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인◀(39) 정동공예 계승자 홍양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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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숙씨의 정동공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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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정동줄기를 엮는 순간순간 내 영혼도 함께 엮는 기분입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감도는 4월 어느 날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정동공예 계승자인 홍양숙(46.여)씨의 집을 찾았다.
거실에는 봄햇살이 가득했지만 홍씨가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현관 바로 옆의 방은 북향인 탓인지 상대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정동줄기가 마르면 엮으면서 다 부러져 항상 응달에 보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홍씨는 엮다 만 정동벌립을 손에 든 채 기자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인 정동벌립(정당벌립)은 농부들이 일할 때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제주도 고유의 향토문화유산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당벌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정동벌립은 '정동(정당)'을 재료로 만든 모자라는 뜻이라고 홍 씨는 설명했다. 또 정동은 댕댕이덩굴을 지칭한다고 한다.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질감이 패랭이보다 부드러운 정동벌립은 농부들이 말이나 소를 방목하면서 수풀에 얼굴이 스치는 것을 막고 비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척박한 제주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제주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전통유산이다.
홍씨는 "정동벌립은 정동을 엮는 방법에 따라 가격이 20만∼300만원까지 차이가 난다"면서 "벌립(모자) 이외에도 바구니나 가방 등의 소품도 주문제작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향토 민예품의 하나인 정동벌립은 제주돌문화공원에서 개당 20만원 정도에 팔리고 있으며 주문제작도 가능하다.
정동벌립은 가마귀방석과 절벤, 사갑바위, 망, 천, 바위돌림 등 크게 6단계의 제작 과정을 거친다.
'가마귀방석'은 정동벌립 제작의 첫 공정으로 모자를 썼을 때 정수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다. '절벤'은 가마귀방석을 엮은 다음 연결되는 모자 위쪽 평평한 부분이다.
절벤이란 명칭은 송편, 절편할 때의 절편에서 유래됐다고 하지만 홍씨는 이것도 정확치 않다고 했다. '사갑바위'는 절벤과 망, 망과 천의 경계 부분을 지칭한다. 머리가 쏙 들어가는 부분은 '망'이다. 햇빛을 가려 주는 넓은 챙은 '천'이라 부른고 천의 끝 부분을 마무리 하는 것이 '바위돌림'이다.
재료는 제주도 전역, 특히 중산간 일대에서 자라는 정동을 쓰는데 요즈음은 재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제주시 애월읍 중산간 지역에 어렵사리 정동 재배지를 확보해 놓았다는 홍씨는 "중산간 개발 붐이 일며 자생지가 많이 사라져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홍씨는 "중산간에서 야생으로 자란 것이 단단하고 탄력이 있는데 재배하면 줄기가 약하고 윤기도 덜 흐른다"면서 "지금 작업하고 있는 정동줄기도 15년이 넘은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어 홍씨는 한줄기, 한줄기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동줄기를 엮으며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듯 자신과 정동과의 인연을 풀어갔다.
홍씨가 정동줄기를 처음 손에 쥔 것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방학 때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큰아버지댁에서 큰아버지 옆에 앉아서 정동줄기를 엮는게 그렇게 재미 있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홍씨의 큰아버지가 바로 1986년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인 '정동벌립장'으로 지정된 고 홍만년 옹이다.
어깨 너머로 정동벌립 만드는 것을 배우던 홍씨는 만 19살이 되던 1980년 몸이 안 좋아 서울에서 제주도로 다시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정동벌립을 만들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댁 가서 이 일을 하면서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는 홍씨는 "정동줄기하고의 인연은 어쩌면 '운명적 만남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든다"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홍씨는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동줄기를 엮었다"며 "어느 겨울밤에는 방바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다리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작업을 계속했던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큰아버지가 만든 것으로 뭔가 부족하다 싶을 때는 시골의 이름 없는 한 박물관에 찾아가 전시돼 있는 정동벌립을 30분이고 40분이고 꼼꼼히 보고 와서 작업을 계속했었다"고 말했다.
어느덧 홍씨의 솜씨는 큰아버지 못지 않게 됐고 큰아버지는 홍씨의 작품도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입소문을 듣고 도청 관계자 한 분이 귀덕리의 큰아버지댁을 찾아 왔다. 이미 1980년대 중반 그 당시에 큰아버지는 80세 가까이 나이를 먹어 작업을 많이 못 하게 되자 홍씨가 주로 작업을 도맡아 하게 됐다.
홍씨는 "그 분이 처음에는 '작업장'을 하나 마련해 주시겠다고 해서 거절했다"는 홍씨는 "그러나 귀덕리를 정동제품 부업단지로 지정해 주겠다는 제안은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당시 마을 사람들 살림살이가 다들 상당히 어려웠다"면서 "단지로 지정되면 정동제품을 단 하나만 만들더라도 주민들이 낮은 이자로 돈을 쓸 수 있는 혜택이 주어져서 고민 끝에 결국 승낙했다"고 밝혔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정동별립장의 맥은 집안 어른이자 6촌 오빠인 홍달표(77)씨가 잇게 되고 홍씨는 얼마전까지 정동별립장 조교에 머물다 지난해 4월 (사)대한신문화예술교류회에서 '대한명인 제06-81호 정동공예 명인'으로 추대됐다.
홍씨는 "10년 전인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 회의를 통해 나이 순으로 6촌 오라버니가 장인의 맥을 잇게 됐다"면서도 "달표 오라버니는 저에겐 친가족이나 다름 없는 분이고 당시 제 나이도 많지 않아서 큰 불만은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다만 이 기술을 누군가에게 전수해 줘야 하는데 '조교'로서 기술을 전수하기는 싫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홍씨는 이런 자신의 마음이 자신이 부모님처럼 때로는 친오빠처럼 여기고 있는 홍달표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내색을 못하고 있다.
정동줄기를 손에 쥔지 어느덧 30년이 넘은 홍씨는 "경제적 수입만 생각했다면 진작 정동줄기를 손에서 놓았을 것"이라며 "정말 이 일을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작업장 제의도 거절했던 것이며 지난해 명인으로 추대될 때도 내키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홍씨는 "결혼하고 애를 낳고 보니 내가 만든 정동을 내 이름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남편도 계속 설득해 명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서도 "스스로 더 만족스러울 때 하면 좋은데...사실 지금 작업하면서도 부족한 점 많다고 느껴 부끄러울 때도 많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홍씨는 지금까지 해외 전시 3차례를 포함해 30여 차례 국내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지난 2005년 수상한 제주도 관광기념 및 공예품 공모대전 대상을 포함해 29차례의 수상 경력을 지니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인이다.
홍씨는 "정동의 빛깔은 자연의 색이라 사람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어 30년을 넘게 봐도 물리지 않는다"며 "정동줄기를 엮는 순간순간 내 영혼을 함께 엮는 기분"이라고 말을 마쳤다.
hyunmin623@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4/17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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