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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3일 (화) 17:18 연합뉴스
▶한국의 名人◀ (37) 남포벼루 장인 김진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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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좋으니까 만들지.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지, 누가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남포(藍浦)벼루를 만드는 데 평생을 보낸 충남도 무형문화재 6호 김진한(67.金鎭漢)씨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며 힘주어 말한다.
봄답지 않게 바람이 거세게 부는 3월 말,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잡은 김씨의 작업장을 찾았다. 입구에는 세찬 바람에도 꿈쩍 않는 크고 묵직한 돌덩이들이 검푸른 빛깔을 띤 채 2-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이 돌은 보령 성주산에만 납니다. 보령 남포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다고 해서 남포벼루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근방에서 벼루 만드는 사람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명쯤 됐지만 이제는 몇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남포벼루는 서유구(1764-1845)와 성해응(1760-1839) 등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이미 그 우수성을 기록에 남겼을 정도로 오랫동안 품질을 인정받아 왔다. 김씨 집안에서는 3대째 남포벼루 제작 기술을 잇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나무 지게에 독 하나만 짊어지고 고향인 서천을 떠나 보령 남포지역으로 터를 옮겼고 다듬이돌이나 맷돌을 만들어 5일장에 내다 팔다 뒤늦게 서당에서 쓰이는 벼루인 '문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씨의 아버지도 그 뒤를 이어 한평생 벼루를 만들었으며 일제시대 보통학교에서 벼루 제작 기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다섯 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씨는 어렸을 적부터 형이나 동생들보다 유독 돌 만지기를 좋아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벼루 만드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며 "아버지가 학교에 나가신 사이 작업 중인 벼루에 손을 대 망가뜨리고선 아버지가 언제 돌아와 혼을 내시려나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김씨는 손재주가 좋아 금세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의 칭찬에 자신감이 붙어 돌을 고르고 다듬기 시작한 그는 결국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벼루 만드는 데 보내 왔다.
김씨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벼루 제작기술을 체계화한 점을 인정받아 1987년 12월 충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데 이어 1996년 9월 노동부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는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단하고 좋은 돌을 고르는 일이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다듬기 쉽다고 무른 돌을 쓰면 좋은 벼루를 만들 수 없다. 무른 돌로 만든 벼루는 먹이 제대로 갈리지 않아 글씨 쓰는 종이에 먹이 붙어버리고 벼루가 물을 흡수해 버려 담아놓은 먹물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가 만든 벼루가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도 남포석 가운데 가장 단단한 백운상석(白雲上石)만 골라 쓰기 때문이다. 백운상석은 원석 자체에 흰 구름 무늬가 있으며 단단하고 윤기를 띈 최상급 돌이다.
"가끔 남포벼루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들이 들고 오는 벼루를 들여다보면 상석이 아니라 중석(中石)이나 하석(下石)으로 만든 벼루지요. 한번 이미지가 나빠지면 되돌려 놓기 어렵거든요. 그럼 내가 만든 벼루를 일단 가져가 써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돌려보내라고 해요. 지금까지 한명도 벼루를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돈을 보냅디다"
그가 돌을 캐 오는 곳은 성주산이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지고 오십리 길을 걸어 산에서 작업장까지 돌을 날랐다.
"욕심껏 많이 짊어졌다가 중간에 내려놓기도 여러 차례였지요. 이제는 현대식 장비가 있으니 편하지. 입구에 쌓인 돌로 앞으로 1년 간 벼루를 더 만들 수 있어요"
그는 캐 온 돌을 직접 개발했다는 절단기로 잘라 대강의 모양을 잡은 뒤 손으로 각을 낸다. 그 위에 전통적인 무늬를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겨 넣고 뚜껑의 조그만 손잡이에까지 문양을 새기는 등 세심하게 다듬는다.
무늬로는 용이나 봉황, 나무, 꽃, 구름 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돼 이에 따라 연화연(蓮花硯), 매조연(梅鳥硯), 산수연(山水硯), 송학연(松鶴硯), 쌍룡연(雙龍硯) 같은 이름이 붙여진다.
"여기 새의 눈을 이렇게 조금만 잘못 그려 놓으면 죽은 동물이 돼 버립니다.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야지요."
그가 현재 작업 중인 매조연 위에 조각된 새의 눈매를 칼로 다듬자 금세 생생한 표정이 살아났다.
김씨는 "사회가 급변하니까 서예도 점점 쇠퇴해요. 어린 학생들이 정서적인 교육을 못 받고 크는 게 가장 아쉬워요. 한자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고..."라며 설 자리를 잃어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쳤듯이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 아들 성수(36)씨에게 틈틈이 벼루 만드는 법을 가르쳐 왔지만 아들은 벼루 제작보다 연구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니까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있어요. 그래도 손재주가 있으니 제 뜻을 이루고 나면 벼루도 만들겠지요"
김씨는 벼루 제작기술을 당장 대물림하기보다 앞으로 자신의 평생의 역작을 남기기 위해 도전하려는 뜻이 더 커 보였다.
그는 1989년 설립한 전통한국연개발원에서 고연(古硯) 재현과 현대벼루 개발에 몰두하는 한편 도비와 시비 지원을 받아 작업장 옆에 벼루 전시관과 체험장을 짓고 있다.
"아직도 내 생애에 가장 완벽한 벼루는 못 만들었어요. 나이 먹을수록 눈만 높아지니 성에 안 차지. 영감은 잘 떠오르는데 손으로 옮겨 놓으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앞으로도 최고의 벼루를 만들기 위해 계속 도전할 겁니다"
cheror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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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藍浦)벼루를 만드는 데 평생을 보낸 충남도 무형문화재 6호 김진한(67.金鎭漢)씨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며 힘주어 말한다.
봄답지 않게 바람이 거세게 부는 3월 말,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잡은 김씨의 작업장을 찾았다. 입구에는 세찬 바람에도 꿈쩍 않는 크고 묵직한 돌덩이들이 검푸른 빛깔을 띤 채 2-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이 돌은 보령 성주산에만 납니다. 보령 남포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다고 해서 남포벼루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근방에서 벼루 만드는 사람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명쯤 됐지만 이제는 몇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남포벼루는 서유구(1764-1845)와 성해응(1760-1839) 등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이미 그 우수성을 기록에 남겼을 정도로 오랫동안 품질을 인정받아 왔다. 김씨 집안에서는 3대째 남포벼루 제작 기술을 잇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나무 지게에 독 하나만 짊어지고 고향인 서천을 떠나 보령 남포지역으로 터를 옮겼고 다듬이돌이나 맷돌을 만들어 5일장에 내다 팔다 뒤늦게 서당에서 쓰이는 벼루인 '문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씨의 아버지도 그 뒤를 이어 한평생 벼루를 만들었으며 일제시대 보통학교에서 벼루 제작 기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다섯 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씨는 어렸을 적부터 형이나 동생들보다 유독 돌 만지기를 좋아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벼루 만드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며 "아버지가 학교에 나가신 사이 작업 중인 벼루에 손을 대 망가뜨리고선 아버지가 언제 돌아와 혼을 내시려나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김씨는 손재주가 좋아 금세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의 칭찬에 자신감이 붙어 돌을 고르고 다듬기 시작한 그는 결국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벼루 만드는 데 보내 왔다.
김씨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벼루 제작기술을 체계화한 점을 인정받아 1987년 12월 충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데 이어 1996년 9월 노동부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는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단하고 좋은 돌을 고르는 일이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다듬기 쉽다고 무른 돌을 쓰면 좋은 벼루를 만들 수 없다. 무른 돌로 만든 벼루는 먹이 제대로 갈리지 않아 글씨 쓰는 종이에 먹이 붙어버리고 벼루가 물을 흡수해 버려 담아놓은 먹물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가 만든 벼루가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도 남포석 가운데 가장 단단한 백운상석(白雲上石)만 골라 쓰기 때문이다. 백운상석은 원석 자체에 흰 구름 무늬가 있으며 단단하고 윤기를 띈 최상급 돌이다.
"가끔 남포벼루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들이 들고 오는 벼루를 들여다보면 상석이 아니라 중석(中石)이나 하석(下石)으로 만든 벼루지요. 한번 이미지가 나빠지면 되돌려 놓기 어렵거든요. 그럼 내가 만든 벼루를 일단 가져가 써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돌려보내라고 해요. 지금까지 한명도 벼루를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돈을 보냅디다"
그가 돌을 캐 오는 곳은 성주산이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지고 오십리 길을 걸어 산에서 작업장까지 돌을 날랐다.
"욕심껏 많이 짊어졌다가 중간에 내려놓기도 여러 차례였지요. 이제는 현대식 장비가 있으니 편하지. 입구에 쌓인 돌로 앞으로 1년 간 벼루를 더 만들 수 있어요"
그는 캐 온 돌을 직접 개발했다는 절단기로 잘라 대강의 모양을 잡은 뒤 손으로 각을 낸다. 그 위에 전통적인 무늬를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겨 넣고 뚜껑의 조그만 손잡이에까지 문양을 새기는 등 세심하게 다듬는다.
무늬로는 용이나 봉황, 나무, 꽃, 구름 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돼 이에 따라 연화연(蓮花硯), 매조연(梅鳥硯), 산수연(山水硯), 송학연(松鶴硯), 쌍룡연(雙龍硯) 같은 이름이 붙여진다.
"여기 새의 눈을 이렇게 조금만 잘못 그려 놓으면 죽은 동물이 돼 버립니다.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야지요."
그가 현재 작업 중인 매조연 위에 조각된 새의 눈매를 칼로 다듬자 금세 생생한 표정이 살아났다.
김씨는 "사회가 급변하니까 서예도 점점 쇠퇴해요. 어린 학생들이 정서적인 교육을 못 받고 크는 게 가장 아쉬워요. 한자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고..."라며 설 자리를 잃어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쳤듯이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 아들 성수(36)씨에게 틈틈이 벼루 만드는 법을 가르쳐 왔지만 아들은 벼루 제작보다 연구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니까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있어요. 그래도 손재주가 있으니 제 뜻을 이루고 나면 벼루도 만들겠지요"
김씨는 벼루 제작기술을 당장 대물림하기보다 앞으로 자신의 평생의 역작을 남기기 위해 도전하려는 뜻이 더 커 보였다.
그는 1989년 설립한 전통한국연개발원에서 고연(古硯) 재현과 현대벼루 개발에 몰두하는 한편 도비와 시비 지원을 받아 작업장 옆에 벼루 전시관과 체험장을 짓고 있다.
"아직도 내 생애에 가장 완벽한 벼루는 못 만들었어요. 나이 먹을수록 눈만 높아지니 성에 안 차지. 영감은 잘 떠오르는데 손으로 옮겨 놓으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앞으로도 최고의 벼루를 만들기 위해 계속 도전할 겁니다"
cheror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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