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가

박종화 ........사(死)의 예찬

바보처럼1 2006. 5. 11. 23:01

<사(死)의 예찬>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톳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흙(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朱土)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永劫)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흩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 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곱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수 없나니

분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백조3호(1923.9) 수록.

이탈리아의 유미주의 작가 다눈치오의 장편소설<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찬

*훈향: 신록의 향기

*칠흑: 옻칠같이 검은 것

*만화경: 장난감의 하나

*추예: 지저분하고 더러움

 

 

<청자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

 

빛깔 오호 빛깔 !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씃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흐 이것은

천 년 묵은 고려 청자기 !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七寶)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寶相華文) 불타(佛陀) 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


 

*조광(1940.6) 수록

고려 청자의 신묘하고 정교한 솜씨를 찬양한 시. 청자기를 대한 시인의 우아한 안목과 폭넓은 지식이 이 시를 한결 섬세하고 부드럽게 해 준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민족혼을 되찾고, 조국의 얼을 일개워 주려 의도하고 있다.

*주제는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

*부(賦): 한시체이 한 가지

*향합: 향을 담은 그릇

*연적: 벼룻물을 담는 그릇

*칠보: 일곱 가지 보배(금,은,마노,유리,거거 ,진주,매괴)

보상화문: 당초(唐草) 무늬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