들이 신음할 때 그들의 편에 서서 찬양의 노래를 부른 예술가들 중 으뜸은 문인들이었다.'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전두환·노태우의 칼을 펜으로 미화해 준 문인은 10여명에 이른다.
지난 19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96 문학의 해’ 선포식에도 이들은 문단의 원로로서 나란히 한자리씩을 차지해 변신이 빠름을 과시했다.
시인 조병화는 80년 8월 28일치 〈경향신문〉에 ‘새 대통령 당선을 경축하며’란 축시를 썼다. “새시대, 새역사의 통치자/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새 대통령/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이 새출발/국운이여! 영원하여라//청렴결백한 통치자/참신과감한 통치자/이념투철한 통치자/정의부동한 통치자/두뇌명석한 통치자/인품 온후한 통치자/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그는 지금 예술원 회장이다.
일제시대에 친일부역한 이력을 갖고 있는 시인 서정주 역시 권력에 약했다. 그는 87년 1월 18일 전두환의 생일 축하장에서 발표한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에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고 썼다.
80년 당시 문예진흥원장이었던 송지영(사망)이 〈조선일보〉 80년 8월 13일 자에 쓴 시론은 더 가관이다. “…정로(正▦)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엊그제 국보위 상위장 전두환 장군이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세하게 밝혀준 그 길이 곧 바른 길이다… 우리 국가의 앞날이 그 길로만 차질없이 뻗어간다면 민족의 생존과 번영이 어김없이 우리 모두 기대하는 그대로 이뤄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이들 뿐 아니라 일제시대로부터 순수문학을 부르짖어온 시인 김춘수,소설가 김동리(사망), 문학평론가 조연현(사망), 수필가 조경희 등이 앞다투어 군부독재정권을 미화하는 글을 남겼다. 그 결과,김춘수는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조경희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과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거쳐 88년 노태우 정권 아래서 정무 제2장관에 올랐다.
물적 증거가 확실한 문인들 만이 5·6공의 정권 구축을 도왔던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이 당시 대표적인 저항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을 호도하기 위해 벌였던 ‘국풍 81’에는 민속학계의 전문가들이 동원됐다.81년 5월28일부터 닷새동안 여의도에서 열렸던 이 국적불명의 ‘쇼’는 마당극계의 연출가 허규와 민속학자 임동권 등이 기획을 맡아 대학가의 5월 데모를 무마하고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놀이마당으로 만들었다. 그 뒤 허규는 행사 직후인 8월 19일 국립극장장에 취임해 89년까지 9년동안 역임했고,임동권은 현재 문화재 전문위원장으로 있다.
80년대 ‘민중미술’권에 대한 혹심했던 탄압의 뒤에도 역시 전문미술가들이 있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그림을 그렸던 ‘현실과 발언’ 동인들이 80년 10월 17일부터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려던 창립전은 서양화가 권옥연 등이 위원으로 있던 '전시회 운영위원회’의 일방적인 대관취소 결정으로 개막도 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또 82년부터 87년까지 민중미술 작가들을 투옥하고 작품을 압류하는 등 군부정권이 미술계를 단속하는데 쓰인 이른바 ‘미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이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인 이경성과 전문위원이었던 오광수였다.
음악인들 가운데선 72년부터 85년까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군부정권을 찬양하는 협회 이름의 지지선언서를 낸 성악가 조상현이 있다. 그는 이사장을 사퇴한 85년에 민정당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신했다.
이들은 대부분 우리 문화예술계의 원로로서 각계 고문으로 있으면서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친일부역 문인·예술인들을 뿌리 뽑지 못해 당했던 일제잔재의 문화체험을 독재잔재의 문화체험으로까지 확장시키며 21세기를 맞는 불행한 국민이 될 지도 모른다.
서정주의 친일시
[한겨레신문 96년 03월 27일자 14면]
선운사 시비가 부끄러운 어두운 시대 변절
/가미가제 찬미 ‘마쓰이오장 송가’등 일제말엽 발표… 생가 돌보는이 없어 스산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막걸릿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서정주 ‘선운사 동구 ’ 전문)
선운사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을 보러 간 길도 아니었다. 동백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4월말이나 되어야 만개한다는 사실쯤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젊은이 희생 미화
선운사에서 지척지간에는 미당 서정주(81)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가 있다. 한글로는 표기가 같고 거리도 가까워 혼동하기 십상이지만, 선운사와 선운리의 한자표기는 엄연히 다르다.
당연한 이치로, 정읍과 고창의 중간지점으로 이 일대 교통의 요지인 흥덕에서는 선운사행 버스와 선운리행 버스가 따로 있다.흥덕에서 서쪽으로 출발한 버스가 부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변산반도가 마주 보이는 줄포만의 해안 마을을 훑으며 얼마쯤 달리다가 멈추어선 종점이 선운리. 이곳 사람들이 질마재 부락이라 부르는,미당의 고향이자 그의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신화〉의 무대가 되기도 한 곳이다. 산자수명하고 양광과 인심이 다같이 따사로운 이곳에 와서 시인 미당의 흠집을 들추어야 하는 객의 심회는 착잡하기만하다.
〈안 잊히는 일들〉이라는 제목의 미당 시집도 있거니와, 그가 스스로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이라 지칭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그가 일제 말엽에 발표한 몇편의 친일시와 산문을 일컫는 것이 다. 그의 친일시는 지난 85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소개된 뒤 다른 문인들의 작품과 함께 두권짜리 〈친일문학작품선집〉으로 묶여나 오면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선집에는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등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들을 필두로 주요한 박종화 박영희 김팔봉 이효석 유치진 모윤숙 노천명 조연현 등의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아예 한국문학사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양 포진하고 있었다.
“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인씨의 둘째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귀국대원”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비롯된 태평양전쟁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미당의 시 ‘마쓰이오장 송가’는 다름아니라 저 악명 높은 일본 군국주의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찬미하고 있다. 게다가 그 무모한 전술에 한낱 군수품으로 동원된 생때같은 목숨인즉 인씨 성을 가진 엄연한 조선 젊은이의 것이다.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같은 미국 군함!//(…)//장하도다/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중일전쟁에 이은 태평양전쟁의 도발, 38년부터 시행된 국가총동원법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 파쇼 일본이 조성한 발악적인 전쟁 분위기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1939년 발족한 친일 조선문인협회(회장 이광수)의 등장은 미당이라고 해서 뒷짐을 지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로 “정치와 전쟁세계에 대한 내 무지와 부족한 인식”으로 친일시며 산문을 쓰고 있는 동안 총독부를 등진 집에서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만해는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고, 이육사와 윤동주는 각각 베이징과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외로운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죽음으로써 일제 통치에 항거한 이들 말고도 현진건 조지훈 정인보 황순원 김영랑 김동명 변영로 신석정 등이 은둔하거나 아예 붓을 꺾는 방식으로 굴욕적인 부일협력을 피했다.
전두환대통령 지원연설도 이렇듯 때로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선비의 양심과 민족적 자존을 지키고자 한 동료들을 놓고 보면 미당의 친일시는 진정 안타까운 과오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그가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유종호)이라거나 “시 쓰는 일에 있어서 백 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인물”(김재홍)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하다. 미당은 지난 81년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지원연설에 나섬으로써 예술적 재능과 정치적 판단 및 도덕적 선택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해 다시한번 성찰해 보도록 만들었다.
질마재 부락의 미당 생가는 6년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폐가의 몰골을 하고 있다. 선운국민학교에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로 바뀐 데 이어 그마저도 폐교 위기에 놓여 있는 동네 학교의 형편에서 보듯 마을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이 집 앞에는 철쭉이며 홍도화며 영산홍 따위의 꽃나무 수백주가 잘 가꾸어져 있다.
그것들은 생가 옆집에 홀로 살고 있는 미당의 동생 정태(73)씨가 사다 심은 것이다. 그 자신 시인이자 언론인 출신인 정태씨는 홍진과 세파를 피해 지난 89년 낙향한 뒤 부락 뒷산인 소요산이며 선운산 자락을 훑으며 난을 캐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
생가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는 미당의 양친과 조부모 등의 무덤이 있어 미당은 한식과 추석을 전후해 1년에 두번쯤 내려온다. 그럴 때면 자신의 시비가 두개나 서 있는 선운사 앞 동백 호텔에서 묵는다고 한다.
정태씨는 미당이 16, 7세 무렵 대지주 인촌 집안의 마름으로 있던 부친에게 “그만두라”고 하자 부친이 선뜻 받아들였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형님도 형님이지만 아버님도 예사 분이 아니셨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은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미당의 시 ‘자화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듯싶었다.
미당의 생가와 〈질마재신화〉의 무대를 찾아서는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1백70년 전에 지어져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생가는 시간의 무게와 함께 무심한 인정에 대한 탄식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고향 질마재마을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시집 〈질마재신화〉의 무대이기도 한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부락의 전경. 줄포만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곳이 변산반도다.
미당 친일 새얼굴 드러나
미당 서정주의 친일 문학작품 세 편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국문학자 김재용 교수(42·원광대 한국어문학부)는 <실천문학> 여름호에 서정주의 시 <헌시>와 <무제>, 그리고 산문 <경성사단대연습종군기>를 발굴, 소개했다. 두 편의 시는 타계한 친일문학 전문가 임종국의 저서 <친일문학론>의 부록인 `관계작품연표'에 제목만이 실려 있던 것으로, 작품이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 <경성사단 대연습종군기>는 그 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글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제>는 일본어로 되어 있고, 나머지 두 편은 한글로 쓰여졌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 치에 실린 <헌시>는 학병 출정을 권하는 작품이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고 시작되는 이 시는 미당 특유의 어투에 이미지와 운율이 효과적으로 구사된 `수작'이다. 그러나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 버리고/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 버리고//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는 `사주'는 얼마나 끔찍한 아름다움인가.
<국민문학> 1944년 8월호에 창씨개명한 미당의 이름 `달성정웅(達城精雄)' 명의로 발표된 <무제>는 `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옥쇄한 격전지들을 거명하며 전사자들을 향한 슬픔과 공감의 마음을 격정적인 어조로 노래한다.
“어머니여. 저곳이리라, 그대가 낳은 내 동포의 넋들이 모두 돌아올 곳은/앗츠에서 매킨·타와라에서 또한 사이판에서/모두 전사하여 돌아올 곳은/저곳이리, 저곳이리 아아, 견딜 수 없는 색으로 물들어”
시는 전사자들의 뒤를 따르겠노라는 기껍고도 결연한 각오를 밝히며 끝을 맺는다.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희생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배를 띄우리/사이판으로!/매킨·타와라로!/앗츠로!”
역시 `달성정웅' 명의로 <춘추> 1943년 11월호에 실린 <경성사단대연습종군기>는 경성사단의 전북지역 훈련 현장을 따라가서 쓴 글이다. 서정주는 훈련 종군기를 두 편 썼는데, 그 중 한 편은 기왕에 알려져 있었다.
김재용 교수는 <실천문학>에 서정주의 친일문학에 대한 별도의 논문을 실었다.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친일문학'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 교수는 미당의 친일문학은 일제가 주창한 대동아공영권론에 대한 자발적 동의에 바탕한 것으로, 그에게 있어 전쟁 찬미와 동양적 세계의 추구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소설가 조정래(59)씨 역시 같은 잡지에 `용서는 반성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미당의 친일문학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학교 스승이자 부인 김초혜 시인을 등단시킨 은사이며 두 사람 결혼식의 주례였던 미당과의 남다른 인연을 설명한 뒤, 생전에 그로부터 공개적인 사죄의 말을 받아내려 했다가 실패한 일화를 소개한다. 결국 죽을 때까지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하지 않음으로써 미당은 자신이 매듭지었어야 할 역사의 짐을 후세에게 떠넘기고 말았다는 것이 조씨의 결론이다.
시인 고은 “미당 선생을 비판한다”
지난 연말(2000년) 작고한 시인 미당 서정주에게 `또 하나의 정부'라는 헌사를 바친 것은 후배 시인 고은씨였다. 사실 고은씨는 1958년 미당의 추천을 거쳐 등단했으므로, 1933년생인 고씨가 1915년생인 미당의 제자 뻘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미당에 대한 육친적 발심과 함께 그의 시에 대한 심취는 그 누구보다 더한 바 있었다”는 고씨의 말마따나 그와 미당의 관계는 가히 아름답다 할 만했다. 1960년대의 고은씨는 마포 공덕동 미당 집을 가장 자주 출입한 인물이었다. 김수영이 죽은 뒤 동참을 권유하는 참여문학 쪽 문인들에게 `미당 다음은 몰라도 수영 다음은 싫다'고 말한 것도 고은씨였다.
그런 그가 미당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섰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쓴 평론 <미당 담론―`자화상'과 함께>에 그의 비판이 들어 있다.
물론 고은씨는 그가 진보적 참여문학에 적극 가담한 1970년대 이후 미당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1983년 어느 회합에서 마주쳐서는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라 말하는 미당에게 “선생님 세상 떠나시면 가겠습니다”라는 매몰찬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결국 그 `약속'을 지켰다.
역사의식의 부재와 현실 권력에의 야합 등 <미당 담론>에서 고은씨가 미당을 비판하는 요지는 그간 미당에게 가해졌던 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은씨는 <자화상>을 비롯한 미당의 시들을 근거로 그런 비판을 행한다. 그에 따르면 미당은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 할 만하다. “체질적인 자기합리화”,그리고 “혹심한 이기주의나 무례한 자아군림주의”는 “<자화상>으로부터 <내 아내> 등에 이어지는 수많은 사어(私語)로서의 시세계”를 낳았다.
고은 시인은 특히 미당의 권력의존적 속성을 매섭게 비판한다. 자신의 친일을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말로 호도한다든가, 전기 <이승만전>을 거쳐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운운한 전두환 생일 축시 <처음으로>에 이르기까지 미당의 해바라기적 성향은 일관되고도 끈질겼다. 고은씨는 “화해는 아픔 없이는 오지 않는 것”이라며 미당의 친일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서 “순수문학의 노선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순수한 상태,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서정주 시인이 남긴 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영면했다.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밤 11시7분,첫눈이 도시 위에 천사처럼 내려올 때 그는 병상을 지키던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조용히 저 세상으로 떠났다.
미당(未堂).누가 평할지라도 그는 5000년 우리 역사의 가장 뛰어난 가인(歌人)중 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그는 한국시사의 으뜸가는 산봉우리였고 살아 있는 ‘문학권력’ 그 자체였다.그럼에도 그는 현실에서 힘을 행세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70년대 조성된 서울 사당초등학교 뒤편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누추한 가옥에 사는 유일한 문화예술인일 만큼 현실을 모르는 시인이었고,무수한 제자와 시인을 배출했어도 ‘청산이 품에 지란을 기르듯’ 그렇게 놓아 기르는 시인이었지 어떤 세력이나 파벌을 둘러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년은 더없이 초라하고 누추했다.지난 10월 부인 방옥숙 여사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의 집을 찾는 문인들은 아주 드물었다.방여사 타계 후 자신이 갈 곳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서럽다”고 하소연했고,얼마 남겨지지 않은 날을 자식들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병든 몸으로 미국에 갈 계획을 세워야 했을 만큼 적적한 처지였다.
대시인의 서러움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그 중 하나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한국문단을 포함하여 이 세상이 사람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지싶다.
그는 일제시대의 친일 행적과 80년대 있었던 전두환 장군에 대한 덕담 때문에 말년까지 문단에서 배척을 받고 고통스러워했다.그의 과거 행적은 그에 상응한 비판을 받아야 하겠지만,한편으로 그는 보통사람과 같은 생각의 코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당을 상당기간 취재하면서,전두환 장군 발언으로 그만한 수난을 당했을지라도 다시 80년이 와서 또 그만한 회유를 받는다면 미당은 “나는 이제 못하겠소”할 사람이 아니라 다시 한번 “전두환 장군의 웃음은 단군할아버지가 보아도 웃으실 것”이라고 하고도 남을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만큼 그는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그릇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보였다.쉬운 예를 들자면 이창호의 바둑이 다른 프로기사들의 세계와 다르듯,미당의 세계는 보통사람들과의 코드가 사뭇 다른 것임에도 우리 문단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코드로 그를 얽어매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말년에 기자에게 이런 당부를 한 적이 있다.“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일컫는 폴 발레리며 보들레르의 시세계와 나의 시를 스스로 견주어 본 적이 있다.나는 그들의 시세계를 오래 전에 넘어섰으며 더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고 확신했다.
일본에서는 나의 시세계를 그렇게 본 평론가가 단 한 사람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막연한 칭찬이거나 샤머니즘 혹은 불교적 논평에 그치고 만 것으로 안다.우리나라에도 그런 평론가가 한 사람 있었더라면…(나의 시는 세계 시단에서 지금과는 다른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이 말은 내가 죽은 다음에 써 달라” /임순만문화부장
미당 시세계 마땅히 기려야
그릇 큰 시인을 가늠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첫째, 풍요한 작품량
둘째,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언어구사
셋째, 독자적인 세계 이해나 통찰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화사집』에서 『늙은 떠돌이의 시』에 이르는 14권의 시집을 보여준 미당 서정주 선생이 20세기 최대의 한국시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풍요한 생산량이 졸속적 대량생산의 소산인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미당의 경우 끝자락의 『산시(山詩)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한결같이 높은 수준과 균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언어의 창의적 구사는 독자에게 새로운 인지의 충격을 가하게 마련인데 그러한 사례는 미당 시 곳곳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미당의 시력 65년은 정상에서의 끊임없는 모색과 변모와 성취의 눈부신 기간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란 도전적인 선포로 시작되는 '자화상' 에서 엿볼 수 있듯이 청년기의 미당에게서는 '저주받은 시인' 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자임이 보인다.
징그러운 뱀과 문둥이와 보리밭의 야외 정사 등 통념상의 비시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자학과 오뇌의 미학을 보여준 것이 초기의 특징이었다. 소재가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만큼 언어 표현에서는 상대적으로 무잡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의 제2시집 『귀촉도』를 전후해 그는 귀향자의 모습을 뚜렷이 하면서 언어구사면에서도 한결 세련되고 치밀해진다.
훌륭한 시는 소리와 뜻의 서정적 통일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음률성은 기억촉진적이기도 하다.
소리와 뜻의 조화란 관점에서 보면 『귀촉도』에서 제3시집 『서정주시선』에 이르는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모든 유럽국가가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전통' 을 대량 생산했다고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지적하고 있다. 문학적.개인적 차원에서 '전통' 창제를 시도한 것이 시집 『신라초』 『동천』의 세계다.
그것은 독자적인 신라정신의 구축이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불가피하게 했고, 독자에 따라 찬.반과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도 했다.
갑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당은 대담한 산문 지향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연 『질마재신화』를 선보인다. 전통적 농경사회와 그 기층민 문화의 시적 탐구인 이 걸작 산문시집은 가장 독자적이고 성공적인 민중문학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미당은 우리 역사에서 취재한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와 시로 쓴 자서전 『안 잊히는 일들』을 선보여 다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아무거나 붙들고 무슨 말을 해도 시가 되는 것을 두고 득도의 경지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쿤데라가 독특한 의미를 붙여 전파시킨 키치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다. 넓이와 깊이를 아우르고 있는 미당 시는 부족방언의 세련이 거둔 매혹적인 시적 승리다.
미당의 빛나는 성취에는 타고난 천분과 뼈깎기 노력 이외에도 개인적 행운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장수와 함께 8.15 해방을 서른 초입에서 맞았다는 사실, 시인으로서의 원숙기가 경제성장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연조차도 강자의 편을 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수 또한 의지와 노력의 소산임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어디서나 뛰어난 재능은 희귀한 법이다.
살아 있는 고전이 영세한 우리 터전에서 전범에 값하는 미당의 시는 현대의 고전으로 숭상돼야 마땅하다. 미당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한국어의 마스터는 불가능하다. 유종호(문학평론가)
미당 선생을 보내며'
성탄전야,거실 창너머로 흰눈이 내려 소복히 쌓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그때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한순간 말할 수 없는 비감함과 서운함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아,결국 그분이…” 하는 탄식이 폐부 깊숙이 메아리쳐 갔습니다.
그러나 슬픔의 절실함과는 별도로 전화를 끊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귓가에는 선생님이 남기신 시의 한 구절이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괜찬타,……/괜찬타,……/괜찬타,……/괜찬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어서였을까요.6·25전쟁의 비극과 간난고초 속에서 선생님이 거두신 절창 중의 하나인 ‘내리는 눈발 속에서’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살이의 힘듦과 고달픔이야 어느 시댄들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만 전쟁이란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정신착란의 증세까지 더불고서 통과해온 시절에 이러한 도저한 달관의 경지를 절절하고 빛나는 언어로 직조해낼 수 있었던 선생님을 생각하니 새삼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선생님을 잃은 슬픔을 선생님이 남기신 시로 위로받는 이 역설적인 정황이라니!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난 세기 동안 한국인의 심성을 형성해온 가장 중요한 질료 중의 하나가 사실 선생님의 시 아니었습니까.적어도 글줄이나 읽어본 사람이라면 선생님의 시에 나오는 이런저런 구절을 상기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노여움과 초연함을 말의 형태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한국어가 근대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노출된 지 이제 백여년.그 세월 동안 만일 선생님의 시가 없었다면 한국어는 얼마나 가난하고 적막한 신세를 감수해야 했을까요.참으로 선생님은 ‘부족방언의 마술사’요 ‘우리 시의 지존’이었습니다.
우리 시에 진정 ‘야수파’의 등장이라 부를 수 있는 전무후무한 감수성의 변혁을 몰고온 처녀시집 ‘화사집’의 들끓는 언어를 기억합니다.한국어가 얼마나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깊이로 충만할 수 있는지 증명해준 ‘귀촉도’와 ‘서정주시선’의 섬세하고 유려한 표현들을 기억합니다.육신의 영생과 정신의 부활을 꿈꾸던 장년기의 선생님이 도달한 ‘신라초’와 ‘동천’이란 아스라한 세계의 매혹을 기억합니다.그리고 ‘질마재 신화’와 숱한 기행시에서 보여준 걸직하고 풍요로우면서 유머러스하기도 한 언어의 카니발을 기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선생님에겐 재능과 노력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다시없는 은총이요 선물이었습니다.영국시인 W H 오든이 선배 시인 예이츠에 대한 추모시에서 말한 대로 선생님은 “시를 경작함으로써/저주를 포도원으로 만들”었고 “마음의 사막에/낙수샘이 솟아나게” 했습니다.선생님의 언어의 촉수가 가닿는 자리마다 잊을 수 없는 모습들이 기막힌 표현의 옷을 입고 떠올랐습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선생님의 처지와 계획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으며 많은 문인들이 쓸쓸해했습니다.심지어 이땅을 떠나 멀리 이국타향에서 만년을 보내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까닭없이 우울해하기도 했습니다.곡기를 끊고 병석에 누워계신지 두달째,결국 선생님은 모든 집착과 번뇌를 놓아버리고 영생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모든 오욕와 오해는 지상의 것으로 남기고 오로지 당신이 남긴 시의 영광과 함께 천상에서 평안하소서.한국어의 생명이 지속하는 한 선생님의 시는 영원할 것입니다.남진우(시인)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밤이 기퍼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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