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김용배(51) 사장은 문화에 강조점을 찍어야 하는 ‘문화 CEO’다. 그는 지난해 5월 연주자 출신으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사장에 임명됐다. 줄곧 행정가들이 맡아오던 자리에 1954년생 피아니스트가 발탁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는 문화와 경영을 성공적으로 접목해 예술의전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취임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그는 나름의 예술·경영관으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우선 공연 입장권의 거품을 빼고 공연장의 문턱도 낮췄다. 그가 기획한 ‘11시 콘서트’는 지난해 공연계의 히트 상품이다. 관람 시간대를 오전으로 잡고, 공연 입장료를 1만5000원으로 낮춰 주부를 겨냥했다. 김 사장은 프로그램을 직접 짜고 공연마다 해설자로 나서고 있다. 그는 “사장을 그만둔 후에도 해설자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11시 콘서트에 애정을 보인다. 예술의전당은 올해부터 전당 자체 기획공연의 입장료를 20% 내리면서 공연 입장료 거품 빼기에도 앞장섰다. “공연 입장료는 충분히 낮출 수 있습니다. 야외 오페라 붐이 일면서 최근 몇년간 공연 입장료가 대폭 올랐어요. 비싼 티켓만 일정량 팔면 타산을 맞출 수 있는 것처럼 기획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공연예술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날카롭다. “일부 예술가의 개런티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다른 예술가들은 제값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내에 좋은 연주자가 많은데도 선입견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어요. 좋은 연주자를 발굴해서 알리는 것도 제가 할 일입니다.” 그가 중점을 두는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시설에 투자하는 것보다 교향악단이나 오페라에 투자하는 게 문화 발전을 위해 더 낫다”고 강조한다. 45년간 피아노만 치던 사람이 경영에 나섰을 때 어려움은 없었을까. “매순간이 어렵죠. 차라리 예술 하는 것이 낫겠다 싶을 때도 많습니다. 몇십년간 쌓아온 사고체계가 재편되는 과정이잖아요.” 연주자로 밖에서만 예술의전당을 바라보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공연장 운영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월요일에는 왜 쉬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는데 그럴 충분히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연주자와 경영자는 생각하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경영자는 차가운 논리와 판단을 거쳐 선택해야 하는 자리죠.” 덕분에 평소 가까이 할 일이 없던 경제·경영서를 읽고 있다. 피터 드러커의 ‘기업가 정신’, 오영교의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는 경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게 해줬다. “경영 용어가 너무 생소해서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단어 뜻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이제는 두 가지를 다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예술가로서 장점이 경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력은 남다르다. 피아노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대학 때 전공은 미학이었다. 4세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친 어머니였지만, 음악을 전공하는 것은 안 된다며 만류했다. 그나마 예술과 가까운 전공을 찾다가 미학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학 4년은 아쉬운 점이 많지요. 인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논리적인 연주를 할 것이란 선입견이 저에게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대학 때 음대를 다니지 않은 것이 음악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1988∼92년 MBC라디오에서 ‘나의 음악실’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공개방송에 연주하러 갔다가 인터뷰하게 됐는데, 음성이 괜찮다며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음악에 다가서고 싶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미학을 전공했기에 학부 시절 음악 이외의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대학 4년 내내 씨름하며 읽은 책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의 3대 저서 중 가장 예술적인 책입니다. 논리적인 머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죠. 한글로 번역된 책보다 독일어로 읽는 것이 더 쉽습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그의 독서관은 뚜렷하다. 책은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일단 뿌려놓고 나중에 조직화해야죠. 책 몇 권 읽고 한두 개 안다고 확실히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 많이 읽으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만화까지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것을 가려 읽기보다는 보고 나서 좋은 것을 가리는 것이 낫죠.” 그는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돌아다니던 기억을 더듬었다. 헌책방은 갖고 싶은 책을 조금이라도 싸게 살 수 있는 보고였다. 돈이 생길 때마다 책방에서 ‘세계의 사상’을 한 권씩 사 모아 전집을 만들기도 했다. “열 군데쯤 돌면 원하는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오거든요. 그걸 흥정할 땐 짐짓 관심이 없는 척 표정관리를 해야 해요. 그런데 너무 좋아서 얼굴에 표를 내는 바람에 책값이 순식간에 올라가곤 했죠.” 그때 단짝 친구는 한양대 경제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나성린 교수다. 음악을 공부하면서 접한 마이어의 ‘음악 예술 사상’은 그가 예술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참된 음악이 무엇이며 위대한 예술이 무엇인가 알게 된다”는 것. 톨스토이의 ‘예술론’도 읽어야 할 책이다. “어찌 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인생에서 예술이 중요하고 값진가’란 물음에 막연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주는 책입니다.” 문학 작품도 즐겨 읽었다. 강은교 시인의 작품은 1970년대 후반 젊은 그를 매혹했다. “어릴 때는 그런 데 끌리잖아요. 어두운 허무주의, 그것을 뚫고 나오는 힘 같은 거요.” 피아니스트이다 보니 관련 서적을 읽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콘라드 울프의 ‘슈나벨의 피아노 음악’은 피아니스트의 필독서다. “상세하고 명료한 설명이 60∼70년 전 선생이 나를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도 피아노에 관련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 “10년 전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에 정리해둔 것이 있다”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없어져서 영영 책을 못내게 될 지도 모른다”며 웃는다. 김용배 사장은 예술의전당만큼은 ‘순수예술의 메카’로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이 갖고 있는 변형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것. 그는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것을 실현하는 중”이다. “예술이란 어떤 기관이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문화의 줄기를 바꿀 수도 없는 것이고요. 다만 사람들이 순수음악을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글 이보연, 사진 김창길 기자 byabl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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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월) 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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