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초>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며,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문장3호(1939.4) 수록
4군자의 하나인 난초를 예찬한 노래이다.
*주제는 난초의 맑고 깨끗한 성품.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 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가람문선(1966) 수록.
1연: 귀향심, 2연: 애향심, 3연: 개척심을 가기 노래했다.
*주제는 부흥에의 의욕과 새로운 삶의 의지
*암 데나: 아무데에서나의 준말
<비>
짐을 매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 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조선문단23호(1935.5) 수록
2연 종장은 감정 이입,3연 중장은 돈강법.
*주제는 임과의 이별의 아쉬움.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섭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가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들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도,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가람시조집(1947) 수록.
작자가 국토 순례를 하면서 쓴 시조 중의 하나.
*주제는 백제에의 회고의 정
*아차산(峨嵯山): 서울 워커힐뒤에 있는 산. 백제의 요충지로서 옛 성터가 있음.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 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신생49호(1932.12) 수록
<박연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궂지 아니하도다.
*가람시조집(1939) 수록
1연:산인이 된 즐거움,
2연:박연폭포의 장엄함,
3연: 자연의 영원성을 각기 노래하고 있다.
*주제는 박연 폭포의 장엄한 정경을 통해 본 자연의 영원성을 기림.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현대문학(1953.3)수록
*주제는 생명의 신비감.
<창>
우리 방으로는 창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수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진귀한 고서(古書)를 펴어 서항기(書巷氣)나 기를까.
나의 추와 미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와 낙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임종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젖>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 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가람시조집(1939)수록
어머님을 임종하시던 날, 자식들에게 사랑의 상징인 젖을 보여 주셨다. 이를 작품화한 것.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봄>
봄날 궁궐 안은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御苑) 넓은언덕 버들은 푸르르고
소복한 궁인은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신생(1931)수록
*젖통적인 대상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다.
<가섭봉(迦葉峯)>
요리 조리 돌아 굴을 겨우 벗어나니
앙상한 배화(白樺) 서리 눈인 양 돌로 희고
트이는 깜한 허공에 봉이 새로 솟는다.
서대는 다람쥐가 길을 자조 알리우고
잦은서리 틈에 석남(石楠)은 연연하고
젖나무 썩어진 뿌리 향은 그저 남았다.
날 인 바위 끝이 발 아래 떨고 있고
봉마다 골마다 제여금 다른 모양
한눈에 모여 드나니 다만 어질하여라.
<계곡>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 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은 비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홈으로 내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도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럽힐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고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워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 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엄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 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 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던 봉우리 발 아래로 놓인다
<매화>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쉬고
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고 못한 그 매화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이리 자취 잃은 그 매화
<비오리>
썩은 고목 아래 전각(殿閣)은 비어 있고
파란 못물 위에 비오리 한 자웅(雌雄)이
온 종일 서로 따르며 한가로이 떠돈다
<총석정>
때로 이는 물결 밀어 오다 스러진다
눕고 앉고 서서 바다를 노려보고
아직도 느긋한 마음 태고런 듯하도다
한껏 고요하고 유리보다 맑은 바다
어두운 굴에 금란(金蘭)이 빛이 나고
알섬에 알을 나 두고 갈매기로 날아온다.
<돌아가신 날>
가시던 그 날 밤은 해마다 돌아온다
닭의 운는 소리 더우기 서글프고
울고 난 그 눈과 같이 지는 달도 붉어라
*우리의 전통적 감정인 한(恨)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가람의 시조를 위한 활동은 세 경우로 나우어 평가될 수가 있다
첫째, 우리 시조에 현대적인 서정을 담아 서정시조이 길을터 놓았다.
둘째, 육당과 더불어 시조 부흥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세째, 후진의 발굴과 육성. 가람에의해 뽑힌 작가가 김 상옥, 이호우, 이 영도, 조 남령 등인데, 이들은 모두 한국현대 시조의 주요 작가가 되었다.
*가람은 '시조는 혁신하자'란 글에서 혁신할 점으로 다음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실감(實感) 실정(實情)을 표현하자. 둘째,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세째, 용어의 수삼(數三). 네째, 격조의 변화, 다섯째, 연작을 쓰자. 여섯째, 쓰는 법, 읽는 법.
*가람의 첫 작품집인 <가람시조집>은 1939년 문장시에서 나왔다. 한지를 사용한 104면의 이 책에는 67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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