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연스님의 차 이야기

역사에 기록된 차인茶人

바보처럼1 2007. 4. 23. 15:15

[차이야기] 역사에 기록된 차인茶人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그 의미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근간을 말할 때는 보통 선비정신이라고 말한다. 수기치인이 바탕이 된 선비. 즉, 사대부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힘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아닌 명분과 의리를 밝혀 국민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수기(修己: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닦음)를 바탕으로 치인(治人:남을 다스림)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선비는 문장과 역사와 철학의 이치를 깨우쳐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시·서·화(詩·書·畵)를 통한 예술적인 감성을 갖춘 완전한 인간형을 지향한다.

그들 중에서도 차생활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은 역사에 기록된 차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라 경덕왕 때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를 만든 충담 스님을 들 수 있는데 왕의 요청으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리자 스님을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라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 안민가

이때 스님은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올리고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주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이 시기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차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차인 중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토황소격문 등으로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은 귀국 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난세를 절망하여 각지를 유랑하던 그가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할 때 지은 것으로 현실과 뜻이 맞지 않아 고뇌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잘 나타내고 있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제가야산독서당 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의 《계원필경》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차를 보내드렸다는 부분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상류층에서는 차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어, 잡념이나 번민을 없애는 수양의 방편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글 문정희 인천예절원 부원장 겸 인천차인회 회장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기사일자 : 200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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