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심(母心) 깃든 '시어머니표 된장찌개'
# 하얀 버선발 아래 뜸팡이 흰
꽃피고..
아이는 알 수가 없다. 왜 메주 쑤는 날이면
어머니가 숙연하게 매무새를 가다듬는지 알 수가 없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하얀 버선발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메주를 즈려 밟곤 했다.
입동이 지나 겨울 문턱에 들어서면 아이는 메주 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시절엔 삶은 콩 한 줌이라도 손에 쥐면 마냥
행복했다.
비옥한 땅기운과 따사로운 볕의 손길로 여문 노란 콩알 한 알 한 알이 모여 이제 메주가 될 차례다. 부엌 아궁이 장작은
타닥타닥 잘도 타들어 간다. 달큰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메주 쑤는 날이면 어머니는 삶은 콩 한 그릇과 시루떡을
시렁에 얹고 치성을 드렸다. 돌 절구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힐 무렵이면 까르르 웃던 아낙들 얼굴에도 홍조가 띈다. 알맞게 삶아진 콩을
절구에 찧어 정성을 다해 치대고 매만지면 어느새 메주덩이가 된다. 삶은 콩 곱게 찧어서 베보자기 깐 메주틀에 넣고 단단하게 네모난 메주를
만든다. 이 때 어머니는 하얀 버선발로 메주를 꼭꼭 밟으며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자식걱정이다. “서울 간
아들, 몸 건강히 대학 마치고 출세 길 열어 주시고. 관연한 우리 딸 좋은 배필 만나 아들딸 낳고 잘 살게 해주시고…” 어머니 기도는 독백이
되어 어린 내 가슴을 적시곤 했다. 어머니가 메주를 즈려 밟을 때마다 치맛자락 밑으로 살짝살짝 고개 내민 하얀 무명 버선코의
아름다움이란… 하얀 버선코의 아름다움은 한국미(美)의 극치다. 어머니는 왜 메주를 쑬 때 하얀 버선발로 단단하게 밟았을까? 그저 정성과
치성이려니 했다. 이제 보니 할머니의 할머니 세대부터 면면히 전수된 삶의 지혜요. 식생활의 전통이다. 일 년 넘게 장맛을 달인들을 찾아다닌
후에야 알았다. 메주를 꼭꼭 밟는 것은 콩단백질 결속력을 높여서 미생물의 발효 증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어머니의
정한(情恨)이 담긴 메주는 겨우내 하얀 뜸팡이를 피우고 메주 띄우는 냄새가 온 집안을 점령했다.
# 어머니의 삶이 깃든 장독대의 비밀
어머니 마음이 깃든 탓일까? 버선발로 꼭꼭 밟아 만든 메주는 장항아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낚으며 깊은 장맛으로 익어간다.
어머니는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장독 뚜껑을 열어 햇볕과 바람을 쐬고,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빨래 걷기에 앞서 장독 뚜껑부터 먼저 챙긴다.
왜 허구헌날 장독뚜껑을 열었다 닫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항아리를 왜 자꾸만 닦아대는지…가끔 아이는 궁금증이 일었다. 어머니의 삶이 깃든
장독대는 아이에겐 그저 무료함을 달래주는 소꿉놀이터일 뿐인데. 어느 날 아이 눈에 비친 장항아리는 호기심을 불러왔다. 장독대 언저리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궁금증을 캐물었다. “왜 메주를 넣은 장항아리에 고추와 숯이 떠있는 거야” “잡스런
맛을 없애기 위해 빨간 고추와 불에 달군 숯을 간장 위에 띄우는 거란다. 그래야 장맛이 좋거든. ” 그래도 어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창호지로 버선 모양을 오려 거꾸로 붙이거나 짚으로 새끼를 꼬아 청솔가지, 붉은 고추, 숯 등을 매단 금줄을 치고 나서야
안심하는 눈치다. 이제 아이는 결혼을 해 어머니 마음을 어렴풋이 헤아리는 나이가 됐다. 여행길에 들른 시골집 장독대를 구경하다가 불현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다음, 장독 뚜껑 위에 정화수 한 사발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정성을 다해 비는 어머니 모습이
아련하다. 그 시절 어머니의 장독대는 된장이나 고추장 등 음식물을 저장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치성을 드리는 제단이었던 셈이다. 춘향전에서
월매가 사위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손 모아 빌었던 곳도 바로 그 장독대였다.
# 장이 익는 것은 신의 조화
장(醬)문화 풍습은 우리네 식생활 전통이다. 시어머니, 그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면면히 전수돼 온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독대에 얽힌 풍습이 단지 주술적인 의미에 국한될까? 물론 아니다. 분명 과학적인 근거가 뒷받침된다. 한 예로 장독에 넣는 숯과 고추를
보자. 옛날에는 고추의 붉은 색과 매운맛이 장맛을 변하게 하는 잡귀를 멀리 쫓아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것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고추
매운맛 성분 캡사이신(capsaicin)은 살균효과가 있어 잡균 번식을 방지해 장맛이 변질되는 것을 막아준다. 선조들은 장을 담글 때
숯을 넣으면 잡귀를 숯 구멍에 가두어 장맛이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도 물론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다. 실제로 숯 흡착효과로 인해
나쁜 맛을 빨아내므로 좋은 장맛을 유지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생활 속에서 터득한 조상들의 놀라운 지혜는 정말 탄복할
만하다. 옛말에 ‘장이 익는 것은 신의 조화’라고 했다. 장맛을 결정하는 것은 재료 외에도 햇빛과 공기, 그리고 미생물과 같은 자연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을 담그는 사람은 같아도 해마다 맛이 다르고 독마다 맛이 다르니 어찌 그 이치를 말로 설명할 길이 있겠는가. 결국 장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장독대를 돌보며 정성을 다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보태져야 좋은 장맛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에는 장 담그는 풍경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장 담그기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손쉽게 장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마다 독특한 장맛을 만들어낸 조상들의 지혜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 어머니의 삶이 깃든 공간인 장독대가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 이러다가 전통 장맛마저 변질될까 걱정이다.
# 음식맛은 장맛이다
장맛에 대해 문외한 이었던 신혼 시절, 남편은 툭하면 불평을 늘어놓았다. 남편은 어릴 적 부터 손맛 좋기로 소문난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입맛이 길들여진 터라 내가 끓인 된장찌개가 입맛에 맞을 리 만무했다. 그때는 된장찌개를 끓여내면 남편은 항상 “이게 아닌데…. 어릴 적
엄마가 끓여 주던 된장찌개 맛이 그립다. 내려가서 좀 배워 와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마 그이는 된장찌개를 통해 따사로운 모정과 추억까지
맛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가장 자신하는 음식으로 주저 없이 ‘된장찌개’를 꼽는다. 남편도 아무리 찬이 없어도 된장찌개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특별한 비법이랄 것은 없지만,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나름의 방식은 있다. 우선 된장찌개는 뭐니뭐니해도
된장이 맛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멸치, 다시마, 무, 양파, 표고버섯 따위로 육수를 우려내야 된장찌개 맛이 더 좋다. 여기에 양파, 호박,
버섯을 먼저 넣고 끓어오르면 된장 두어 숟가락을 잘 풀고 두부를 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칼칼한 청양고추를 넣는다. 된장찌개는 마늘을 넣지 않아야
고유의 깊고 구수한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된장찌개 맛내기 비법을 나름대로 터득하는 데만도 무려 수년이 걸렸다. 처음엔 장안에
내로라하는 요리 연구가들을 만나 비법을 듣기도 하고, 온갖 요리책을 뒤져 이론에 충실한 된장찌개를 끓여 보았지만 허사였다. 해답은 다름 아닌
장(醬)맛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진가인 남편과 나는 집안마다 독특한 장맛을 내는 조상들의 지혜를 찾아 ‘장맛기행’을 강행했다. 우리 장
문화의 명맥을 잇고 있는 장맛의 달인들을 만나 장인정신과 노고에 감복하고 말았다. 이제 나는 ‘된장 예찬론자’가 됐다. 식탁에 된장이
오르지 않으면 왠지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된장을 좋아한다. 된장찌개는 기본이고 다양한 채소를 넣어 끓인 된장국, 쌈장, 된장소스를
곁들인 샐러드 등을 즐겨 먹는다. 생선을 굽거나 고기를 삶을 때도 된장을 넣고 나물과 볶음도 된장으로 맛을 내다보니 된장 한 통이 금방 바닥나기
일쑤다. 내가 된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된장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믿음에서다. 나는 환경오염과 지나치게 기름지고 서구화된 식탁으로 인해
위협받는 건강을 우리 토장 장(醬)으로 차린 밥상이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전통장 문화가 면면히 이어지고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세계적인 발효음식으로 자리 잡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Tips! 어디서 맛볼까?
<된장요리가 맛있는 집>
'된장요리’ 하면 된장찌개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된장 샤브샤브, 된장수육, 된장 칼국수 등 된장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장맛을 찾아 1년 넘게 전국을
다녔다고 하면,‘어느 집 장맛이 제일이냐?’ ‘된장요리 맛집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장맛은 어릴
적부터 먹던 입맛에 따라 기호도가 달라지므로 쉽사리 추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요하게 된장요리 맛집을 캐묻는 이들에게
된장으로 맛을 낸 음식도 먹고 장맛도 볼 수 있는 곳을 권한다. 경기도의 슬로푸드 마을로 선정된 파주의 통일촌에 가면
장단콩마을식당(031-953-7600)이 있어 장으로 만든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직접 농사지은 장단콩으로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장떡 맛이 구수하고 깊다.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장아찌와 나물 등 밑반찬도 감칠맛이 제대로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의 전통장집
서일농원에 있는 전통음식점 솔리(031-673-3171)도 된장한정식이 유명하다.‘솔리’밥상에는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더덕, 가죽, 감, 미역,
무, 깻잎, 파래 등 장아찌와 쌈을 싸먹을 수 있는 야채가 나온다. 음식 맛을 평하자면 평균 이상이지만, 유명세에 비해 깊은 맛은 떨어지는 편.
된장찌개와 장아찌 등 전체적으로 짠맛이 약간 강하다. 인천시 구월동 된장요리전문점 해월 토장집(032-467-6221)은 매스컴 보도로
유명해진 집이다. 이 집도 재래식으로 직접 만든 된장으로 음식맛을 내는 곳이다. 된장수육, 토장전골, 된장동태찜, 된장비빔밥, 된장야채전 등
특색있는 된장요리를 맛보기에 좋은 곳이다. 된장육수에 새우, 낙지, 조개 등 해물과 야채를 익혀 샤브샤브식으로 소스에 찍어 먹고 시원한 국물로는
소면이나 밥을 넣어 비벼 먹는 토장전골 맛이 이색적이다. ‘된장 예술과 술’(02-733-4516)도 장맛 좋기로 소문난 맛집이다. 된장
비빔밥을 시키면 진하게 끓여낸 된장 뚝배기와 부추, 치커리, 풋고추가 바구니에 가득 담겨 나온다. 걸쭉한 된장찌개에는 두부와 풋고추가 들어간다.
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고 육수와 갈아 넣은 소고기로 깊은 맛을 냈다. 밥은 커다란 그릇에 담겨 나오는데, 여기에다 된장찌개와 부추, 치커리와
반찬을 함께 넣고 비벼 먹으면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또한 ‘백이동골 된장집’(02-3392-0052)은 뚝배기에 바특하게 끓인 강된장
맛으로 유명한 곳이다. 2년 묵은 김치, 재래식으로 만든 단무지 등 옛날식 반찬으로 맛볼 수 있다. 강원도 홍천 백이동골 농장에서 직접 담근
된장, 청국장, 간장 등도 판매한다. 이밖에 특별한 된장요리를 원한다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바로 옆에 있는
깡장집(02-720-6152)도 들 수 있다. 뚝배기에 된장을 넉넉히 깔고 그 위에 돼지고기, 양파, 오징어, 마늘, 청양고추를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다. 청양고추와 고추장이 들어가 칼칼한 끝맛이 입맛을 돋우는 깡장에다 밥을 비벼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정말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깡장은 재래된장과 시판 된장을 섞어서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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