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다섯마당 중 하나인 ‘적벽가’의 중머리장단에 자주 등장하는 대목이다.‘적벽가’는 중국의 ‘삼국지연의’ 가운데 관우가 화용도에서 포위된 조조를 죽이지 않고 너그럽게 길을 터주어 달아나게 한 적벽대전을 소재로 했다.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민중의 소리가 담겨져 있다.‘적벽가’는 또 판소리 가운데 가장 부르기 힘들어 완창 무대에 잘 오르지 않는데다 여성 명창보다는 남성 명창들에 의해 전수돼 왔다.
|
판소리 명창 안숙선(57).‘국악의 프리마 돈나’라는 이름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을 보유하고 있다.‘명창’이란 전국대회에서 장원해야 하며 ‘국창(國唱)’이라고도 한다. 안씨는 1986년 남원 춘향제에서 장원했다. 그러니까 새해에는 꼭 ‘명창 20년’이 되는 셈. 이래저래 의미가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는 31일 오후 7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제야의 완창 판소리’라는 제목으로 두시간여 동안 ‘적벽가’를 완창한다. 개인적으로는 2년 만의 완창무대.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세곡동 자택에서 안씨를 만났다. 먼저 감회를 묻자 “한 해 마지막날 완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제야의 종소리 대신 판소리를 들으면서 내년의 희망을 가져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이어 “세상도 어수선하니 우리 음악을 들으며 뭔가 생각할 수 있고, 또 인생시, 인생노래를 감상하면서 조용히 한 해를 마감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냐.”고 말했다.
또한 “적벽가는 너그러운 관우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내년 한 해는 다들 너그럽고 평화롭게 살았으며 좋겠다고 희망했다. 안씨 개인적으로는 이달 말로 3년간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직을 끝내고 내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강단으로 돌아가 후학양성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된다. 아울러 그동안 미루어왔던 공부를 하는 등 좀더 완숙의 국악인생을 걷는다.
이번 무대를 위한 연습량을 묻자 “창극단 행정이며 전주 소리축제 심사위원 등을 맡아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면서 “요즘에는 주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연습을 한다.”고 토로했다. 원래 안씨는 명창 등극무대에서 ‘수궁가’를 준비했으나 스승인 박봉술 선생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여자 명창들에게 어렵다는 ‘적벽가’를 이어받게 됐다고 술회했다.
만약 명창이 아니었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어릴 적에 살림을 아주 잘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중에 커서 종갓집 맏며느리로, 현모양처가 되려고 했다. 일찍 시집이나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라며 웃는다. 국악인생을 살면서 후회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세월이 흘러 뒤를 돌아보니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지요. 그저 열심히 산다는 것이 행복이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는 시간, 그런 여유있는 삶을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가끔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 것을 돌아보고, 아무리 어려워도 이웃에 관심을 가져주면 이 정신 없는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젊었을 때 소리하는 사람들은 눈치나 보고 슬프게 느껴졌지만 연륜이 쌓이면서 날카로움이 생겨나고 소리가 몸 구석구석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요즘에는 (발성이)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다. 번개처럼 손끝과 발끝, 뒷덜미를 넘나들고 들숨 날숨도 그렇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득도의 경지라고나 할까.
판소리를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하자 “우리 소리는 대개 복식호흡이며 자연의 소리”라고 했다. 목소리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젊었을 때는 육류를 무척 좋아했지만 요즘에는 뒷산에서 자란 배추, 무, 고추 등 싱싱한 야채식 위주로 하고 있다.”고 귀뜀했다. 또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가끔 뒷산을 산책하며 혼자 소리를 뱉어내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제자들과 노래방에 갔을 때 지목을 받으면 어떤 노래를 부르냐고 하자 “판소리 외우느라 가요를 배우지 못했다. 이제라도 몇곡 배울 생각”이라면서 여러번 요청을 받으면 할 수 없이 남진의 ‘가슴아프게’를 부르고 마이크를 금방 내려놓는다고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판소리나 우리 가락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했다. 또 무한한 즐거움을 느꼈고 삶 그 자체라는 생각 속에 빠져 지내왔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국악은 현금으로 계산되지도 않고 그 어떤 드라마나 오락보다 정신적인 삶의 가치를 높여 준다는 것.
안씨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국악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대금 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이며, 외삼촌이 동편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 이모는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이다.
아홉살 때 명인 주광덕으로부터 소리의 기초를 배우고 강도근에게서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동편소리를 익혔다. 강순영에게는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이때부터 전국의 각종 학생 명창대회를 휩쓸어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원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에서 명창 김소희 문하생으로 들어가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 등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뒤에 명창 정광수에게 ‘수궁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우는 등 국창급 명창들에게 소리의 진수를 이어받았다. 몇 번만 들으면 금방 따라하는 천부적 자질로 당시에는 ‘녹음기’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따라서 안씨의 앞길은 탄탄대로.20대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했고 이후 86년 판소리 완창발표회를 시작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오정숙 박동진만이 해낸 판소리 다섯마당을 이때부터 거침없이 소화해낸 것. 또한 박귀희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익혀 89년 가야금 병창 준인간문화재가 됐고 97년 8월 40대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다. 이는 노쇠한 우리 판소리를 한단계 젊게 했으며 그가 뱉어내는 소리무대는 우리의 국악사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20여년을 창극단의 단원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창극의 주인공을 맡았다.‘수궁가’에서 토생원역,‘심청가’의 심청역 등에서 보여준 애원성 깃든 소리와 재치있는 연기로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후학양성에 발을 디딘 것은 98년 용인대학교 국악과 대우교수때부터. 이어 2000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이러는 가운데 국내 무대뿐만 아니라 일본 등 아시아권 12개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등 북남미, 유럽 12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 소리를 전파하기도 했다. 유럽공연 당시 프랑스 한 신문에서는 안숙선의 소리를 ‘천상의 소리’라고 격찬했다.
판소리를 무려 다섯마당까지 완창한 안씨. 집에서는 옛날의 어머니처럼 현모양처이고 싶어한다.74년 결혼했으며 남편은 안씨의 소리에 매료된 열렬한 팬이지만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후원하고 있다. 세곡동 자택에는 연습실을 마련해 놓아 제자들이 자주 드나든다. 시어머니와 국립창극단에서 거문고를 하는 딸과 함께 산다. 인근 양재동에 큰아들이 결혼해 살고 있어 가끔씩 손자 재롱을 보기도 한다.
■ 그가 걸어온 길
▲1949년 남원 출생
▲68년 남원여고 졸업
▲70년 김소희 문하생
▲77년 박귀희에게서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수
▲79년 국립창극단 입단, 중요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
▲97년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98년 용인대 교수
▲2000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
●작품 및 활동사항
▲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국립극장 판소리 다섯마당
▲87년 KBS 국악대상
▲88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
▲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95년 ‘춘향가’ 완창발표회(국립극장)
▲99년 제48회 서울시문화상, 옥관문화훈장,‘수궁가’ 완창발표회(국립국악원)
▲2000년 ‘적벽가’ 완창발표회(국립극장)
▲01년 ‘심청가’ 완창발표회(국립극장)
▲03년 ‘흥보가’ 완창발표회(국립극장)
▲86년부터 지금까지 ‘판소리 다섯마당’ ‘해외 순회공연’ ‘완창무대’ 등을 포함 100여차례 공연을 가짐. 창무극 ‘춘하추동’ 연극 ‘태’ 등에도 출연.
k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