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것들

일본 야쿠자의 모든것

바보처럼1 2006. 4. 10. 03:42
집필자 : boolingoo  (2005-10-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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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야쿠자의 의미

 

야쿠자의 사전적 의미는 やくざ [yakuza] : 너절하다는 뜻. 정당한 생활을 하지 않음. 또는 그런 사람, 불량배, 깡패, 노름꾼이다. 화투나 골패와 비슷한 카르타라는 노름이 있다. 어원이 포르투칼어라니까 그 쪽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쓰인 카드를 이용하여 게임을 하는데, 그 중 그 중 삼마이(三枚) 카르타는 3장의 패를 뽑아 합이 9가 되면 최고로 친다.

 

패가 여덟 끗(야 = 八, や), 아홉 끗(쿠 = 九, く), 세 끗(자 = 三, さ)이 나와서 합계가 20이 되는 경우, 즉 8.9.3석장을 쥐면 최악의 케이스로 야쿠자라고 한다.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폭력배를 지칭하는 은어로 변한 뒤 지금은 보통명사로 굳어졌다.

 

야쿠자의 근원은 에도(江戶)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마피아들의 패밀리처럼 누구누구일가라는 명칭아래 거드럼을 피웠다고 한다.

그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슨무슨 구미(くみ/組)나, 어떤 어떤 가이(かい/會)로 바뀌었다.

 

오늘날 일본의 폭력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야마구치구미(やまぐちぐみ/山口組), 이나카와가이(いなかわがい/稻川會), 스미요시가이(すみよしがい/住吉會)에서 보듯이, 흥미로운 점은 산하 조직을 포함 3천여 단체에, 10만 명 가까운 조직원을 거느린 이들 야쿠자가 버젓이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한다는 사실이다.

 

고베(こうべ/神戶)에 본부를 둔 야마구치구미가 몇 년 전 고베 지진 때 조직원을 재해지역으로 출동시켜 구호활동을 벌인 것도 공개적인 활동의 일환이다.

 

그런데 문제는 야쿠자들이 뒷구멍으로 벌이는 비공개 사업이다.

 

약점을 이용한 금품요구, 기부강요, 하청 및 납품 강요, 부당한 융자요구, 고리대금 강요, 명절인사 강요 등등이고, 마약이나 밀수에 손을 댄다는 설도 있다. 한 가지 신통한 구석은 있다. 내분이나 구역다툼으로 발생하는 자기들끼리의 총질에 휘말려 간혹 날벼락을 맞는 수도 있으나, 여간해서 서민들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2)야쿠자의 역사

 

초기의 야쿠자는 쇼군의 봉건적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는 사회에서 반즈이인 조베이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중세 지하 세계의 전문적인 구성원들로서 오늘날 이들이야말로 현대 야쿠자의 전신으로 널리 인정을 받는다. 이들은 전통적 도박꾼인 바쿠토와 행상인들인 데키야들이었다.

 

이 두 집단의 습관들은 너무나 특이하여 오늘날에도 경찰은 이들을 바쿠토 혹은 데키야들로 분류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 3의 집단인 구렌타이, 즉 불량배들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이 두 집단 구성원들의 출신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 농토가 없는 자들, 범죄자들 및 사회 어디에서나 소외받고 있는 탈락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각 집단은 제각기 특정한 분야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아주 같은 활동지역 내에서도 서로 충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바쿠토는 내왕이 잦은 대로변과 옛 일본의 읍에서 활동하였으며 데키야는 점점 늘어나는 시장터에서 움직였다.

 

이러한 야쿠자들은 1867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설 현장과 하역장 으로부터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심지어 인력거 사업에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경찰이 바쿠토 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있었기 때문에 도박사업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바쿠토와는 다르게 데키야는 번영하고 점점 더 확대되어 나갔다.

 

 

 

3)야마구치 구미 조직의 성장과정

 

야마구치 구미 조직의 성장과정은 다음과 같다.

 

초대 야마구치 조직의 조장은 야마구치 하루키치( 山口 春吉)가 다이쇼(大正)4년(1915년)에 약 50명의 항만노동자을 모아서 고베시내에서 야마구치의 국기를 달았던 것으로 그 시작을 하였다.

 

그 후, 다이쇼14년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 春吉)는 장남인 야마구치 노보리(山口 登)에게 그 상속을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2번째, 야마구치 조직의 조장에 임명된 야마구치 노보리(山口 登)는 새로운 개혁적인 운영으로 고베중앙시장의 운영권을 독점했고, 그 외 나시마부시(창)에도 진출하는 등, 그 세력을 거대하게 넗혀나갔다.

 

그러나 야마구치 노보리(山口登)는 헤이와(平和)13년 히로사와타조(??虎造)의 독점권을 둘러싸고, 동경 아사쿠사(?草)에서의 싸움에서 당한 부상으로 쇼와18년(1943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전후 쇼와21년(1946년)에 달하자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가 야마구치 구미 조직의 3번째 조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는 쇼와56년(1981년) 7월에 병으로 죽기 전 까지 35년간, 이름대로 야마구치 구미의 카리스마적인 지배자로서 군림하였다.

 

특별히 쇼와30년(1955년)부터 40년대 걸쳐 본고장의 폭력단들의 대립항쟁사건을 일으키면서 전국각지에 세력을 확대하고, 현재의 광역폭력단 야마구치구미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의 발군의 통솔력과 도박에 의존하지 않고 자금원을 확립하였다. 선견성과 이 풍부한 자금력과 강력한 전말부상이 전국제패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의 사망 후, 4번째 조장선출을 둘러싸고 야마구치 구미 조직 내부의 있어서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쇼와59년(1984년) 6월 .다케나카 마사오(竹中正久)가 4번째 야마구치 구미 조직의 조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부당하게 생각한 많은 조직원들이 탈퇴하고 『 일화회(一和會)』를 결성하였는데 야마구치 구미와 일화회(一和會)는 장기적으로 대립항쟁을 반복해오며, 결국 그 과정에서 竹中正久는 헤이와(平和)60년 1월에 피살되었다.

 

이 야마구치 구미 조직과 일화회(一和會)와의 대립항쟁이 수습되자, 평성4년 야마구치 구미의 젊은 우두머리의 지위에 있었던 와타나베 요시노리(渡?芳則)가 다섯 번째 야마구치 조직의 조장으로 임염되었다. 그 후에도 야마구치 조직은 다른 폭력단의 세력범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고, 다른 폭력단과의 많은 대립항쟁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다섯 번째 야마구치 구미는 현재 폭력단원에 의한 부당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법률에 근거한 『지정폭력단』에 지정되어있다.

 

 

*야마구치는 전체 폭력단의 약 40%를 차지

 

 

4)활동과정, 일화

 

 

야마구치 조직의 수입은 유흥업과 풍속산업, 파친코 등 각종 공인도박업소에서 뜯는 󰡐보호비󰡑가 기본이 됐지만 거품경제기 에는 특유의 사업으로 거금을 거머쥐었다.

 

날만 새면 값이 오르는 상황에서 야쿠자들은 부동산․주식․미술품 등의 거래나 알선에 나섰다. 값나갈만한 땅과 주식, 미술품을 헐값으로 사들여 되팔고 조각 땅이나 연작 미술품을 한데 모아 값을 올린 후 파는 등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런 호경기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거품경제 붕괴로 사업이 어려워진데다 오랫동안 야쿠자를 사회문제로 지목해온 정부가 1991년 󰡐폭력단원에 의한 부당행위 방지 등에 관한 법률󰡑(약칭 폭력방지법)을 제정, 목을 조이고 나섰다.

 

이 법에 따라 폭력단은 조직과 회원, 사무소를 당국에 신고, 󰡐지정 폭력단󰡑이 돼야 했다. 수입원인 일체의 공갈․협박․물품구입 강요․거래개입 등이 금지된 것은 물론 󰡐나와바리󰡑(繩張․영역)를 놓고 무력항쟁을 벌일 경우 해당 지역의 사무소 문을 닫아야 한다.

 

애초 법제정 당시 조직폭력배의 존재를 인정한 현실 타협적 법이라는 반론도 거셌지만 결과적으로 법이 만들어진 뒤 야쿠자의 행동반경은 크게 좁혀졌고 각종 업소의 폭력단 배제 흐름이 꾸준히 정착해가고 있다.

 

물론 지금도 업소에서, 심지어 포장마차에서 돈을 뜯은 야쿠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법 행위가 없는 한 함부로 발붙이기 어렵다. 최근 일본 언론은 폭력단 하부조직이 상납금을 마련하지 못해 운전수나 공사장 인부로 일하거나 공중전화의 동전 통을 훑는 등 어울리지 않는 일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99년 말 현재 등록된 야쿠자는 8만 여명이며 이중 최대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가 3만4,000여명에 이른다. 미등록 조직원까지 합치면 20만 명은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사카 전쟁

 

수도권 진출을 성취한 야마구치 조직은 이제 거의 일본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조직으로 커졌다. 그런데 1975년 야마구치 조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오사카에 기생하고 있던 한 작은 야쿠자 조직이 야마구치에게 반기를 들고 달려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마츠다 구미(松田組) 항쟁사건으로 알려진 야쿠자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말한다. 이 사건은 그 후 3년 4개월에 걸쳐 계속된 3차례의 유명한 오사카 전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이 항쟁사건에 대해 당시 매스컴들은 야마구치 조직을 코끼리로 봤고 마츠다 조직은 한주먹꺼리도 안되는 모기에 비유했다.

 

야마구치는 약 5백 개의 산하단체에 1만1천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마츠다는 약 20개 단체 350명의 약체였다. 코끼리와 모기의 다툼으로 비유됐으나 '전투는 반드시 병사의 숫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며 마츠다 조직원들은 사생결단의 자세를 취했다.

 

사건은 1975년 7월 어느 날 밤 오사카 주점가의 주템이라는 클럽에서 발생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야마구치의 야쿠자 4명이 괴한 5명으로부터 집중 사격 을 받고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마츠다 조직에서 파견한 5명의 히트맨(살인특공대)들 이었다.

 

짧은 역사의 신흥 야쿠자조직인 마츠다는 주 수입원이 불법 도박장 영업이었다. 오사카 시내에만 30여개의 도박장을 개설했고 이곳에서 나오는 수입이 하루 1천만 엔 이상을 올리고 있어 이미 이 업계 내부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뜨기 시작한 조직이었다.

 

맛있는 사냥감을 잡아 잔치를 벌이고 있는 여우를 보고 호랑이가 그냥 지나갈리 없었다. 야마구치에서 파견한 사사키(佐佐木)조직의 행동대원들이 한창 성업 중 인 영업장에 난입, 흙발로 도박판위를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워 난장판이 됐다.

 

야마구치측과 마츠다측은 서로 타협에 들어갔으나 강력한 야마구치가 이에 응할 리가 없었고 황금 알을 낳는 사업을 내놔야할 운명에 처한 마츠다측은 항쟁을 결의 하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조직원이 4명이나 희생됐으나 야마구치측은 즉각적인 보복을 하지 않았다. 조직 간부들은 전체가 보복 공격에 나서기는 마츠다측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우선 직접 피해를 당한 산하단체인 사사키 조직에서만 움직이기로 했다.

 

이 사실을 감지한 마츠다 측에서는 오히려 고베(神戶)에 있는 야마구치의 중앙본부 사무실에 총을 난사했다. 왕궁을 습격당한 것으로 단정, 분노한 야마구치 행동대원들은 마츠다 두목 살해조를 편성하고 그의 자택으로 돌입하며 오사카전쟁을 일으켰다.

 

♧히로뽕 밀매

 

일본의 조직폭력단 중 이름난 광역 조직은 산하 조직원들에게 마약을 취급하지 못 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말단조직원들은 위험 부담이 큰 대신 이익이 많으므로 손을 대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신문지면에 이들이 적발된 기사가 게재되는 것으로 봐서 대형 야쿠자 조직이 '우리는 마약 거래를 하지 않는다' 라고 공언하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못할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山口組)는 한때 마약복용반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는 속임수에 불과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지난 1995년 부산지검은 일본 야쿠자 조직이 관련된 한 중 일 3개국 히로뽕 국제 밀매조직을 적발, 총책인 가와구치 마사루 등 9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었다.

 

검찰수사 결과 당시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가와구치 마사루는 일본 오사카(大阪)에 거점을 두고 있는 야마구치 구미의 지역 조직원으로부터 중국 심양에서 히로뽕을 제조하는 모씨를 소개받은 뒤 중국을 오가며 김포공항을 통해 히로뽕을 밀반입한 혐의였다.

 

그 후 일본 경시청은 가와구치가 제약회사 화물로 위장한 대량의 히로뽕을 중국 대련에서 요코하마 항으로 밀반입하려다 적발된 사건과 관련, 야쿠자들과 연결돼 있다는 정보를 검찰에 넘겨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중국의 제조책, 일본의 판매책, 한국의 운반책이 결탁해서 중국 산 히로뽕을 일본 야쿠자 조직으로 대량 밀반입하는 과정에 한국이 경유지로 이용 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 사례이다. 최근에는 북한 공관원들이 개입돼 히로뽕을 야쿠자 조직에 판매하려다 적발되는 사례도 있었다.

 

5)야쿠자의 실상

 

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치안이 안정된 나라인 일본에서 야쿠자의 존재와 영향력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자전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자전거에도 고유 번호를 붙이고, 의심되는 자전거는 언제든지 불러 세워 번호를 조회하는 경찰. 이런 치안 대책의 나라에서 '야쿠자'에 대해서만은 말도 안 되는 비합법적인 일들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안 좋은 큰 사건이나 스캔들의 배후에는 거의 항상 야쿠자가 관련되어 있다. '노무라 증권 스캔들' 같은 커다란 사건 뒤에는 물론, 일본 전체 주주총회의 뒤에도 야쿠자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증권 투자의 경우에도 야쿠자는 주가가 오르면 당연히 돈을 버는 것이고 만약 그 주가가 떨어져 망하게 될 경우에도 증권 회사 측으로부터 몰래 보상을 받는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커다란 주식회사들은 야쿠자에게 늘상 당하면서 그냥 그대로 방치하며 넘어간다. 주식 몇 주나 소량을 산 야쿠자들은 주주 총회에 나온다. 공개적인 장소에 나와 경영진을 개망신 줄 추잡한 정보들을 캐내 갖고 등장하는 것이다. 회사는 난장판이 될 주주 총회를 잘 무마하기 위해서 미리 돈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단한 치안력을 자랑하는 일본 경찰들은 과연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경찰은 전국 야쿠자 조직의 신상까지 소상히 다 알고 있지만 손을 대지 않는 것일 뿐이다. 가끔 형식적인 수사나 연행이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손을 대지 못한다.

 

더더욱 황당한 것은 야쿠자들은 아예 자신들 조직의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내고 있다. 우리로 말하면 무슨 파, 무슨 파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이 일본엔 10만 명 존재하는데도 경찰은 손을 대지 못한다. 손을 대기는 고사하고 ?어떤 때에는 보호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한심한 광경들도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야쿠자 사무실에 갑자기 회의가 있다고 할 때, 갑자기 값비싼 벤츠, 링컨 콘티넨털, 캐딜락들이 들이닥친다. 잠시 불법 주차해도 견인차가 끌어가는 게 일본이지만 이 때에는 예외라고 한다. 오히려 줄줄이 불법 주차된 야쿠자 차들을 정리해 주기 위해서 경찰이 나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도 보이는 것이다. 좋게 해석해 준다면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통제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야쿠자는 무얼 먹고 사는가? 당연히 민간인이 피땀 흘려 버는 돈의 착취해서 산다. 일본인들이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고리대금업`이라 하는 것은 야쿠자 사업이다. 빌리는 것은 쉬우나 공갈, 협박, 폭력이 뒤따른다. 수많은 일본인들의 이런 돈을 쓰고 있는 건 신문 광고나 엄청난 광고 인쇄물의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을 못 갚는 사람들은 야쿠자들의 잔혹하고 비열한 협박 폭력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자살에 이른다. 매춘부 인구 3분의 1이 바로 이런 야쿠자 빚을 못 갚아 이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높은 자살률과도 무관하지 않다. ☜ 않다라는 글자가 빠져있으므로 가 우리가 쓴 글임.

 

(임의적으로 해석했슴)

 

6)야쿠자와 정치계의 관계

 

♧야쿠자와 가네마루 신

 

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흥행도 야쿠자의 사업이다. 합법적인 도박은 물론이고 비합법적인 모든 도박에 야쿠자는 관여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도박이란 그들의 점유 사업이지만 일본처럼 일반인들에게 법을 따지는 나라에서 그걸 바라보고 가만히 있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야쿠자는 정치계와 밀접한 관련도 가지고 있다. 정치계의 유명한 사건이었던 록히드 사건도 야쿠자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가 당시의 다나카(田中角榮) 수상과 미국을 연결한 것이다.

 

또한 90년대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고 정치 스캔들인 가네마루 신 부수상과 사가와(佐川) 재벌 스캔들도 그 중심엔 야쿠자의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가네마루 신(金丸信)이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수상의 선거를 지휘할 당시 사가와 회사의 사장을 통해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의 하나인 이나가와카이(稻川會)의 이시이 회장을 만났던 것이다.

 

가네마루의 부탁은 이나가와카이가 선거 기간 동안 다케시다 수상을 극우파의 테러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수상이 야쿠자에게 경호를 바란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어쨌든 이게 일본인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야쿠자를 경찰이 마음대로 해체시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과거 야쿠자의 역할

 

1960년대 안보 투쟁 시대의 좌익 운동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 전국의 대학생, 노동자, 당원들의 거센 시위를 경찰 혼자 봉쇄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발급된 티켓은 야쿠자들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였고, 이미 야쿠자의 정치적 동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민비 시해?사건 역시 일본 우익 야쿠자들의 소행이었던바 원래부터 야쿠자란 일본의 국수 우익주의자들의 오른팔격인 행동대로서 규모가 방대해져 왔다.

 

안보 투쟁 때의 야쿠자 행동대는 그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그들은 애국을 내세웠다. 이 나라를 폭력 혁명 공산당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그들 역시 거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정치적 과도기가 지났을 때 야쿠자들은 이미 경찰 통제력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과도기의 시대에 정부 특히 우익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베풀었다. 야쿠자는 이미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검은 경제의 극대화 작업에 돌입해 있었던 거다. 경찰의 통치만으로는 안 되니까 너희들이 어느 지역을 관할 통제하라는 것이다. '긴자(銀座)의 대통령`으로 불렀던 한국계 보스 같은 이들이 그 시대의 기린아들이었다.

 

'긴자의 밤은 내가 다스린다. 대신 여기서 무슨 사고가 나면 내가 책임진다' 이런 식의 논리가 일본 전국 각지에 적용되면서 경찰과 야쿠자의 공존 논리도 성립되었다. 물론 세인들이나 매스컴의 눈이 있으니깐 가끔씩 단속을 한다. 단속을 하는 날은 당연히 야쿠자들 사무실에 연락을 해준다. 야쿠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류, 마약류, 불법 물건, 장부들을 숨긴다.

 

막상 경찰이 왔을 땐 그들의 체면도 세워주기 위해 한두 자루 정도의 총이나 일본도 등을 남겨둔다. 경찰에도 건수를 올려주어야 피차 공생한다는 생각이다. 야쿠자는 폭력단이 아니라는 구호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자기들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경찰의 선봉대로 내세우고 이제 와선 폭력단 대책 新시행법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냐며 그들은 성난 눈초리로 정부와 경찰에게 오히려 데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생관계 탓에 일본 정부의 야쿠자 타도는 이미 시기가 지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불법적인 조무래기들은 잡을지 모르지만 거물들은 이미 모두가 합법적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대해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계와의 끈이 있다. 상식적으로 수상이 야쿠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실정이었다면 다른 수많은 정치가들은 어떠했겠는가. 실제로 수많은 의원들은 선거 기간 동안 야쿠자에게 선거 운동을 부탁해 왔고 자금 지원을 받아 당선된 숫자도 부지기수다. 한 마디로 일본 야쿠자는 타도될 수가 없는 것이다.

 

 

7)한국 조직폭력배와의 비교

 

야쿠자는 한국의 조폭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한국의 조폭은 과거의 '건달' 내지는 '깡패'들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좀 더 조직화되었고, 해방 이후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서 소위 '정치 깡패'로 동원되었다가, 오늘에 와서 유흥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조직이라든지, 계보, 규칙 등이 상당히 비슷하고, 검은 돈을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는 등 어찌 보면 조폭이 야쿠자의 모습을 상당부분 모방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야쿠자와 조폭은 다른 면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모와 경제력

 

일본의 야쿠자는 그 영향력이나 규모가 한국의 조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일본의 야쿠자는 거의 경찰의 통제력 밖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럭이 막대하다.

 

또한 그들의 경제적 규모는 세계 웬만한 국가들의 GNP를 훨씬 넘어선다. 예전에 야쿠자 부인들 수십 명이 토크쇼에 출연해서 솔직하게 그들의 경제 실상을 얘기한 일이 있는데, 그들의 월 소득은 2천만 원 이상이고 거의가 벤츠를 타고 있었다. 야쿠자의 부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사회적 눈초리 때문에 가끔씩 곤혹스럽지만 후회는 없다고 얘기했다.

 

또한 모두들 남편 쪽에 생명 보험을 걸어놓고 있는데, 남편이 생명을 잃을 경우는 20억 원 이상의 보험금을 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살아 있으면 한 달에 2천만 원, 죽으면 20억원, 어쨌든 이 정도의 경제 상황이니 야쿠자의 사업 규모는 가히 상상이 간다. 10만 명이라는 대식구와 그 위에 상부 구조의 자금 능력은 일본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반면 한국의 조폭은 자금력이나 그 영향력에서 야쿠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폭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통제력 하에 있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한 첫 조치로 '국토건설단' 이라는 미명 하에 1960년 깡패 소탕령을 내렸고, 이후 역대 정권은 10년 단위로 폭력배와 전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72년 유신을 전후한󰡐사회악 처단 조치', 80년 계엄체제 아래 실시된󰡐삼청 제5호', 그리고 89-90년, 90-9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6공화국의󰡐범죄와의 전쟁󰡑등이 그런 예이다.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야쿠자의 경우는 오히려 정치와 결탁하고 '동업'한 결과가 되었고, 한국의 조폭은 정치 세력에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그들이 주요 경제원으로 삼고 있는 사업들도 '검은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웬만한 나라의 GNP를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는 야쿠자와 조폭은 사뭇 다르다. 사업 내용 역시 경찰의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야쿠자들은 매춘, 마약 사업 등을 벌이는 것도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은 드러내놓고 이러한 사업에 개입하지는 못하고, 개입하더라도 미미한 수준이며, 주로 유흥가를 중심으로 한 이권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운영방식

 

한국 조폭들의 이권개입 방식이 전통적인 방식과는「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일본 야쿠자식의 「기업형 운영방식」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다는 보도도 최근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의 조폭들도 이런 기업형 운영방식을 이용하고 있으나 정도의 차이에 있어 아직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조폭의 움직임에 대해 대검 강력부는 곧 조폭들의 자금원으로 밝혀 진 유흥업소 371개, 건설업체 18개, 판매업소 17개 등 423개 업소에 대해 일제 수사에 나서는 등 본격 「조폭 사냥」에 나섰다.

 

일본의 경우와는 다른 대처 방법이다. 물론 점차 기업화․국제화되고 있는 조폭들에게 이러한 법의 통제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아직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본다.

 

♧국민들의 인식

 

물론 야쿠자와 조폭은 그 나라애 있어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조폭세계와 관련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유흥업에 종사한다든지 여타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경우가 아닌 일반 시민이라면, 그저 '나쁜 깡패들' 정도의 의미일 뿐 조폭 세계를 접하고 더더구나 그에 의해 피해를 볼일은 없다. 그러나 야쿠자는 그 조직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시민들도 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경찰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하물며 일반 시민들은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앞의 예처럼 수상이 야쿠자들에게 경호를 부탁한 적도 있다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려워하되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일본의 경우는 심하게 말하면 '경외'하는 느낌이 들 정도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가족 중 조폭이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뿐, 일본의 야쿠자 마누라들이 그렇듯 '내 남편이 야쿠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경호를 조폭에게 맡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야쿠자와 조폭은 일면 비슷한 듯하지만 구분되는 점이 많다.

 

8)오늘날의 야마구치 구미

 

일본은 1992년 '폭력단원에 의한 불법행위의 방지 등에 관한 법률'로서 일명 '폭력단 신법'을 발효하였는데, 전국의 폭력단 조직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한편 야마구치 조직은 야쿠자 조직은 중소 폭력단을 흡수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야쿠자 전체의 연간 수입은 7조 엔에서 많을 때는 9조 엔을 넘나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폭력단원 한 명이 벌어들이는 금액으로 계산하면 1인당 연간 평균 7천 400만 엔의 매상을 올리는 셈이 된다.

 

그들이 벌이는 사업도 총회꾼이나 해결사의 역할을 하는 소위 '민사 개입 폭력'이나 마약 밀매, 도박 사업 등의 활동 이외에 지금은 건설, 운수, 항만하역, 금융 계통으로 사업을 확대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최근에는 흥행사업으로도 영역을 넓혀 스모, 프로레슬링, 경마 등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연예계까지 그 손길을 뻗치고 있다

 

야쿠자는 지금도 지진과 같은 재변이 일어나면 조직원들을 동원해 수습과 봉사에 나서는 등 국민의 지지 기반을 쌓으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사무라이로서 언제까지나 국민의 영웅으로 남고 싶은 자구적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쿠자는 무사가 아닌 폭력집단이다. 폭력집단은 시민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반사회적 집단, 단체나 혹은 많은 무리의 힘을 빌려 집단적․상습적으로 폭력적 불법 행위를 행하는 집단, 폭력을 생활 자금의 획득 수단으로 삼는 집단이다. 폭력 집단이 사회에서 어떠한 존재로 자리하는가는 일본 폭력 집단의 최고를 지칭하는 '야마구치 구미'라는 이름의 존재를 되새겨본다면 그 해답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각종 인터넷 정보

 

www. web-sanin.co.jp/gov/boutsu/mini33 htm

 

www. warp.or.jp/boutui/page005.shtml

 

R. 토마스, 장진한 옮김, 일그러진 대륙 일본, 교문사, 1993

 

문창재, 동경 특파원 보고서, 한국일보 종합 출판, 1993

 

임영훈, 일본은 일본이다, 우리문학사, 1995

 

안효림, 이것이 일본이다, 한국일보사, 1986

 

조양욱, 일본 리포트, 청한 문화사, 1991

 

이상업, 일본 문화와 그 마음, 보고사, 1998

내용출처 : [기타] http://www.hanshin.ac.kr/~board/way-board/db/Korean_Businessman_in_Japan/file/야마구치%20한글%209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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