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예찬>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톳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흙(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朱土)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永劫)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흩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 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곱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수 없나니
분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백조3호(1923.9) 수록.
이탈리아의 유미주의 작가 다눈치오의 장편소설<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찬
*훈향: 신록의 향기
*칠흑: 옻칠같이 검은 것
*만화경: 장난감의 하나
*추예: 지저분하고 더러움
<청자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
빛깔 오호 빛깔 !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씃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흐 이것은
천 년 묵은 고려 청자기 !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七寶)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寶相華文) 불타(佛陀) 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
*조광(1940.6) 수록
고려 청자의 신묘하고 정교한 솜씨를 찬양한 시. 청자기를 대한 시인의 우아한 안목과 폭넓은 지식이 이 시를 한결 섬세하고 부드럽게 해 준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민족혼을 되찾고, 조국의 얼을 일개워 주려 의도하고 있다.
*주제는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
*부(賦): 한시체이 한 가지
*향합: 향을 담은 그릇
*연적: 벼룻물을 담는 그릇
*칠보: 일곱 가지 보배(금,은,마노,유리,거거 ,진주,매괴)
보상화문: 당초(唐草) 무늬의 일종
'한국시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백석, 그리움의 한 원형 (0) | 2006.05.12 |
---|---|
[스크랩] ▶ 조진영 詩人의 『 사랑하므로.... 』 (0) | 2006.05.11 |
[스크랩] 봄날은 간다 (0) | 2006.05.11 |
[스크랩] 최갑수 <밀물여인숙 1> (0) | 2006.05.10 |
[스크랩] 詩人서정주 (0) | 2006.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