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지킴이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바보처럼1 2007. 5. 14. 19:13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총알에 날개를 달았다. 날카로운 부리도 있다. 어떤 계략이나 은폐·엄폐가 필요없다. 잔잔한 호숫가를 그저 바라보는가 싶더니 ‘쉬익∼’ 하고 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기를 낚아챈다.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예술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파문과 현란한 날갯짓에서 펼쳐지는 청록색 향연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이 광경을 보고 아마 ‘비(翡)’라고 했을 터.0.002초의 승부사 물총새, 바로 그 색깔(翡)에 우리 조상들은 넋을 놓았을 것이다.

▲ 경기도 이천의 ‘동국요’ 작업실에서 수제자이자 딸인 방문숙씨와 ‘지구무늬 항아리’의 막바지 손질을 하고 있다.
천년 세월을 이어온 ‘고려청자’가 세계의 으뜸인 까닭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는 천하제일의 비색(翡色)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보석의 비취색보다 더 고운, 태고의 신비감이 자랑이다.

그 비색을 좇아 살아온 40년 세월이다. 고려인의 비색청자를 가장 가깝게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생동감 있는 문양창조로 청자의 품격을 한층 세련되게 끌어올려 한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보물급’이라는 찬사를 듣는다.‘청자의 거장’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美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영구전시

혁산(赫山) 방철주(85)옹. 경기도 이천의 ‘동국요’에서 나이를 잊은 채 여전히 ‘작업중’이다. 선생은 요즘 어느 때보다 ‘청자인생’에 보람을 느낀다. 다름 아닌 다음달 7일 선생의 작품 ‘지구무늬 항아리(Global Jar)’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등록번호 2043527)된다.

1998년 제작된 이 ‘지구무늬 항아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이 점점 확대되거나 축소되면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듯한 현대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스미스소니언 측은 고려청자의 고전적인 아름다운 비색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선생은 2000년 일본 도자기상이 연출한 희대의 고려청자 사기극을 밝혀내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이 된 바 있다.

지난 9일 도자기 축제가 벌어지는 경기도 이천시내를 거쳐 신둔면 수하리에 위치한 ‘동국요’를 찾았다. 마당 한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선생과 동고동락을 같이해 온 세월의 버팀목인 듯했다.

그 주위로 전시장, 작업실, 사무실 등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낯선 기척에, 수제자이자 딸인 방문숙(43)씨가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이어 선생이 “멀리서 왔다.”며 손을 내밀었다.8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피부가 무척 젊고 고왔다.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살아서 그럴까.

▲ 혁산 방철주 선생이 다음달 7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작품과 똑같은 ‘지구무늬 항아리’ 완성품을 앞에 놓고 지나온 도예인생을 술회하고 있다.
수제자인 딸과 함께 작업

작업실에 들어섰더니 마침 딸과 함께 작업중인 ‘지구무늬 항아리’가 있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될 작품과 똑같은 크기로 전체 작업단계 중 약 80%라고 선생은 설명했다. 이어 전시실로 들어섰다.40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통 비색으로 가득찼다. 가장 아낀다는 ‘벚꽃무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꽃들이 비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다. 또 주병(酒甁), 장경병(長頸甁) 등 여러 가지 병류와 매병(梅甁), 각종 주전자 등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진열대 중간 중간에 찰스 영국 왕세자,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일본의 나카소네·후쿠다·호소가와, 고이즈미 전 총리 등 혁산의 비색청자를 선물받은 각국 정상 12명의 사진과 관련 기사들이 액자로 쭉 놓여져 있었다. 그의 작품이 세계 정상들의 안방에 놓여져 있다는 생각에 경외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그의 도록집을 살폈다. 도자사학가 강경숙씨는 “선생의 작품세계는 절정기의 비색청자의 모방과 재현에서 출발했으나 현대의 미감이 충분히 발현돼 있다.”면서 “기형은 전통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늬는 젊고 생동감이 넘치며,4월의 등나무 꽃을 연상시키는 연이은 구슬무늬 등 현대인의 감각에 잘 와닿는다.”고 평가했다.

또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비색을 빚어내는 오묘한 기술은 단절되고 그 영롱한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지금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기법 또한 상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문숙씨는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박지기법(백토를 문양 위에 바른 후 다시 얇게 벗겨내는 것)이 상감과 어우러지며 진사채(辰砂彩)와 함께 고고(孤高)하면서도 화사하게 아롱진다.”고 설명했다.

계룡산 점술가 “평생 깨지는 물건 취급할 팔자”

선생의 도예인생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충남 논산 출생인 그는 27세때 우연히 계룡산 근처의 노(老) 점술가를 만난다. 이때 점술가한테 “자네는 평생 깨지는 물건을 취급할 팔자야.”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돼 정말로 우연하게 유리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같이 일하던 중 1954년 서울 을지로2가에 ‘유리상회’를 차렸다.

이어 대전에 3000평 규모의 유리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일본을 오가며 기술개발도 하며 나름대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이 악화되자 문득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때려치우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옹기그릇을 잔뜩 이고 있던 할머니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그릇을 다 줄 테니 곡식과 바꿔달라고 했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애절하던지….”

1967년,45세 나이에 유리사업가에서 도예의 길로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유약과 흙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1971년 귀국해 현재의 ‘동국요’를 만들었다.

이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청자재현에 매진했다.1973년, 일본에 사는 지인이 가끔 왔다 가곤 하더니 하루는 5만달러를 불쑥 보내왔다.“부담없이 받고, 혹 (도자기)구워지는 거 있거든 하나 둘 보내달라.”는 짤막한 서신도 동봉했다. 빚 아닌 빚이 된 셈. 이후 일본으로 완성품 청자를 몇번 보냈다.

1974년 고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

1974년 봄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잠시 만나자고 해 이 회장 집무실로 찾아갔다. 셋째 아들 이건희씨와 그의 장인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인 홍진기씨 등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지금 국내 어디에서 도자기를 팔고 있느냐.”고 물었고, 혁산은 단 한점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이 회장은 “도자기는 여러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에 장소를 내줄 터이니 그곳에 전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극구 사양하고 돌아왔지만 며칠 동안 사람이 찾아와 설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신세계에 직매장을 설치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본의 지인에게 보냈던 작품이 도쿄시내에 전시됐고 이 회장이 이를 우연히 보고 혁산을 부르게 됐다.

선생은 평소 ‘도자기의 생명은 흙이라는 단미(單味)에 있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었다.1975년 전남 강진군 일대를 샅샅이 답사하던 중 또 한번 숙명적으로 고려시대의 ‘태토’와 만났다. 고려청자에 가장 근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미 800년의 긴 세월 동안 단절돼 버린 그 전통기법의 맥은 과연 무엇이며, 과연 이를 살려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저를 괴롭힌 숙명적 화두였지요.”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22년 논산 출생

65∼70년 일본의 세토(瀨戶), 교토(京都), 마쓰자카(松阪) 등지에서 도예 수학

71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하리 현 위치에 ‘동국요’ 설립

73∼2007년 일본에서 개인전 80여회

73년∼현재 12개국 정상들에게 해외 수교예술품으로 증정

75년 전남 강진에서 최고의 청자용 태토 발견, 채취에 성공

76∼79년 신세계백화점 내 미술관에서 개인전(4회)

84∼88년 미국, 남미 등지 순회그룹전

85년 한국의 전승공예도예 5대 작가 초대기획전

97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주최 한국 전승 도자전(한국학과 설립 100주년 기념)

97∼2002년 한국 이천 도자기 축제에서 한·중·일 작가 특별전

02년 프랑스 파리 한국도자전

05년 청자 초대전(롯데 에비뉴엘 갤러리)

06년 한국도자기 런던 특별전

07년 6월 ‘지구무늬 항아리’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구전시

기사일자 : 2007-05-14    26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